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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1987년의 성취 이루어냈던 진보세력, 새로운 시대정신과 소통해야

등록 2017.05.23 10:06수정 2017.05.2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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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1차 범국민행동 '촛불은 멈추지 않는다'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돈키호테는 넓은 들판에 드문드문 서 있는 거대한 적들과 맞서 달려간다. 기이한 모습의 돈키호테와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 낀 비루한 말도 돈키호테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감추지는 못하였다. 그는 분명 정의감에 불타고, 영웅적이며, 자기 헌신적인 기사였다. 그는 이 세상을 위협하는 적들과 맞서기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과감히 던질 수 있는 자였다.

단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돈키호테는 더 이상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볼 능력을 상실하였다는 점이다. 평원에 줄지어 선 풍차들이 거대한 팔을 휘젓는 거인들로 보이는 한 그의 싸움이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길 수 없는 싸움. 과감히 거인의 팔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풍차의 날개에 부딪혀 시궁창에 나뒹구는 것이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그렇게 얻은 상처조차 무적의 거인들과 맞서 싸운 영광의 상처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요즘 "덤벼라, 문빠들!"이라는 선전포고에 대해 갑론을박이 시끄럽다. 나는 한때 반독재의 선봉에 섰으며, 노동운동의 험난한 질곡을 지나온 동료, 선배들에서 돈키호테의 모습을 본다. 그들의 헌신과 공헌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이들이고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또 그러한 헌신으로 인해 소위 진보진영에서 그들에게 특수한 발언권을 줘 온 것도 사실이다.

진보세력에게서 돈키호테의 눈빛을 본다

그러나 최근 한경오로 대표되는 진보언론이나 진보이론가들, 일부 진보정치세력, 노동운동계 등의 모습을 보면, 문듯 1987년 전후 10년의 날카로운 눈빛이 아니라 돈키호테의 눈빛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너무 오랫동안 한 곳만을 응시한 탓일 수도 있고, 긴 터널 같은 시간 괴수와 거인들의 이야기만을 탐독하였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1987년에서 2017년까지 꼭 한 세대의 시간을 일상을 살아왔고, 여전히 하루를 살아 넘기는 것이 녹록지 않은 한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그들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몇 가지로 간단히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존의 진보세력은 역설적이게도 매우 근대적이다. 그들에게 선과 악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며, 그것을 판단하는 "진보적 가치"의 기준이 존재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믿고 주장하는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고 따르지 않는 자들은 경멸적 의미에서 "보수적"이거나 악(惡)한 세력일 뿐이다.

이러한 근대적 사유방식은 다양한 사회적 주제들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층구조의 현대사회를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근대적인고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선악 개념과는 달리, 다원적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선악이나 진보-보수는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오늘 여기에서 가장 다수가 가장 긴급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박근혜 정권의 비정상을 정상화하고 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 할 수 있는 일부터 내일과 모레의 일을 설계해 가는 것이다. 그게 선한 행위이고 그것이 진보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궁극적으로 진보적이고 선한 가치가 있으며, 그것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오늘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대중은 계몽되어야 할 대상 아니다 


둘째, 기존의 진보세력, 특히 진보 지식인이나 언론들은 대단히 계몽적이다. 그들에게 다수의 국민이나 시민들은 계몽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중은 더 이상 그렇게 계몽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본문을 달달 외우게 하였지만, 도저히 실력이 늘지 않았던 학생이 세계를 한 바퀴 돌며 유창한 언어구사력을 갖춘 후에 그 영어 선생님을 찾아 왔다면, 이젠 그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려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국민들은 지난 한 세대를 거치면 세계사적 유례가 없는 민주주의 수업을 온몸으로 배워왔다. 그 사이 세계를 돌아다니면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였으며, IT 강국의 시민들에 걸맞은 강력한 정보와 통신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시민들 모두가 정보의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고, 교류의 속도가 대단히 빨라 종이신문뿐만 아니라 인터넷 매체들조차 그들의 비트를 맞추기 버거운 실정이다. 사정이 그런데도 여전히 누구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그들을 가르치려 든다면 시대착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로 그들이 세계를 판단하는 방식은 매우 관념적이다. 어떤 견해를 주장하고 피아를 구분하는 판단에 있어서 경험적이고 실천적으로 누가 어느 정도를 실현하였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누가 얼마나 선명한 주장을 하였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마치 종교적인 신념과 유사한 행태를 보이게 만든다. 위급한 수술대 위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수혈을 단지 종교적인 이유로 거부하는 것과 비슷한 거부반응을 보이기 쉽다.

오늘은 '노동자연대'라는 단체의 신문에서 "문재인의 개혁, 실망스럽다"로 전면 표지를 장식하였다. 옳고 그름은 각자의 몫이니까 여기서 판단할 문제는 아니고, 한국의 어떤 노동자 연대는 어떤 지점에서는 한국사회 극우 10%와 같은 진영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들에게는 80% 이상의 상식적인 판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념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네 번째로 구진보 세력은 이념 중심적 사고를 한다. 이념적 가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구체적 인간의 삶과 정서보다는 이념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념적 선명성이 떨어지는 인간애의 표출은 감상적이거나 정치적인 쇼와 같은 것으로 비판된다.

때문에 이들이 대중과 공감하는 지대는 대중이 분노할 때뿐이다. 모순이 지적되고 이념적 주장이 가장 선명하게 부각되는 분노의 공간에서는 이들의 이념 중심적 사유방식과 대중의 정서가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유약하고 슬프고 아픈 대중의 정서는 공감될 수 없다.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고졸 출신에 잘 생기지도 않았던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희망을 보았던 이들이 황망하게 그를 보내고 겪어야 했던 트라우마 같은 것을 그들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 그들은 여전히 조건과 상황이 어찌 되었건 자신들의 이념과 거리가 있었던 노통을 비난하고 조롱해 마땅한 무지렁이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몇 가지 평가로 단순화될 수 없는 많은 분석과 반론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사실은, 2017년 오늘의 이 역사적 정권교체는 앞에서 비판하였던 구진보 세력들이 온몸을 던져서 쟁취하였던 1987년의 성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개헌과 관련해서 '87년 체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한 세대가 흐르면서 많은 부분들이 수정,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87년의 헌법을 쟁취함으로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을 권리를 되찾았다. 비록 그 국민의 직접적인 선택이 직선제 개헌을 이룩한 세력들을 배신하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박근혜의 탄핵을 통해 우리는 주권자가 대통령을 선택할 뿐만 아니라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실현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대리인을 선택하는 권리행사를 하였다. 이 모든 과정은 87년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성과이다. 그런 점에서 2017년의 정권교체는 구진보의 헌신이 맺은 열매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보언론과 교체 정권의 지지세력 사이가 갈등이 표면화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87년 이후 꼭 한 세대가 지난 것처럼. 이제 그 한 세대의 진보지식인, 노동자들이 새로운 시대정신과 소통해야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에 실패한다면, 아마도 40년 광야를 유랑한 후 결국에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모세처럼, 지난 세대의 향수에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  
#문빠 #진보 #87년체제 #촛불 #정권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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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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