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바·도넛과 덮밥, 그리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나다

바람의 나라 오키나와 4

등록 2017.08.14 09:40수정 2017.08.1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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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맞는 첫날 아침은 대개 부산하다. 정리하지 못한 짐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정신 사납고 갑자기 변한 환경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 컨디션은 100%가 아니다. 늘 가벼운 몸살기가 느껴진다. 그 와중에 아이는 또 신이 나서 방방 뛰어다닌다. 정말 혼이 나가주신다.

이럴 때 가장 큰 보약은 잠. 늦게 느리게 느리게 일어나면 아주 좋다. 하지만 패키지 여행이라면 어림없다. 입맛이 없어도 밥을 먹고 준비해서 정시에 나타나 주어야 한다. 아, 그렇지. 우리는 자유여행이다. 럭키! 최대한 게으름을 피워본다.


비싸게 얻은 귀한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펄 속의 낙지처럼' 침대 안에서 뒹굴거리고 꼼지락거린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최대 호사다. 게다가 이 호텔의 침대와 공간은 일본치고는 넓어서 게으름 피우기에 좋았다. 오키나와 여행자들의 후기를 읽다 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 '그런데 방이 비좁다'였는데 최소한 우리 방은 답답하지 않았다.

늑장을 부렸더니 기분이 상쾌하다. 산뜻한 기분으로 가족을 차에 태우고 출발했다. 호텔 주변에 사람과 차가 뒤엉켜 좀 애를 먹었는데 알고 보니 호텔 1층에 렌터카 업체가 있었다. 다음에 오키나와에 오거든 공항에서 곧장 모노레일을 타고 와서 이곳에서 차를 렌트하리라.

내비게이션이 이끄는 대로 달려 수월하게 고속도로를 탔다. 어제 렌터카 업체 직원이 설치해준 ETC 카드(일본의 하이패스카드)는 고속도로 입구에서 이상 없이 작동했다. 그때쯤 나도 일본차와 도로에 적응이 됐다. 어제의 혹독한 훈련 덕이다. 평일 낮이라 길은 막힘 없었고 눈치껏 최대속도로 달렸다. 고픈 배를 안고 목적지 '미야자토 소바'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미야자토 소바
식당 안은 평일이었음에도 일요일 오전의 여유로운 냄새가 풍겨왔다. 고요와 활기가 묘하게 뒤섞인 채 몇 팀이 조용히 그릇을 끌어안고 느긋하게 면 가닥을 호로록 빨아들이고 있었다. 좌식테이블에는 아직 학교에 가지 않을 법한 아이들과 엄마가 음식을 기다리며 재잘거리고 있었고 의자테이블에는 신문을 뒤적이며 한 끼를 때우는 초로의 남자도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카메라를 꺼내는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다행히 식권 자판기가 있어 주문은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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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토 소바 내부 오키나와 시골 국수집 ⓒ 강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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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토 소바 3총사 가장 맛있는 건 시원한 국물의 다시마 소바 ⓒ 강현호


멋을 부리지 않은 실내 한구석에 식권 자판기가 있기에 소바를 종류별로 1개씩 뽑아다가 식당 주인에게 건네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이 식권 자판기는 오키나와 여러 곳에서 목격되었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해 간다고 해도 일본인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로 주문을 한다는 게 두려운 게 사실이다. 그 두려움이 여행지의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신속하게 주문하고 후다닥 음식만 받으면 좋겠다 싶은데 여지없이 식권 자판기가 있으니 참 반갑다.

하지만 한 발 멈춰 생각해보면 오키나와 현지 입장에서는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사람이 할 일이 줄고 있거나 일할 사람이 없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요즘 여기저기서 기술의 세례, 과학의 축복인양 떠들어대는 4차 산업도 결국 이런 자판기에서 시작되고 그 끝은 인간 노동의 변화를 끌어내고야 말 것이다. 마냥 환호만 할 일은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게 '배고픈 소크라테스' 흉내를 내고 있자니 주인장 포스의 여인이 각기 다른 고명의 3그릇 소바를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삼겹살, 갈비?(소키), 다시마. 보기에는 소키소바가 먹음직스러우나 소바의 국물은 한 가지로 모두 시원한 쪽이라 그 깔끔함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다시마 고명이다. 시원한 국물을 한 모금 머금고 툭툭 끊어지는 면발을 씹으며 오드득 다시마를 곁들이는 맛이 참 재미있다.

그 와중에 발효초와 초생강은 뭐에 쓰는 물건인고? 하며 이리저리 굴려보고 맛보는 사이 식당은 어느새 허기진 위장들이 몰려와 속속 자리를 채웠고 어느새 빈 자리가 사라졌다. 그때까지 우리는 술에 가까운 신묘한 맛의 발효초가 무엇인지 옥신각신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동물적인 더듬이가 바짝 올라섰다. 등 뒤가 뜨겁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식권 자판기에서부터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왔다. 식권을 쥔 자들이 젓가락을 쥔 자들을 부러운 눈으로 째려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발견했다. 따가웠지만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즐겼다. 여행자의 여유를 만끽하고 앉은 자의 권리를 최대한 누리다 일어섰다. 그래서인지 굵은 소바 면발과 국물은 유난히 감칠맛이 돌고 여운을 남겨 기분이 썩 흐뭇했다. 이게 꽉 막힌 반대편 차선을 바라보며 전력 질주할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 있다. 널찍한 주차장에서 차를 빼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도넛집이다. 밥을 먹었으니 후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 시마도넛
여행지에서 식당은 반드시 챙겨야 한다. 싸고 맛 좋거나 혹은 비싸도 맛 좋거나. 무조건 맛 좋은 데를 혼신의 힘을 다해 발굴해 내야 한다. 맛있게 먹어야 힘내서 돌아다닌다. 그렇게 열심히 식당을 추리다 보면 간혹 간식은 빼 먹게 되는데 이거 위험하다. 여행의 재미를 꿀맛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여행의 설렘과 달달한 씹을 거리가 만나서 터지는 꿀재미가 얼마나 진한지 정녕 모르는 이는 없을 터. 영주 '정도너츠'를 안 먹고서 부석사 '꿀잼'이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늘빛 물결을 보니 뛰어들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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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도넛 작고 아담한 주차공간 1의 도넛 가게 ⓒ 강현호


시마도넛은 가게가 작다. 그리고 좁다. 안에 의자테이블이 있긴 하지만 한 사람만 앉아도 꽉 찬 느낌이 들어 빨리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작은 가게에서 정성껏 만든 도넛은 얼마나 대단할까? 한 입 베어 물면 놀라 자빠질까?

아니다. 안전을 위해 우리는 차 안에서 주로 먹었는데 먹은 사람 중 한 명도 뒤로 넘어져서 머리를 찧지는 않았다. 그저 "참 맛있다"라는 감탄사가 터진 게 전부였다. 이미 배부르게 소바를 먹은 직후였음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그 덕분에 한입에 다 털어 넣지 않고 아껴 두었다가 먹을 기회도 있었다. 한 참 뒤에 먹었을 때도 "참 맛있다"라고 했다.

분식의 텁텁함이 남지 않고 씹으면 기분 좋은 단맛이 감도는 도넛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투명한 블루의 바다를 배경으로 두고 차창을 열고 달리면서 먹기에 좋았다. 오키나와 산 커피가 유명한 게 있으면 잘 어울렸겠지만 그런 커피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시마도넛에서 2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는데 첫째는 한국 사람은 우리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앞뒤로도 손님은 있었는데 일본인 아니면 중국인이었다. '그게 뭐?'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해외에 나갔으니 한국인의 발길과 말소리가 없는 곳에 가보는 것도 색다름을 더 색다르게 해 주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둘째는 직원들이 친절하지 않다는 거다. '그건 또 돼?'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전날 슈리성에서 어르신의 넘치는 친절을 경험했던 터라 일본인의 친절하지 않음이 어색했다. 이건 지극히 협소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 편견이겠으나 오키나와에서 나이와 친절함은 비례한다. 젊을수록 딱딱하고 나이 들수록 부드럽다. 뭐 그렇다는 거다.

*코우리대교와 에메랄드빛 물결
차를 곧바로 바다로 몰았다. 코우리 대교다. 코우리 대교로 가는 중간중간 차를 세우고 멈추고 싶은 장소가 몇 군데 있다. 그중에 갯벌 위에서 무릎까지 바지를 걷고 허리를 숙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나쳤지만 꼭 내려서 동참해보시기 바란다. 뭔가 잡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뭔지 궁금하다. 머물 시간이 안 돼 놓쳤지만 다음에는 꼭 내려서 동참해보고 싶다.


코우리 대고 이쪽저쪽 모두에서 차를 세우고 경치 구경을 했는데 아무래도 절경은 저쪽 코우리 섬 쪽이다. 오랜만에 말문이 막히는 풍경이다. 태평양 한두 번 보나 싶지만 그렇게 맑은 파란 바닷물빛은 처음이다. 이런 색을 에메랄드빛이라고 하던가. 아니 에메랄드의 빛을 오키나와 코우리 바닷빛이라고 이름을 바꿔야 할 지경이다.

'불멍'(캠핑에서 모닥불 보며 멍하게 생각을 비우는 행위)이 아닌 '물멍'을 하고 있자니 바람이 분다. 연하디연한 하늘빛 물결을 밀어 올리는 바닷바람이다. 짠 내 없이 말랑말랑함 가득인 그 바람에 나는 절로 바지를 걷고 바다 쪽으로 걸어가 발을 담근다. 자잘한 산호석이 고르게 깔려 있는 바닥을 보자니 더운 여름이 아닌 게 못내 아쉽다.

풍덩. 뛰어들고 싶지만 발이 차다. 고민 없이 뛰어드는 꼬마들을 따라 할 용기는 내지 못했다. 아마도 혼내고 챙겨 줄 엄마가 따라오지 않아서일 거다. 엄마가 감기 걸리니 들어가면 안 된다고 미리 엄포를 놨다면 당장 바다로 뛰어들었지 모른다. 그렇게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뛰어들고픈 바다와 바람이었다.

잠시라도 물놀이는 물놀이. 물놀이의 마무리는 배 채우기. 그게 정석이다. 물놀이하면 먹는다. 마침 근처에 꽤 유명한 밥차가 있어 들렀다. '쉬림프 웨건'이라는 데였는데 접시에 밥과 새우 기본의 반찬을 내 주는 푸드트럭이다. 오리지널 갈릭 쉬림프를 시켜서 먹었다. 아무리 먹성 좋은 사람이라도 소바에 도넛까지 먹고 이것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면 창피하니까 도도하게 먹어주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고 비판하면서. 그 결과 내 맛평가점수는 소소. 물놀이 두어 시간 하고 몹시 허기진 상태로 먹으면 꿀맛이었겠다 하는 평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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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림프 웨건 덮밥 물놀이를 열심히 하면 밥은 더 맛있어진다 ⓒ 강현호


음식 대신 여기서 유심히 본 건 화장실이다. 오키나와 화장실 특히 야외나 식당 화장실은 우리나라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 이때까지 가본 화장실은 죄다 우리나라 80년대 수준에 멈춰 있다. 문도 세게 한 번 돌리면 열릴 것처럼 부실하게 잠기고 내부는 좁고 아무리 지워도 없어지지 않을 때가 껴 있다. 전체적으로 세련되지 못하고 어정쩡한 현대식이다. 밝고 화려하며 날렵하기까지 한 우리나라 화장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적어도 화장실만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다. 뭐 이런 거라도 있어야지 '자부심 채굴'이 되지 않겠나.

다시 코우리 대교를 되돌아 나오는 내내 바다의 물빛은 나를 사로잡았다. 이걸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그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가야 했다. 츄라우미 수족관 오키짱 공연이 임박했다.
덧붙이는 글 아날로그캠핑 블러그에도 게재했습니다.
#오키나와 #미야자토소바 #시마도넛 #쉬림프웨건 #코우리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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