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선이·효순이를 압사한 현대판 강화도조약

한국인의 생명과 안전 함부로 대하는 법적 보호막, 소파협정

등록 2017.06.13 09:30수정 2017.06.1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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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월드컵 열기로 들끓던 2002년 6월. 한국팀이 D조 예선 2차전에서 미국과 1-1 무승부를 기록한 지 3일 뒤인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이었다. 장소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의 56번 지방도로.

편도 1차선인 이 도로에는 사람이 통행하는 인도가 없었다. 그래서 갓길이 인도처럼 쓰였다. 나중에 인도가 생겼지만, 이때는 갓길 밖에 없었다. 이 갓길은 학생과 주민들의 통행로로 쓰였다. 바로 이 갓길 위로, 생일파티 장소로 가는 두 중학생이 걷고 있었다. 조양중학교 1학년 심미선·신효순.

이곳 차로의 폭은 3미터 40센티미터였다. 이런 차로에, 너비가 3미터 67센티미터인 미군 2사단 장갑차가 출현했다. 도로 폭보다 27센티미터나 긴 장갑차였다. 장갑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으려면 갓길을 침범해야 하고, 갓길을 침범하지 않으려면 중앙선을 침범해야 했다. 이때 맞은편에서 차량이 왔다.

56번 도로는 미군 차량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다. 미군 장갑차 운전사들한테는 익숙한 도로였다. 따라서 미군 운전사들은 맞은편에서 차량이 오는 동시에 갓길에 행인이 있는 경우에 차량 및 행인과의 충돌을 모두 피하는 방법을 사전에 충분히 숙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 등장한 미군 장갑차는 차량과의 충돌을 피하는 데만 전념했다. 갓길에 행인이 있다는 데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장갑차를 갓길 쪽으로 좀더 이동했고, 두 소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장갑차는 두 소녀를 밟고 지나간 뒤 후진을 했다. 시신은 더욱 크게 훼손됐다.

이 자체만으로도 분노할 만했다. 그런데 미국의 태도가 우리를 더욱 분노케 했다. 사건 다음 날인 14일, 맥도널드 2사단장이 병원 영안실을 방문했다. 그는 위로금 100만원을 내놓았다. 액수도 액수이지만, 이 돈은 미군의 공식 자금이 아니었다. 한미친선골프클럽 회장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6월 28일, 2사단 공보실장은 '누구도 책임질 만한 과실이 없다'며 발뺌을 했다. 11월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열린 군사법정에서는 장갑차 운전사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 한국 법원이 아닌 미군 부대에서 열린 재판이니,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무죄 평결의 명분은 공무 중에 벌어진 우발적 사고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미군의 어느 누구도 미선이·효순이의 불행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미국은 그렇게 무책임했다. 우리 국민들의 가슴은 들끓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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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효순이를 친 장갑차와 같은 기종. ⓒ 위키백과 영문판


소파협정, 미군에게 면죄부를 주다

미군 장갑차 사건 즉 미선이·효순이 사건에서처럼 미군이 한국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믿을 만한 법적 보호막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주한미군지위협정 즉 소파(SOFA)협정 및 부속문서들이다.

만약 소파협정 및 부속문서들이 엄격하여 미군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면. 애당초 이런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낮았을 것이고 또 설령 사고가 발생했다 해도 미국이 그처럼 무책임하게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파협정 및 부속문서들은 미군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짓밟더라도 미군은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더욱 더 조심성 없이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미군장갑차 사건 전년도인 2001년 소파협정이 개정되었다. 그래서 미선이·효순이 당시에는 2001년 소파협정이 효력을 발휘했다. 이 협정 제22조에서는 미군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 어느 나라 법원이 재판할 것인지를 규정했다.

제22조 2항에 따르면, 한국 법률에는 처벌규정이 없고 미국 법률에만 처벌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미국이 재판권을 갖는다. 당연한 규정이다. 어차피 이 경우에는 한국 법원이 간여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미국 법률에는 처벌규정이 없고 한국 법률에만 처벌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한국이 재판권을 갖는다. 이 역시 당연한 규정이다. 미국 법원이 간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미군은 꼼짝없이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규정을 무력화시키는 장치가 있다. 소파협정의 부속문서인 합의의사록이다. 이것은 조약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관한 합의사항을 담은 문서다. 소파협정 합의의사록은 협정과 함께 법적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도 '구체적인 법률관계(권리의무)를 규정한 합의의사록은 조약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의 결정을 2001년 3월 21일 내렸다(사건번호 99헌마139·142·156·160병합).

따라서 소파협정은 상위 조약이 되고, 합의의사록은 하위 조약이 된다. 둘 사이에는 상위 법규와 하위 법규의 관계가 성립한다. 합의의사록이 소파협정을 구체화할 수는 있어도 소파협정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소파협정 제22조 2항에서는 한국 법률에만 처벌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한국 법원이 재판권을 갖는다고 규정했지만, 합의의사록에서는 '미군 당국의 요청에 의하여 한국이 이 권리를 포기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하위 법규인 합의의사록이 상위 법규인 소파협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독소조항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미군 범죄자가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을 길을 열어둔 것이다.

물론 미국이 요청해도 한국이 재판권을 고수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미관계가 대등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미국 자신이 사드 비용을 부담한다고 말한 뒤 사드 배치를 강행해놓고는, 막상 배치가 끝나자 미국 대통령이 "돈 내라!"며 억지를 부릴 수 있는 게 한미관계다. 이런 억지가 통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의 재판권 포기 요청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미군 범죄자는 용이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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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상륙한 미군. 부산시 서구 부민동의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살인죄·강간죄·강도죄처럼 양국 법률에 똑같이 처벌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어느 나라가 재판권을 가질까? 이 점은 22조 3항에 규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의 재산·안전이나 미군 구성원 혹은 미군 가족의 신체·재산에 대한 범죄(A), 공무 중에 발생한 범죄(B)에 대해서는 미국이 재판권을 갖는다. 기타 범죄(C)에 대해서는 한국이 재판권을 갖는다.

B에 대해 미국이 무조건 재판권을 갖는 게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공무와 무관하게 벌어진 범죄일지라도, 미군이 공무수행 중의 행위로 인정해주면 미군 범죄자가 한국 법원의 재판을 빠져나갈 소지가 크다.

그런데 A에 대해 미국이 재판권을 갖는 것은 언뜻 보면 크게 불합리하지 않다. 예컨대, 미군이 한국 땅에서 동료 미군을 살해하는 행위는, 살인을 금하는 한국 형법을 위반하는 행위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도 한국 법원이 마땅히 재판을 해야 한다. 

하지만, 미군이 우월적 지위를 갖고 한국에 주둔하는 상황에서 그런 미군 범죄자를 한국 법정에 세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어차피 미군 상호간에 벌어진 일이라 한국인이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미국이 재판권을 갖는다 해도 우리 국민들이 크게 분노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C다. C는 공무에서 벗어난 미군이 한국인을 상대로 살인·강간·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 대한 것이다. 소파협정 제22조 3항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 대한 처벌규정이 미국 법률에도 있고 한국 법률에도 있더라도 한국 법원이 1차적으로 재판권을 갖는다. 지극히 당연한 규정이다.

하지만 C에 관한 소파협정 제22조 3항 역시 합의의사록에 의해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미군이 요청을 하면 한국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재판권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경우에도 미군 범죄자가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정리한 소파협정과 합의의사록을 종합하면, (1)미군이 미국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는다. (2)미군이 한국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한국이 재판권을 포기하면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 (3)미군이 한·미 양국 법률에 의해 모두 처벌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 그 범죄가 같은 미군에 대한 것이거나 공무 중에 벌어진 일이면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고(3-1) 그 범죄가 한국인에 대한 것이면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한국이 재판권을 포기하면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3-2).

결과적으로 미군 범죄자는 어느 경우에도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을 길이 있다. 한국인을 상대로 살인·강간·강도 등의 흉악 범죄를 저질러도 무사히 빠져나갈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불합리성은 조선과 일본 간에도 있었다. 1875년 강화도조약이 바로 그 증거다. 정식 명칭이 조선일본수호조규인 이 조약은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강요한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범죄를 범하더라도 조선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규정했다. 조약 제10조는 다음과 같다.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개항장에 체류하는 동안에 조선국 인민과 관련된 범죄를 범한 경우에는 일본국 관리가 재판한다."

이 규정 덕분에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죄를 지어도 조선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지금의 미군 병사들처럼 조선인들한테 안하무인격으로 함부로 대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소파협정과 부속문서들은 강화도조약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소파협정과 부속문서들이 현대판 강화도조약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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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조선·일본 양국의 기념파티.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소파협정은 강화도조약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지만, 어찌 보면 훨씬 더 교활한 협정이다. 강화도조약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일본이 재판권을 갖는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소파협정에서는, 이런 경우에는 미국이 재판권을 갖고 이런 경우에는 한국이 재판권을 갖는다는 식으로 규정했다. 언뜻 보면 한국을 많이 배려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눈에 잘 안 띄는 하위규범(합의의사록)을 통해 한국이 재판권을 포기하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눈에 잘 띄는 소파협정을 통해 한국인들을 배려하는 척하면서, 눈에 잘 안 띄는 합의의사록을 통해 한국인들을 기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파협정 및 부속문서들이 강화도조약보다 훨씬 더 간교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간교한 소파협정이 미선이·효순이를 압사한 주범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군 장갑차 사건 #미선이 효순이 #소파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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