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리도강리도 한중일
김선흥
사실 냉철히 강리도를 살펴보면 일본만 특별히 작게 그린 것이 아닙니다. 한반도를 엄청 크게 그렸을 뿐이지요. 뒤집어 말하자면, 지도 전체에서 한반도와 비교해서 작게 그려지지 않은 곳은 한 곳도 없는 셈입니다.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도 상대적 비례로 따지면 우리나라 보다 훨씬 작습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이걸 보지 못하면 이 지도에서 중국만 압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지도 하단에 쓰인 글을 보면 우리나라를 일부러 크게 그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큰 붓과 넓은 종이가 있다고 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겠지요. 초강대국에 주눅 들지 않는 기개와 자긍심, 무엇보다도 자주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국을 가운데에 두기는 했지만(당시엔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의식적으로 한반도를 크게 그린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지도는 외세에 종속된 사대주의적 세계관을 탈출했다는 점에서 도발적입니다.
그런 기개와 시야가 우리에게서 사라지면서 나라가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전성기를 빛냈던 강리도는 같은 시대에 창제된 한글과 더불어 한국인의 자주성과 자긍심, 그리고 진취성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강리도를 되살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강리도 미션을 수행하면서 두 가지가 늘 마음에 걸려 있었습니다. 첫째는 실물을 볼 수 없다는 한계였습니다. 일본 교토의 어느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보존되어 있다는 강리도. 그 실물을 볼 수는 없을까?
가끔 몽상을 했습니다. 결국 찾아갔습니다. 일본의 지인들께 부탁하여 사전에 연락을 한 후 학교 도서관 관계자를 만났습니다. 교토의 이우경 선생, 송기태 선생, 오사카의 박양기 선생, 이마가와 선생, 아오키 선생이 동행해 주었습니다.
"중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왔습니다. 강리도 실물을 보여주면 고맙겠소." 학교 측 대답은 간단하고 쉬웠습니다.
"안 됩니다." "꼭 보고 싶습니다." "안 됩니다." 공수(攻守)를 여러 차례 교환 끝에 사서가 큰 선심이나 쓰듯이 따라 오라 하더군요. 우리는 별실로 안내 되었습니다. 실물 크기 그대로의 강리도 모사본이 마룻바닥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연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았습니다. 조상님께 마음으로 큰절을 올리면서….
또 하나의 궁금증. 도대체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떤 기록이 담겨 있을까? 임금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죄다 기록해 놓았다는 실록에 필시 강리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들어 있을 텐데….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떤 대화들이 오갔을까? 그걸 보면 제작 동기와 배경이며, 지리 정보를 입수한 경위며 내용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래, 실록 전집을 구해 보자. 중국에 온 김에 북한본을 구해 보자(당시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음).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허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