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실수하면 징벌용 조끼를 입고 일해요

[인문책 읽기] 아사히 비정규직 목소리 <들꽃, 공단에 피다>

등록 2017.07.17 08:23수정 2017.07.1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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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이 돋고 들꽃이 피는 자리에는 비가 아무리 드세게 퍼부어도 흙이 좀처럼 쓸리지 않습니다. 작은 풀꽃이지만 작은 풀뿌리로 흙을 단단히 움켜쥐거든요. 나무만 서고 들풀이 없으면 제아무리 우람한 나무라 하더라도 빗줄기에 흙이 쓸려서 굵은 뿌리가 앙상하게 드러나곤 해요. 우람한 나무 둘레에 돋는 풀을 샅샅이 뽑거나 죽인다면 나무는 흙을 제대로 붙들지 못하면서 그만 시름시름 앓다가 쓰러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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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한티재

들풀 한 포기는 매우 작고, 들꽃 한 송이는 무척 작습니다. 얼핏 스치면 안 보이기 마련이고, 짬을 내어 가만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느끼기조차 어려워요. 그러나 작은 들풀하고 들꽃이 있기에 들을 이루고 숲을 이룹니다. 작은 들풀하고 들꽃이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들이며 숲이 깨어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16명에 대한 권고사직 강요를 계기로 노동조합을 만드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 원청에도 없는 노동조합을 하청 비정규직이 만들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도 의심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10쪽)

일 년 반 동안 구미 전역을 들쑤시며 투쟁했고, 지역에서는 우리 문제가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아사히글라스는 꿈쩍하지 않았고 그 배후에는 법률자문 김앤장이 있었다. (18쪽)

경상도 구미에 아사히글라스라고 하는 다국적 유리제조 기업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기업이 꾸리는 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된 일과 여러 푸대접을 바꾸어 보고자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열었다고 하는데,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여니, 손전화 쪽글로 아주 가볍게 해고 통보를 했대요.

멀쩡히 일을 잘 하던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열려고 했다는 까닭 하나로 일터에서 쫓겨나야 했다는데, 노동조합은 불법이 아닙니다. 노동조합은 일하는 사람이 스스로 권리를 지키려는 아주 자그마한 몸짓입니다. 헌법에서도 노동3권을 누려야 한다고 똑똑히 밝혀요.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정규직뿐 아니라 비정규직까지 노동조합을 마음 놓고 열지 못합니다.

(입사) 3개월 후부터는 쉬는 날이 없어졌다. 연차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가족을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실수한 사람에게 징벌용 조끼를 길게는 한 달 이상 입혔다. (29쪽)


현재 나는 20개월째 아사히글라스와 싸우고 있다. 20개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였다. 몇 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살아 보니까, "비정규직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는 답이 나왔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꼭 없어져야 한다.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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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들꽃, 공단에 피다>(한티재 펴냄)를 읽습니다. 이 책은 얼결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던 작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을 쓴 이들은 여태 아주 조용히 공장 노동자로 지내던 우리 이웃입니다. 글재주나 말솜씨가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엄청난 운동가나 활동가도 아닙니다. 바로 옆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수하거나 투박한 아저씨입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일할 권리를 지키고 싶어서 비정규직이어도 노동조합을 열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들 스스로뿐 아니라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이웃 노동자 누구나 일할 권리가 짓밟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동조합을 이루려 할 뿐입니다.

한국 정부에 노동부가 있고 노동청이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일하는 사람을 지켜야 할 공공기관입니다. 커다란 공장이든 작은 공장이든 노동조합이 제대로 서도록 도울 구실을 할 공공기관이지요. 그러나 노동부도 노동청도, 또 시청이나 군청도, 공장 노동자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제대로 안 살피지 싶습니다. 일하는 사람 스스로 노동조합을 열려고 할 적에 아사히글라스 같은 기업에서 손전화 쪽글로 어처구니없이 해고 통보를 해도, 이를 바로잡거나 나무라는 구실을 못 합니다.

몇 개월에서 보통 5∼6년 넘게 일해 온 동료들의 얼굴을, 노동조합 만들고 제대로 처음 마주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고 반가웠다. 오랜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도 서로 이름조차 알 기회가 없었다. 삶에도 관계에도 여유가 없었고 생산 물량에 치여 일만 해온 게 우리 현실이었다.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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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으나 경찰이 강제철거를 했다. ⓒ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요? 한국은 어떤 나라로 나아가야 아름다울까요? 이 나라는 '기업을 하기 좋은 나라'인가요? 이 나라와 이 나라 지자체는 '기업을 하기 좋은 도시'가 되면 아름다울까요?

그렇다면 기업이란 어떤 곳인가요? 기업주 몇 사람만 돈을 잘 벌면 될까요? 기업을 이루는 수많은 사람이 다 같이 즐겁고 넉넉하게 일하고 살림을 가꿀 때에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언제쯤 '기업을 하기 좋은 나라·도시'라는 허울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요? 이 나라에서 대통령 자리에 서는 '일꾼'은 언제쯤 공장 노동자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대통령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나 똑같은 일꾼이면서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시민이요 똑같은 이웃이라는 대목을 당차게 밝힐 만할까요? 정규직하고 비정규직 사이에 놓인 높다란 금을 이 나라 지도자나 기업인은 언제쯤 스스로 떨쳐내어 다 함께 손을 맞잡아 활짝 웃는 아름다운 길로 거듭날 만할까요?

법에서는 분명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왜 보장되지 않는가. 아사히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런 상식적인 질문에서 출발하고, 이들이 밟고 있는 법적 구제 절차는 그 답을 듣기 위한 과정이다.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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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단체사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두 우리 수수한 이웃입니다. ⓒ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들풀하고 들꽃이 흐드러지면서 나무가 우거진 숲은 제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숲흙이 쓸리지 않습니다. 들풀 한 포기 없고 들꽃 한 송이 없이 나무 몇 그루만 오도카니 선 곳은 도시이든 시골이든 숲이든 작은 비바람에도 흙이 쓸려서 흙물이 흘러내립니다.

높고 낮은 멧봉우리가 오랜 나날 비바람을 맞아도 높이가 낮아지지 않는 까닭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무뿐 아니라 숱한 풀꽃이 함께 살기에 높고 낮은 멧봉우리는 오랜 나날 씩씩하면서 튼튼합니다. 앞으로 한국이라는 나라가 튼튼하려면 어떠한 길을 걸어야 아름다운가를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에서 대통령 자리에 서서 일하는 분은 누구하고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섞을 적에 아름답게 일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좋겠어요.

노동조합만 만들면 잘될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자본은 우리보다 한 수 위였다. 우리를 잘 분석했다. 자본은 무리수를 두면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하청업체 하나를 통째로 날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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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편지를 받을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항의편지를 건네러 가는 길은 늘 가로막힙니다. ⓒ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아주 조그마한 사람인 이웃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요. 아주 자그마한 사람인 이웃 노동자를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라요. 대통령은 청와대 앞에서 작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 곁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요. 시장과 군수는 시청이나 군청 앞에서 작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요.

들풀을 짓밟거나 들꽃에 등돌리는 길에는 민주나 평화나 자유나 평등이란 자라지 못합니다. 들풀을 쓰다듬고 들꽃을 아끼는 길에서 비로소 민주나 평화나 자유나 평등이 자랄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작은 목소리를 내는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녁 일터를 되찾을 뿐 아니라, 앞으로는 '비정규직'이라는 딱지가 말끔히 사라질 수 있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들꽃, 공단에 피다>(아사히 비정규직지회 글·사진 / 한티재 펴냄 / 2017.5.29. / 15000원)

들꽃, 공단에 피다 - 세상을 바꾸는 투쟁,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이야기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지음,
한티재, 2017


#들꽃 공단에 피다 #아사히 비정규직 #비정규직 #인문책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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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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