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코입' 지워진 박준 산문집, 표지 사용료가 0원?

[책표지의 속사정] 기드온 루빈 작품 사용한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등록 2017.11.30 18:43수정 2017.11.3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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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과 제목을 곱씹어야 하는 책."

시인 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과 관련한 북스타그램에서 발견한 문구다. 깊이 공감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우선 이 책의 표지부터 곱씹어보자. 노를 젓고 있는 여자와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남자가 눈에 띈다. 그 뒤로 다른 커플이 노를 젓고 있는 모습도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 특별한 것 없는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등장 인물의 얼굴이 지워져 있어서다.

무슨 사연일까. 뭘 말하려고 하는 걸까. 눈길이 한 번 더 간다. 손길이 한 번 더 간다. 제목도 여러 번 읽게 된다. 읽을수록 느낌표보다 물음표가 더 많아진다. 힌트가 있을까 싶어 뒷표지도 살펴 본다. 그러다 만난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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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난다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떠오르는 두 글자는 '동행'. 같은 배를 타고, 길을 떠나는 얼굴이 지워진 두 남녀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 걸까. 이 그림을 두고 이 책의 편집자 김민정씨는 '눈물로 뒤범벅 된 얼굴'이라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운다'는 말이 감춰진 듯한 제목이지만, 그림에선 그다지 슬픈 느낌이 들지 않으니 말이다. 오히려 즐거운 흥이 읽히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제목과 이미지의 묘한 불일치. 결국 책장을 넘기고 만다. 전략이 좋다. 박준 시인의 전작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만큼이나(9만 부가 팔려나갔단다). 이 책의 전략가(?) 출판사 난다 김민정 편집자에게 궁금한 몇 가지를 물었다.

- 표지에 사용한 그림은 어떤 작품인가요.
"이스라엘 출신 영국 화가 기드온 루빈은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화가였어요. 그래서 그의 작품을 계속 지켜봐왔지요. 그림 속에 문학이, 특히나 시가 베이스로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인연이 되면 그의 그림과 문인의 글을 한번 엮어봐야지 했는데 박준 시인이 산문 초고를 보내와 읽었을 때 제목이 바로 나왔고, 이 그림이 바로 떠올랐어요."

- 당연히 한국 작품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춘천 어느 강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이 화가와는 어떻게 접촉했나요.
"영국에 있는 화가에게 메일을 띄워 허락을 받았지요. 예상대로 그는 문학, 특히 시가 그림의 근간이라 하더라고요. 특히나 베이다오와의 인연을 얘기하는데 저도 작년 중국에서 시 행사 때 베이다오와 함께 한 적이 있어 (기드온 루빈과) 이해의 울림이 맞는 자장 안에 있구나 확신할 수 있었어요.

그림은 중국인 커플을 배경으로 한 거예요. 2018년 9월에 한국에서 첫 개인전 전시를 앞두고 있다고 해서 역시 인연이다 싶었어요. 그림 사용료를 받지 않는 대신 박준 시인의 시집과 제 시집을 세 권 보내달라고 해서, 보답의 마음으로 그의 그림을 구입해 소장하고 있어요."

- 보도자료에서 책 표지 속 지워진 얼굴을 두고 해석한 문장이 눈에 띄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쓴 것은 눈코입이 지워진 그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설명할 길 없는 슬픔의 비애 같은 거, 그걸 짐작해보셔도 좋겠다 하는 의도에서 쓴 거였습니다. 눈코입이 없는 게 아니라 눈물로 지워져 가려졌을 만큼 삶이란 건 설명할 수 없는 슬픔으로 우리를 주춤하게 하니까요. 그런데 비유적으로 여자는 노를 젓고 있지요. 그럼에도 나아가야 한다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으로 볼 수도 있지요. 그들이 어떤 사이이든 그 관계는 별 중요한 것은 아니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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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에세이 <밤이 선생이다> ⓒ 난다


- 표지 속 그림을 잘 봐달라고 쓰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평소 책 표지에 그림을 많이 쓰는 편인데요. 단지 책을 팔려는 상업적 친절함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에요. 그 둘이 한데 만나 더한 상생으로 읽는 맛과 보는 맛 그리하여 지치지 않는 맛을 독자들에게 주고 싶은 이유가 컸습니다.

신형철 에세이 <느낌의 공동체>와 황현산 에세이 <밤이 선생이다>에서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팀 아이텔의 작품을 표지로 썼고, 제 산문집 <각설하고,>에서는 빌헬름 사스날의 작품을 표지로 썼지요. 박상미 에세이 <나의 사적인 도시>에서는 솔 스타인버그를 썼고요. 그 밖에도 한국의 많은 화가들과도 작업을 함께했습니다.

무조건 좋은 그림이어서가 아니라 책의 내용을 담보하는 그림만을 썼습니다. 그건 물론 아주 기본적인 얘기지요. 한번 보고 버려지는 책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읽히려면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표지여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지치지 않는 울림은 그 자체가 확고한 예술이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지요. '우리가 왜 고전을 고전이라 하는가'라는 답을 생각해보자면요."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다시 여름, 한정판 리커버)

박준 지음,
난다, 2017


#박준 #산문집 #난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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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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