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같은 해 태어난 남자, '비극'이 되다

생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김구 암살범', 안두희

등록 2017.06.26 17:02수정 2017.06.2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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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두희
안두희 권중희
안두희(1917-1996)는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사상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함석헌(1901-1989)과 고향이 같다. 또 18년간 독재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인권침해를 자행한 박정희(1917-1979)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김구(1876-1949)를 암살하는데 이 사건은 그 후 안두희의 개인사뿐 아니라 그의 가정사 그리고 해방 후 한국현대사에 큰 비극과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암살당하기 열 달 전 인 1948년 8월 15일 김구는 남북 분단정권 때문에 한반도에 "동족상잔의 비참한 내전이 발생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김구가 운명하고 정확히 1년 후에 6.25 전쟁이 발발한 것을 생각해 보면 김구의 예언이 그저 무섭고 놀라울 뿐이다.

지금까지 안두희의 김구 암살 배경과 동기에 대해 이승만과 미국정부의 관여, 묵인, 지원 등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었지만 놀랍게도 지금까지 문헌적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설사 이승만과 미국정부가 눈엣가시 같은 김구를 제거하라고 안두희에게 '지시'나 '암시'를 했더라도 공적인 문서보다는 사석에서 '구두'로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국가기관에 김구 암살사건과 관한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안두희에 대한 심문기록은 물론 재판기록조차 현존하지 않는다. 이승만 정권 차원에서의 체계적 기록은폐와 말살작업이 있었나란 의문이 들게 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7시간'에 대한 기록과 장준하 의문사 당일 날 중앙정보부 기록이 없다는 것도 정권차원에서 이런 일들이 행해지는 것이 아닌가란 의문을 증폭시킨다.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대지주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4년 그는 평북 용천군 신의주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 서기로 일했다. 하지만 1935년 그는 금융조합에서 직장 상사를 폭행하여 쫓겨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36년 부모중매로 동갑내기 장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결혼이라 그는 처에 대한 애정도 없었고 그래서 부인은 내버려 둔 채 낚시와 사냥으로 밖에서 시간을 보낸다.

1939년 그는  일본에 유학가 메이지 대학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부잣집 막내아들인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공부에 열중하기 보다는 댄서 등과 정을 나누고 기생과 눈이 맞아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주색으로 마음을 잡지 못한 안두희는 결국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일본 유학생활을 중도 포기하고 귀국한다.

1941년 일본에서 돌아온 안두희는 여행증명서를 위조하여 이번에는 중국을 여행 하는데 여행 중 들통이 난다. 하지만 고교 동창생을 만나 그 위기를 모면한다. 그 뒤 안두희는 중국에서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대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42년 안두희는 중국에서 기생 박씨와 3번째 결혼을 한다. 그러나 방랑벽이 심해서였을까 12년 후인 1954년 그는 "결혼한 지 11여 년간 단 10개월을 계속하여 부부생활을 해보지 못했다"라며 지난날을 회고하기도 했다.

1942년 가을 안두희는 처 박씨의 오빠와 송전양행이라는 회사를 경영하여 돈을 좀 번다. 1945년 1월,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폐색이 짙어지자 안두희는 귀국하여 용암포 군청에서 군청직원으로 근무한다.


'알거지'로 몰락한 대지주의 아들

해방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대지주였던 그의 집안은 한순간에 '알거지'로 몰락했다. 이런 북한에서 버티다 못해 결국 1947년 '빈손'으로 월남한 안두희는 이때부터 '빨갱이'라면 치를 떨게 된다. 그래서 월남한 그는 반공단체인 서북청년회에 가입, 서청 총무부장으로 있는 등 적극적으로 우익단체 활동을 한다. 이때 우익선봉대에서 활동하던 안두희는 당시 특무대장이던 김창룡(1920-1956)을 만나는데 이때 김창룡과의 만남은 이제 안두희의 다가올 일생에 큰 전환점이 된다. 

1948년 안두희의 처와 아들도 월남하면서 안두희는 생활에 안정을 좀 찾아가고 그래서 그런지 같은 해 육사 특8기로 입교해 포병사령부 연락장교가 된다. 동시에 서북청년회 극우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안두희는 남한에 있는 공산주의자와 반동자 색출과 처벌에 적극 나섰고 이 과정 중 김창룡의 주선으로 이승만과도 만나게 된다. 물증은 없지만 이때 이승만과의 만남을 통해서 안두희는 이승만이 김구를 얼마나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기는가를 실감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1949년 4월 안두희는 김구가 몸담고 있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고 결국 김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김구를 암살하기 전까지 안두희는 김구를 총 여섯 번 만난다. 

1955년 안두희는 <시역(弑逆)의 고민>을 출판한다. 이 책은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고 옥중에 있을 때 써두었다가 출옥 후 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 대해서 안두희는 어떤 때는 자신이 직접 쓴 것이라 하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특무대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밝히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하여간 워낙 김구 암살과 관련한 공식기록이 전무한 상황이라 이 책은 안두희의 김구 암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일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신뢰성의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이 책의 일부 내용을 통해서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이 책의 제목 <시역(弑逆)의 고민>에서 '시역(弑逆)'은 "사람이 부모나 임금의 목숨을 빼앗다"라는 뜻으로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는데 있던 큰 고민을 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먼저 이 책에서 안두희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김구 암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버님 5년 전(1949년) 6월 26일 그날 두희가 꿈 아닌 생시의 두희가 제 총을 가지고 제 손으로 분명히 김구 선생님을 쏘았습니다. 아버님께서도 평소 숭배하시던 백범 선생님을 아버님의 자식인 두희가 제 정신으로 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도 평소 숭배했던 '백범 선생님'을 그것도 '제 정신'으로 안두희는 살해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김구 암살 직후 정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선혈에 물들어 쓰러지시는 (김구)선생님을 정시할 수 없어 옆 마루방으로 튀어 나왔다. 공허의 순간이며 무아의 경지이다. 서쪽 창문에 막아서서 망연히 머언 하늘 뭉게구름을 바라보았다. 십초 또 이십초. 하늘도 말이 없고 땅도 소리가 없다. 아직도 손에 쥐어진 권총에서는 화약연기가 나고 있다. 나는 천천히 포병 '뺏지'와 소위계급장을 떼 던지고 다시금 권총을 든 채 한 걸음 한 걸음 층층대로 발을 내려디디며 「지금 자살할까?」하고 자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발작적인 고민의 넋두리가 아니었다. 「아니다. 자살- 그것만이 시역(弑逆)에 대한 속죄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간명한 자답이 뒤를 받쳤다. 아래층 응접실에서는 잡담에 취하여 세상을 모르고 있던 모양이다. 멀리 정문(大門)에서 파수(把手)보던 순경이 '칼빙총'을 내저으며 「지금 이층에선 무슨 총소리야!」하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나는 종용(從容)히 두 손을 들면서 「지금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하고 나섰다.「아니 뭐?! 이놈 죽여라...」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 교자가 날아든다. 대번에 정신이 흐려지며 드디어 매의 감촉도 아득아득 사라졌다."

김구 암살 순간, "공허의 순간이며 무아의 경지"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암살한 현장인 경교장.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강북삼성병원 구내에 있다.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암살한 현장인 경교장.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강북삼성병원 구내에 있다. 김종성

안두희는 김구를 암살 한 직후 심정이 "공허의 순간이며 무아의 경지"라고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자살을 생각하지만 곧 "아니다. 자살- 그것만이 시역(弑逆)에 대한 속죄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라며 자살을 포기한다. 그리고는 "지금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라고 금방 자수한다. 그 후 안두희는 몰매를 맞고 정신을 잃는다. 그 후 암살범으로 감옥에 수감된 안두희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마음이 잔잔하다. 다소 정치적 번민은 있었으나 지금은 자기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중략- 정치적인 것을 다 집어치우고 인간적으로 돌아가면 가신 선생의 생각이 절실하다. 나는 몇 번 죽여주어도 좋다. 빨리 사형을 내려달라...만일 사형을 나에게 내리지 않고 미온적인 형벌이 있다면 나는 내 자신이 목숨을 끊어버리겠다."

김구를 암살 한 후 교도소에 수감된 안두희에게서 전혀 후회나 반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는 오히려 "할 일을 다했다"며 어떤 이상한 확신에 찬 듯하다. 더욱이 자신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으면 자살 하겠다는 각오를 이야기 한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가 아는 데로 안두희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도 자살하지 않으며 무려 80세가 될 때 까지 그 생명을 부지한다.

"안두희는 미군방첩대 정보원"

김구 암살 3일 후인 1949년 6월 29일 미군방첩대(CIC) 소속의 조지 실리 소령은 미국정부에 보내는 <김구암살관련배경정보> 보고문서에서 "안두희는 한국주재 CIC의 정보원(informer)이었으며, 후에는 요원(agent)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정황적 증거로 볼 때 미국정부와 이승만이 공동으로 김구 암살을 기획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김구 암살에 이승만이 직접 지령을 하였다는 물적 증거나 공식문서는 현재까지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김구 암살 후 사건의 뒤처리에는 이승만 정권이 직간접으로 개입하였던 것은 여러 번 확인된다.

김구 암살 후 수감 중 인 안두희에게 이승만 정권 인사들과 한국주재 미군방첩대 요원들이  어떤 태도를 보여주는지 <시역(弑逆)의 고민>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CIC본부 계장병도 '동정적인 호의를 가졌을망정 절대로 증오하는 적의는 가진바 아니니 너그러운 기분으로 대하여 달라' 고 나(안두희)의 심정을 달래는 것이었다 -중략- R중위는 위로의 인사인 듯 한 미소를 건넨다. 나의 요청에 의하여 타인을 물리치고 주재관인 R중위, R소위, O소위 네 사람만이 대좌하였다."

그리고 R중위, R소위, O소위로 부터 조사를 마친 후 안두희는 그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말을 다 하고 나니 공허한 흉강(胸腔)에는 희열만이 가득할 뿐이다. 나는 이로써 나의 임무를 다한 것이며 생의 가치를 거둔 것이다."

군장교들이 암살범 안두희를 조사하던 중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조사 후 안두희가 '희열'과 '생의 가치'를 느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또 안두희는 1949년 6월 28일 감옥에서 자신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는데 그 신문내용은 안두희에게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1면은 보지도 않고 쥐어지는 대로 2면에 눈을 던졌다. 28일부의 것인데 지면 반 남짓이 내 사건(김구 암살사건)으로 메워져 있다. 나라고 실린 사진을 자세히 보니 안경을 쓴 엉뚱한 사람인 데는 웃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언론의 오보인지 이승만 정권의 국정농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문에 실린 김구 암살범의 얼굴은 안두희도 모르는 "안경을 쓴 엉뚱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승만 정권이 김구 암살에 대한 진상규명보다는 은폐에 방점을 둔 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살인수에게 황송스러운 온정을 베풀고 갔다"

그 후 안두희는 <시역의 고민>에서 자신의 감옥생활을 이렇게 적는다.

"식사 때의 감시병은 친절했다 -중략 -오늘저녁 식사와 담배 맛은 근일에 없던 꿀맛이다. 처음으로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초경(初更)에 어떤 장교 한명이 영창을 지나다가 들여다보면서 돈독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감시병에게 물 준비와 변기의 마련이 충분히 되었는가 검사하라고 명령하는 등 살인수에게는 황송스러운 온정을 베풀고 갔다. 그 온정이 몹시도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 중략- 단 며칠 동안에 체중이 늘었을 것만 같다."

안두희 자신이 느끼기에도 "살인수에게는 황송스러운 온정을 베풀고 갔다"는 심정이다. 그리고 그렇게 온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해서 그런지 안두희는 "단 며칠 동안에 체중이 늘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안두희평전> 저자 김삼웅에 의하면 안두희는 "말이 감방이지 침대와 응접실을 갖춘 호텔급 특별 감방"에서 지냈고 "형무소장과 함께 식사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안두희의 심문기록은 물론 재판기록조차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안두희 재판 관련 '기록'은 언론인 오소백의 방청기 뿐인데 오소백의 방청기를 통해 1949년 8월 3일 안두희가 재판받는 법원 주변의 풍경을 살펴보자.

"1949년 8월 3일. 법원 부근 전신주와 벽에는 '대한민국의 초석이며 애국자인 안두희를 석방하라' 비라가 공판이 끝나는 날까지 붙어 있었다."

오소백이 기록한 안두희 재판 방청기를 보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판 사 : 한독당에 입당한 동기는?
안두희 : 나는 맨 처음에 조민당에 가입하였으나 별로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특히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인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을 두 국부로 모셔왔고, 또 숭배해왔다. … 그 후 두 분이 분열되자 처음에는 표면적인 분열이 아닌가 하여 앞으로 다시 합류하게 될 것을 바라며 선생을 모셔오던 중 우연히 홍종만과 가까워졌고, 홍종만의 열렬한 권고와 묘한 방책에 이끌려 입당하게 되었다. 당에 입당한 것은 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생을 친히 모실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입당했다(피고는 음성을 높여 말했다). -중략-
피고는 김구 선생을 향하여 공산주의 이적행위에 가담하지 말고 본심으로 돌아가서 간신배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권하자 선생을 '네가 내게 반동하느냐, 나에게 반동하면 국가민족에 대한 반동이다'라고 노하기에 그 순간 정신이 혼란하고 흥분하여, 김구 선생이 있음으로서 대한민국에 지장을 주며, 그것이 곧 민주정부 육성에 장해물이 된다고 하고 여순사건, 강·표소령 월북사건, 장덕수사건, 공산당과의 합작 등을 생각하고 미국제 권총으로 약 1미터 거리에서 제 1탄을 발사하고 계속하여 3, 4발을 쏘았다.- 중략-

변론인은 피고를 애국자로 규정하여 대한민국에서 표창을 하고 동시에 무죄석방을 주장하였다.

변호인 : 피고는 한독당을 위해 입당한 것이 아니라 김구선생을 어려서부터 숭배했기 때문에 당에 가입한 것이다.-중략-(김구)선생은 5·10선거를 반대하고 단정을 반대하고, 임시정부 주석이라 하며 대한민국을 반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무혈통일의 허울 좋은 이념 아래 비현실적인 길을 걸어 왔다. 본 변호인은 범행목적 동기는 정당했다고 인증한다. 국가가 중요한가? 법이 중요한가? 피고의 행위는 대한민국에서 표창할 일이다. 형벌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지 않고 이를 회개케 하고 교육하는데 있을 것이니 육군소위 안두희에 대해서는 무죄석방을 요구한다. 피고는 의식적으로 범행을 하지 않았고 또 자수하였으니 이는 현명한 심판관께서 많이 참작하여 2년 집행유예 정도로 처결을 바란다.
(검사의 진술에 대한 이와 같은 변호인의 반박이 있고 무죄석방을 요구하자 법정 내에서는 난데없는 박수소리가 들렸다. 재판관은 박수를 치면 안된다고 주의한다.)"

이런 재판과정을 거쳐 안두희는 1949년 11월 무기형에서 15년으로 감형되고, 1950년 3월 다시 10년으로 감형된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 난리 중에도 송요찬 헌병사령관과 김창룡 특무대장은 육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안두희를 석방시켜 대구로 데려갔다. 그리고 육군특무부대 문관으로 특별 채용했다. 이어서 1950년 7월 10일 그는 국방부 특명 제4호로 육군 소위로 복직하여 수도사단 야포대에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1950년 9월 15일 그는 중위로 진급하여 육군정보국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하게 된다.

게다가 그는 1951년 3월 대위로 승진되고 육군본부 정보국원, 제8군단 정보연락장교단원 등을 거쳐 잔형집행면제를 받는다. 그리고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인엽, 정보국차장 이후락 등을 만나 미국 KLO(특수공작기관)를 본 딴 한국 KLO를 만들라는 지침을 받고 일을 수행한다. 1952년 5월 26일 안두희는 헌병 총사령부 문관으로 채용된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인 1954년 안두희는 다시 현역 소령, 1956년 중령으로 진급하고 예편하여 군납 식료품 공장인 신의기업사를 강원도 양구에서 1956년 10월부터 10년 정도 창업하여 경영한다. 그리고 이 군납업으로 그는 강원도에서 거부가 되었다. 당시 개인 호수가 있는 그의 호화 별장에는 군장성들은 물론 자유당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줄을 잇고 군경이 경호할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의 각별한 배려가 있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60년 4·19 직후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0개월여의 추적 끝에 1961년 4월 18일 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 받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검찰에 인계하였다. 하지만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한번 확정 판결된 사건은 다시 심리하지 않는다는 형사소송법상의 원칙)의 원칙에 의거해 형사처벌 불가판정을 받았다.

"백범 살해범의 해외출국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1965년 안두희는 처 박씨와 이혼을 하고 전처와 3남매 자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당시 국내에서 갖은 테러로 자신의 신변안전에 두려움을 느낀 안두희도 해외이민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 후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후에도 몇 번에 걸쳐 미국 이민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백범 살해범의 해외출국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여론에 밀려 좌절의 고배를 마신다.

1980년대 이후 그는 해외이민이나 도피를 포기했고 정부에서도 더 이상 그의 신변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1992년 4월 13일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해 김구 암살의 배후에 김창룡이 있었으며 또 범행에 앞서 당시 미CIA 한국 담당자였던 미군 중령과 수차례 만나 "김구는 없어져야 한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증언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부 내용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어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안두희의 말년은 문자 그대로 비참하고 처량했다. 그는 김구 암살 후 테러를 피하기 위해 20여 차례 수시로 여기저기 집을 이사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 차례에 걸쳐서 몽둥이와 칼 등으로 수시로 피습을 당해서 몸과 마음이 한시도 성할 날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께 안두희는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기사였던 당시 46세의 박기서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죽었다. 그는 사망 당시 80세였고 중풍과 치매까지 겹쳐 식물인간과 같은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가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망현장에서는 그의 4번째 처 김씨(당시 63세)가 그 달초 미국에 사는 장남(56)내외에게 생활고를 호소하며 자식들을 원망하는 내용의 쓰다만 편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 후 안두희의 시신이 안치된 인천의료원 영안실에는 그의 4번째 처 김씨만 잠시 들렀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를 보내주러 온 조문객이 이 지구상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더욱이 미국에 사는 자녀들조차 아버지인 그의 죽음을 보러 귀국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에 있는 그의 한 아들은 안두희의 자식이란 것이 밝혀져 결혼 일보직전에 파혼의 아픔을 당하기도 했다. 그랬으니 자식들도 그런 '민족의 반역자' 아버지 안두희를 마음 깊이 원망했을 것이다. 안두희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안두희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승만과 미국정부에 의한 '토사구팽'이라고 표현해야 적절할 듯하다.

김구를 암살한 원죄로 인한 이혼, 가정파괴, 자녀들과의 의절, 주위의 냉대와 멸시로 인한 극도로 고립되고 빈곤한 생활, 생지옥과 같은 기구한 삶을 평생 살아야 했던 안두희! 그는 아마도 1949년 6월 26일, 그날 경교장에서 김구를 암살하고 그 현장에서 왜 자살하지 못했을까! 라며 깊은 탄식과 후회를 수도 없이 많이 하지 않았을까?
#김구 #안두희 #김성수 #이승만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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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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