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며 위로 받을 시, 한 구절 읊어봅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파주에게> <반지하 앨리스>

등록 2017.09.14 16:47수정 2017.09.1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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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면 가을을 노래한 자끄 프레베르의 시 '고엽'이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낙엽이 쌓이는 날이면 찻집이나 벤치에 앉아 시심에 젖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가을 달빛과 함께 시의 바다에 풍덩 빠질 수 있는 세 권의 시집을 소개한다.

달시인으로 알려진 권대웅 시인은 출판사 <마음의 숲> 대표이며 달 그림과 달 시(詩)를 엮어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그의 시적 뿌리는 넓고 깊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시에 등장하는 달, 어머니, 매미 등은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 삶의 순환을 보여주는 기제다.


그는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가난의 기억도 한가위 보름달의 풍요로움처럼 따뜻하게 감싸안는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의 시간이자 자연의 시간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지구에서 호흡하며 머물다 간 어느 생명의 시간이다.

14년 만에 낸 그의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문학동네)는 시인이 왜 살아있는 모든 것을 껴안고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7년을 땅 속에서 살다 짧은 여름을 살고 짝짓기 후 사라지는 매미를 보며, 이제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니가 바르던 립스틱 색을 닮은 철쭉꽃을 보며, 머리 위에서 빛나는 달을 보며 그는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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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가 살다 간 여름일까 권대웅 시집 ⓒ 문학동네


낭창낭창하던 것들,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칠 년만에 땅 속에서 나와 7일만 살면서 오직 사랑을 찾기 위해 울던 매미. 당신은 그토록 간절하던 당신을 만났는가.
등줄기에 후줄근하게 땀이 흘렀다. 나도 녹아가고 있었다. 여름의 눈사람처럼 있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 백일홍을 심었는데 백일홍도 그만 져버리고 말았다.
출근하는데 죽은 매미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화무십일홍 중.

아득하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것, 시인이 눈에 비친 모든 것은 물결처럼 흘러 지나가는 중이다. 시인이 과거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집착하지 않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의 바라보는 삶은 과거이자 현재이며 '문득'이라고 이름 붙일 선물 같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꽃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든 꿈
꽃잎 겹겹이 담긴 과거 현재 미래
그 길고 긴 영원마저도
이생은 찰나라고 부르는가
먼 구름 아래 서성이는 빗방울처럼
지금 나는 어느 과거의 길거리를 떠돌며
또다시 바뀐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중.


과거의 삶의 그늘이 깊어 현재의 삶의 무게가 더 무거운 이들이라면 권대웅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위로를 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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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게 공광규 시집 ⓒ 실천문학사


<놀란 강>으로 윤동주 문학대상을 받은 공광규 시인이 <파주에게>(실천문학사>라는 시집을 선보였다.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공광규 시인은  인간 존재에 대한 궁극적 긍정을 통해 평정의 미학과 현실 탐색의 긴장을 결합하여 노래해 온 시인"이라고 평하고 있다. 공광규 시인의 시적 토대는 고향, 자연, 어머니, 유년의 기억과 생존의 일터다. 그의 시가 쉽고 따뜻하면서 공감의 폭이 큰 이유다. 고향과 어머니로 대표되는 그의 시에는 늘 삶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강화 오일장 속옷 매장에서
빨간 내복 팔고 있소
빨간 내복 사고 싶어도
엄마가 없어 못 산다오
엄마를 닮은
늙어가는 누나도 없다오
나는 혼자라
혼자 풀빵을 먹고 있다오
빨간 내복 입던
엄마 생각하다 목이 멘다오
- 빨간 내복 전문.

공광규 시인은 현학적인 언어나 시적 난해함, 이데올로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현실 인식은 비판적이며 성찰적이다. 시인의 눈에 비친 남과 북을 가로지른 철책선은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그의 시 '파주에게'로 알 수 있다.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일본과 지나 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철책을 두르고 있는 바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철새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알겠군
자유를 보여주려는 단군할아버지의 기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
- 피주에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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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앨리스 시현림 시집 ⓒ 민음사


신현림 시인은 솔직하다. 나는 시인의 솔직함이 좋다, 시인의 삶은 치열하다. 삶이 치열한 만큼 그가 넘나드는 작품의 세계도 다양하다. 사진, 시, 동시, 에세이 등 전천후 작가로 달리는 그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삶의 파도를 헤쳐 나가고 있다. <반지하 앨리스>(민음사)는 반지하 방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에 주저앉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는 시다.

반지하 앨리스

토끼 굴에 빠져든 백 년 전의 앨리스와
돈에 쫓겨 반지하로 꺼져 든 앨리스들과 만났다

생의 반이 다 묻힌 반지하 인생의 나는
생의 반을 꽃피우는 이들을 만나 목련차를 마셨다

서로 마음에 등불을 켜 갔다

시가 밥이 되지 않는 세상에서 시를 가슴에 품고 노래하는 시인이 있다. 현실의 벽에 깨지고 부딪쳐 구르지 않으려고 존재의 몸부림을 치는 이가 있다.

어쩜 이리도 희고 따스할가
과고에서 흘러나온 꿈인지
커다랗게 부풀었구나
고구려나 신라 시대가 아니라서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지 않지만
알은 매끈매끈한 사람의 피부야

이 무서운 세상에 그 얇은 껍질은 위험해
모피 알 정도는 돼야 안 다치지
알 속의 시간들이 흩어지지 않게
- 알을 굴리며 간다 중.

따뜻한 시인의 가슴과 감성을 잃지 않고 아름다운 달이 뜬 시의 숲을 이뤄온 권대웅 시인, 현실에 대한 인식과 성찰을 놓지 않으면서 고향과 자연, 유년의 기억을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로 감동을 주는 공광규 시인, 시인으로 사진작가로 치열하게 현실의 마주하며 삶과 꿈과 희망의 알을 굴리며 사는 반지하 앨리스 신현림 시인의 시집으로 이 가을 시의 바다에 풍덩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권대웅 시/ 문학동네/ 8,000
파주에게/ 공광규 시집/ 실천문학사/ 10,000
반지하 앨리스/ 신현림 시집/ 민음사/ 9,000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권대웅 지음,
문학동네, 2017


#반지하 앨리스 #파주에게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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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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