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페이지나, 아무 생각 없이 펼쳐도 좋은 책

줄리언 반스, 커트 보니것, 스티븐 킹 외 지음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등록 2017.12.27 08:53수정 2017.12.2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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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에 관련한 언급이 종종 눈에 띈다. 사람들은 왜 이 책을 찾을까. 분명한 건 이 책은 작가 지망생만을 위한 책은 아니라는 거다.

"<작가> 같은 신문들에는 문예학교 광고들이 넘쳐나는데, 하나 같이 한 번에 몇 실링만 내면 이미 짜놓은 플롯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플롯과 더불어 각 장의 첫 문장과 끝 문장도 제공한다고 한다. … 전체주의 사회에서 문학은 아마도 이런 식으로 생산될 것이다. 문학이란 게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말이다.


글쓰기 과정에서 상상력은(어쩌면 의식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책은 관료들에 의해 다종다양하게 계획될 것이며, 워낙 많은 손을 거침에 따라 완성될 때면 조립라인 끝에 나오는 포드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개인의 작품이랄 수 없는 것이다." - 조지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조지 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237쪽)   

글은 공장에서 출품 된다. 사람의 가치보다는 기법의 가치로 성적이 매겨진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기를 꺼린다. 표지 디자인은 세련되었지만 그 안에 내용은 텅 비었다. 기획 출판된 책 들이 서점 진열장에 여기 저기 꽂혀 있다. 작가는 몇 번 방송에도 소개 된다. 그의 현란한 입담은 글 쓰는 실력보다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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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 커트 보니것, 스티븐 킹 외 지음, 존 워너커 엮음, 한유주 옮김,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 다른

이런 경우, 어떤 비판의식을 가지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소설처럼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고 독자의 집중을 유도할 수도 있고, 작가가 텔레비전에 나와 했던 말들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들을 내어 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글 쓰는 것에 훈련 되지 않았을 때 느끼는 것이 바로 '작가의 벽'이다.

'어떻게 첫 문장을 쓰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뭐지?' 글을 쓸 때 조마조마 하여 키보드에 손이 가지 않았다.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기도 하고, 애꿎은 책만 몇 번이고 넘겨 봤다. 그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찾기 위해서다. 
  
"내가 뭐길래?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말을 누가 들을까? 라면서." - 리처드로즈, 58쪽

글을 쓰는 것만 그럴까? 직장을 구하는 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매운 연기를 들이 킨 것마냥 마른기침을 하게 했다. '익숙하지 않아서'라는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 세 끼 똑같이 밥 먹고 사는 삶이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분명 같지 않았다. 그들과의 거리에서 너무 떨어져도, 또는, 너무 가까워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불과 같았다. 가까우면 대일 것 같고, 멀면 추울 것 같고, 그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아직은 어렵다. 

"비결은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 '사는'데 있다." - 할란 엘리슨, 168쪽


책은 포스트잇을 붙인 것처럼 작가, 편집자, 서적 판매인, 출판계 종사자들의 조언을 수록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괴테, 체호프, 톨스토이, 조지 오웰부터 시작하여 도리 허드스퍼스라는 낯선 서적 판매인까지, 책과 관련된 사람들의 말이었다.

그런데 책 제목은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이란다. '그럼'이라는 말의 용례는 '그러면'을 줄인 것이고,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의 조건이 될 때 쓰는 접속 부사이다. 가치 판단은 독자인 '당신'에게 맡기겠다는 것인가. 당찬 도발이었다.

이 책은, 글쓰기 방법론을 알려주는 작법서가 아니다. 창작 활동하며 고민했던 일군의 작가들이 크리스마스 구세군 자선냄비에 넣는 약소한 성금처럼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우리도 그랬어' 하고, '우리는 그럴 때 이런 생각을 했다'며 마음이 성급한 지망생들의 등을 쓸어 주는 것도 같다. 그래서 첫 장부터 읽을 필요도 없다. 독자는, 아무렇게나, 아무 페이지나, 아무 생각 없이 펼쳐 읽으면 그만이다.       

"작가라면 어머니의 지갑을 털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주저하지 않고 실행에 옮길 것이다." - 윌리엄 포크너, 66쪽

미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중에 한 명인 동시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의 난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순수하게 글만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려운 일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바로 쓰기 시작하라. 씻는 건 그다음이다." - W.H 오든, 207쪽
"숙모나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라." - 조지 플림턴, 216쪽

아마도 작가들의 이 대답은, 뻔한 질문인,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어요?"의 답변인 듯하다. 글을 쓰다보면 그 결과가 비록 허섭스레기라고 할지라도 일단 시작하라는 말에 솔깃해진다.

행동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으로만 만리장성을 쌓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됐다. 또 그렇게 나온 글은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숙모나 여자 친구 같은 대상을 정해두고 쓰면 조금은 쉽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말을 엮은 존 위너커는 논픽션 작가이자 편집자이다.

"저자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작가는 희소한 존재다."(6쪽)

저자와 작가를 구별한 기준점을 '가치'로 판단했다. 누구나 책만 낸다면 저자는 될 수 있지만 작가라고 불릴 수는 없단다. 존 위너커에 따르면, 작가는 예술가다, 자기 자신을 쥐어짜 글을 쓰는 사람이다. 저자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뜻하지만 작가는 그 사람 자신을 나타낸다고 정의했다.

남의 글을 얼기설기 짜깁기 해놓은 책들이 시중에 나오고 보통 그들을 '작가'라 통칭한다. 글을 쓰는 행위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지칭어를 존 위너커는 왜 구별해 정의했을까. 여기에 핵심은 '살겠다면'의 의미다. 글을 쓰지 않는다면, 살지 않겠다면, 이 책은 무의미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신이 어디에 두었는지 곧잘 잊어버린 텔레비전 리모컨이 아니다. 필요할 때만 찾는 자동차 열쇠가 아니다. 늘 곁에 두고 세세하게 관심을 쏟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 '글 쓰는 행위'이다. 끊임없이 관찰할 대상을 찾고, 익숙한 것은 낯설게, 낯선 것은 익숙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유가 있어야 한다.

때문에 책은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글을 읽는 것까지 '독서'라는 챕터로 묶어서 작가들의 말을 빌려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이, 국내에서 <작가 수업>으로 번역 출간된 도로테아 브랜드(도러시아 브랜디)의 말이었다.

"원고 쓰기를 오랫동안 질질 끌면서 다 끝내기 전까지는 책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하겠다는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쓰고 있는 책과 분야가 다른 책을 골라보면 어떨까. 기술 관련 서적이나 역사서를 읽는 게 좋겠다. 외국어로 된 책을 읽으면 더 좋다." - 156쪽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도 도로테아 브랜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브랜드는 1920년대 글쓰기 강의를 기초로 <작가 수업>을 집필했는데, 그 이유가 작가의 근본 문제가 심리적 문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기교'에 관한 책보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궁핍의 문제, 방황의 문제를 꿰뚫어 본 것이다.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의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는 더 풍성해졌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안방에서 몇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다국적 사람들의 삶을 유튜브로 생생하게 볼 수 있게 됐다. 정보 전달의 글쓰기가 여전히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삶의 가치를 부여해주는 글쓰기가 더해져야한다. 정보전달만으로는 더이상 독자들이 흥미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글의 가치를 얹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작가가 챙겨야 할 정직한 고민의 문제였다. 굳이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소설가가 되려면 사람들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세세히 알 필요가 있다." - 모리스 L. 웨스트, 144쪽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살아온 것과 살아갈 것은 다르지 않다. 한편으로 완전히 똑같지도 않다. 차츰차츰 변해가는 것이다. 2017년과 2018년은 다르고 싶은가. 그렇다면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이 꿈꾸는 것을 빗대어 읽기를 권한다. 예를 들어, "한 줄도 없다면 하루도 없다. ·B.F.스키너"(207쪽)의 말을 빌리는 것도 좋다.

하지만 어느 분야든지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 있다. 그 문구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책의 순수한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이는 글이었다. 살아온 것을 회고하는 것이 아닌 살아갈 날들을 위한 책이라는 것을 상기 할 수 있는 구절이었다.

"당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을 늘 친절하게 대하라. 그들이 당신에 관한 글을 쓸 사람들이 될 테니까." - 시릴 코널리, 223쪽
덧붙이는 글 줄리언 반스, 커트 보니것, 스티븐 킹 외 지음, 존 워너커 엮음, 한유주 옮김,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다른/2017).전체 240쪽. 값 15,000원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 작가들의 작가에게 듣는 글쓰기 아포리즘

줄리언 반스 외 지음, 존 위너커 엮음, 한유주 옮김,
다른, 2017


#존 워너커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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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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