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품 배신했다? 번역자가 직접 밝힌 '오역 논란'

[세계작가대회] 데보라 스미스, 우리가 번역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말하는 것들

등록 2018.01.22 21:09수정 2018.01.22 21:09
3
원고료주기
19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세계의 젊은 작가들, 평창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다> 국제인문포럼에서는 세계 문학의 미래를 맡게 될 젊은 유망 작가들을 초청하여 우정과 연대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국내외 참여 작가들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포함한 우리 삶의 전 방면에 걸친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분쟁, 그로 인한 고통을 문학을 매개로 조망한 후 이러한 시대에서 ‘평화’의 가치를 논합니다. '언어와 문화다양성'에 대한 데보라 스미스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말]
a

한강, 맨부커 상 수상지난해 5월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 연합뉴스


지난 몇 년간 영국과 미국에서 문학 번역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맨부커 국제상이 작가와 번역가의 공로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방식으로 개편된 것은 그러한 새로운 풍토를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그 해에는 한국에서도 번역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거기엔 다른 목소리들도 있었습니다. 가령 어떤 비평가들은 외국의 문학상을 수상하는 일이 한국문학 전체의 가치를 결정하는 총투표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을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채식주의자>의 수상을 둘러싸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불안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문학상 수여의 문화정치학에 연관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의 본질과 위상에 관한 것입니다. 번역과 번역가를 향한 증대된 관심과 평가는 어떤 것을 매개하지 않고 원전에 접근할 수 있다는 신화, 즉 번역본 독자와 원전 독자 둘 모두의 이해관계가 얽힌 판타지를 훼손합니다.

사람들은 영역본 <전쟁과 평화>가 아닌,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각각의 책이든 혹은 그들이 동일시하는 문화이든 간에,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대상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번역이 이상하고 종종 직관에 반하는 예술이라는 사실에 의해 더 심화됩니다. 또한 아마도 번역은 단순히 나쁜 예술이 아니라 틀린 예술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일 것이며, 항상 어딘가 결함을 내재한 예술인 것처럼 취급될 것입니다.

'창조적'이지 않은 번역은 있을 수 없습니다

a

지난해 6월 한강 '채식주의자'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 국제관에서 열린 2016 한국문학 세계화 포럼 초청 기자회견에 참석해 질문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제가 번역한 영역본 <채식주의자>가 물론 한국어 원작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전적으로 옳습니다. 간단하게는 문자 그대로 옮긴 번역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그 어떤 두 언어에서도 문법이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없으며, 단어 역시 각기 다르고, 심지어 구두점조차도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창조적'이지 않은 번역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번역가들이 그들 자신을 충실한 번역가로 여기지만, 충실함의 정의는 분명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서로 다르게 기능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번역은 서로 다른 수단에 의해 유사한 효과를 거두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한 차이, 변화, 해석은 비단 완벽하게 정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충실함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들이자 충실한 번역의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원작이 번역본과 같은 수준의 성공을 그 어디에서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채식주의자>의 수준이 번역되면서 훨씬 더 향상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별적인 사고의 결과입니다. 어쨌든 <채식주의자>의 중간에 실린 작품(번역자 주: <몽고반점>)은 한국의 문학상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물론 맨부커라는 브랜드가 부여한 성공에 비견할 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기실 한국 문단은 국내 문학상보다는 국제 수준의 문학상을 훨씬 더 신뢰합니다. 그러나 다른 기준들에 비추어 볼 때도 <채식주의자>는 분명 '이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 영역본이 출간되었을 무렵, 원작은 출간된 지 만 7년 만에 14쇄를 찍었고 2만 부가 판매되었습니다.

그때 중국과 아르헨티나, 폴란드, 그리고 베트남에서도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한국어로 된 작품으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다시 문화 제국주의 하에서는 이런 비영어권의 번역이, 설사 그것이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을 국제적인 성공 궤도에 올리지 못합니다.

제게 보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지점은 각각의 번역본이, 제 영역본과 마찬가지로, 번역가가 그 작품에 그들의 시간을 할애하길 원하게 될 만큼 깊이 사랑에 빠진 결과 탄생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7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부 사이의 강간이 범죄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그러한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는 이 작품이 어째서 (대체로 나이 든 남성들로 이루어진) 기성 문단과, 그것을 전혀 "극단적이고 기괴하게" 여기지 않는 많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다르게 받아들여졌던 것인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채식주의자>의 미학적인 측면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러한 정치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니었을까요?

한강은 <채식주의자>의 "강력한 이미지"(더가디언),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빼어난 구조"와 "압도적인 클라이막스, 변화무쌍하지만 진실한 감정"(퍼블리셔스 위클리)과 같은, 번역가와는 무관한 것들과 관련해 대단한 찬사를 받았습니다. 구조, 플롯, 주제, 캐릭터, 기타 등등은 모두 작가의 것입니다. 번역가는 문장과 관련된 것들, 즉 문체, 언어, 어조, 리듬을 다룹니다. 그리고 한강의 한국 독자들은 언제나 그녀의 '시적인' 문체를 강조합니다.

2011년에 나온 한 기사에서는 그녀를 "서정시 같은 문체와 디테일한 구조로 주목 받는" 작가로 소개했습니다. <경향신문>의 2017년도 기사에서는 한강의 소설에 대해 "시와 닮았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시집을 출간한 바 있는 한강에게는 실로 정확히 들어맞는 표현이었으며, 아울러 그 기사는 섬세하고 관능적인 문체가 한강의 특징임을 거론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채식주의자>에서는 그러한 서정성이 <소년이 온다>나 특별히 그녀의 가장 최근 작품인 <흰>에서 보여주고 있는 산문시 연작에서만큼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절제된 형태의 미묘하게 시적인 문체가 그 근저에 흐르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과도하게 수사적인 영어 문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으며(비록 일반적으로 소설은 단조롭지 않으나 훨씬 더 강렬하고 압도적인 순간들을 포착하는 경향이 있지만), 무의식적으로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번역본의 문체가 '미묘하고(인디펜던트)', '정확한 동시에 군더더기 없으며(아이리쉬 타임즈)', '뼈대만 남긴(뉴 스테이츠먼)' 문체라고 묘사했습니다. 동시에 그 시적인 특성도 언급되었는데, 이는 그것이 앞선 평가와 상호 배타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가령 작가 데보라 레비(Deborah Levy)는 "시적이지만 사실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제 번역이 시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문체의 원작을 지나치게 시적으로 변형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견해,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고자 하는 욕망은 한강의 글쓰기에서 저와 다른 많은 이들이 발견한 시적인 것을 간과하도록 만듭니다. 물론 '지나치다'는 것은 견해 차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문학적 스타일은 단순히, 혹은 온전히 지문(指紋)과 같이 정체성의 표지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기능과 의미를 지닙니다. 기능적인 측면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채식주의자>의 차갑고 절제된 산문체는 작품 속에 나타나는 과열된 폭력을 상쇄시키고, 그것이 선정적으로 비치지 않도록 하며,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어두운 공포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의미는 '이 작가의 동시대인들은 어떤 스타일을 사용하는가?'와 같은 질문의 맥락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까다로운 지점입니다. 무엇이 주류이며, 무엇이 찬사를 받고, 무엇에 '현대적', '창조적', '실험적' 또는 '문학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가와 같은 질문들 말이죠.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모호함과 반복성, 평범한 산문체로 이루어진 언어에서 정확성, 간결성, 서정성이 선호되는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포함합니다. 이는 거친 일반화이자 포착 가능한 현상으로서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각 작가 개인의 스타일은 중간값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와 같은 점들로 구분되며, 따라서 스타일이 갖는 의미는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번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가령 반복 혹은 시적인 산문체의 표현으로 나타낸 '막대'가 기준 언어와 대상 언어에서 서로 다른 높이로 꽂혀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만일 기준 언어의 관습들이 그대로 대상 언어에 옮겨진다면, 그것은 작가의 독특한 표현이나, 훨씬 더 나쁜 경우, 나쁜 글쓰기 방식으로 오인되기 십상입니다.

번역의 질은 번역가가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많은 이들은 가능한 경우 현지화하는 방식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만두 카자(Mandhu Kaza)와 같은 이들은 반항적이고 잘못된 번역이 이민자들, 이민자자들의 자녀들, 그리고 스스로 디아스포라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네이티브 스피커들의 인종적 특권에 도전할 수 있게 하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제는 각 번역가들이 번역에 대해 특정한 접근 방식이나 신념을 일관되게 고수한다고 상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번역가들 역시 작가들이 그러하듯 수시로 마음이 바뀌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기도 합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번역하는 텍스트들로부터 실마리를 얻는 한편으로, 우리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접근법들을 허용하는 텍스트들에 이끌립니다.

그래서 제가 배수아의 글쓰기에서 느끼는 매혹은 부분적으로 배수아가 한국어를 통해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제가 영어의 경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반면에, <채식주의자>의 경우 저는 영문학적 언어 관습에서 너무 벗어날 때 그 글쓰기가 갖는 전복적인 힘 자체를 축소시키거나 분산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우리가 계속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길 바랍니다 

a

데보라 스미스가 번역한 한강 <채식주의자> 영문판 표지 ⓒ Granta Books


모든 번역가들의 존재 이유는 번역이 아니고서는 원작에 접근할 수 없는 독자들에 의해 부여됩니다. 그래서 2016년 맨부커국제상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고 2017년에는 심사위원을 역임했던 다니엘 한(Daniel Hahn)은 심사위원들이 "원작과 번역을 비교하며 원작에서 번역으로 옮기는 그 과정(결정, 독창적인 부분들, 실수들 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번역되어 완성된 작품 그 자체를 평가"하기 위해 애쓴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번역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문학 작품 번역은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영속화, 이 두 가지 모두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번역가로서 우리 자신이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과 우리와 다른 편향된 견해와 목적을 가진 이들이 옹호하는 복수(複數)의 접근 방식들이 있음을 끊임없이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수상 사실이 번역에 대한 저의 접근법을 최선의 혹은 유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 접근법이 영국에 거주하고 영국에서 작업한다는 점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에는 역시 어떤 종류의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들이 선망하는 형태의 성공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죠.

부분적으로 한국에서의 문학 작품 번역에 대한 평가에는 비교 과정이 포함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제 번역에 나타난 '실수들'이 수상 자격을 박탈당하는 요인이 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번역가들은 정확성에 깊은 주의를 기울입니다. 동시에 모든 번역가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하기도 합니다.

첫 번역 당시 저는 온갖 실수들이 적힌 목록과 이메일의 폭격으로 매우 떨었습니다. 제가 부주의와 오만함으로 한강의 작품을 배신했다는 게 사실일까요? 물론 제가 한강을 숭배할 정도로 사랑하고 그녀의 작품을 아주 천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제가 아직 마스터하지 못한 언어를 겁 없이 번역하겠다고 나서면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이제 제가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지 4년이 되었고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는 7년 정도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니며, 그 어떤 것도 실제로 번역하는 법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자부심에 대해서는 여전히 갈등을 겪고 있지만, 적어도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뛰어난 작가의 작품을, 양적으로 비슷한 수준이 아니더라도 질적으로는 충분히 충실한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만약 제가 그 불가능한 완전무결함에 더 근접했다고 하더라도, 비평가들은 그 원작 자체에 좀 더 천착하라고 주문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한강과 제가 마침내 장래에 출판될 개정판을 위해 실수들을 고칠 시간을 갖게 되었으므로 그러는 것일까요? '실수'라고 지적된 것들 중 몇몇은 실제로 단순히 차이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쩌면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강은 번역가들이 편집자와 작가 둘 모두와 계속 상의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녀가 제 번역을 읽었고 제 번역이 그녀의 글쓰기가 가진 고유의 톤을 포착하고 있음을 가장 좋아한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지속적으로 할애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떤 사람들이 그녀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일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번역은 분명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역동적으로,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비평적 참여는 번역 문화를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일환입니다. 그러나 번역 규범이 나라마다, 맥락에 따라 얼마나 많이 다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개개인의 접근법을 어떻게 다르게 형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는, 그저 단순히 지적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차이점을 향해 가는 일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비평가가 인정하는 것은 개인적인 선호 이상의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또한 원작의 언어로 재번역하거나 문자 그대로의 번역으로 상정된 어떤 것과 비교함으로써 그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어렵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방식에도, 번역이 자유롭거나 창조적이라고 여겨지는 만큼의 주관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계속해서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번역에 관해 이야기할 것들은 늘 넘쳐나고, 특별히 번역이 그 자체로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고 새로운 독자들이 번역이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목소리와 관점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확장시킬 수 있는 작품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번역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번역이 지닌 잠재력-즉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고 차이를 지우지 않으면서 그 차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작업하고, 고독한 천재의 신화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 번역가들 스스로 소외되었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최근에 획득한 성취, 곧 최저임금을 받을 수 있는 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기반 위에 서길 원한다면 말입니다. 번역의 창조성을 부정함으로써 정당화되었던 저임금과 번역에 줄기차게 요구되었던 '겸손'이라는 이 두 요소가 결합되면서 번역은 종종 여성화된 직업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겸손은 분명 자기 자신을 삼가는 태도와는 다릅니다. 자신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결코 오만한 태도가 아닙니다.

번역에는 왕도가 없지만 만일 번역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명제들이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훨씬 더 건설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변화는 배반이 아닙니다. 편집자들은 일반적으로 꽤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원작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누가 번역을 x 또는 y로 옹호하는지, 그들이 처한 위치가 어떻게 그러한 선호 경향을 형성시키는지, 그리고 그러한 경향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이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모든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번역은 특정한 시간, 장소, 그리고 사람에 의해 발생·형성되며, 그러한 조건에 종속되고, 특징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번역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작가 줄리안 반스(Julian Barnes)는 고전 텍스트의 새로운 번역 각각은 "다시 실패하고, 더 나은 방식으로 실패하기"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한 달 전만해도 저는 <채식주의자>를 다시 번역한다면 훨씬 더 많은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가 한강 또는 배수아의 또 다른 작품을 번역할 때마다 그들의 정신, 세계, 언어와 맺는 관계가 점점 더 깊어진다는 점에서, 훨씬 더 나은 방식으로 실패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나은 방식'이라는 그 표현이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 표현을 다르게 실패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해 아눅 아루드프라가삼(Anuk Arudpragasam)이 남아시아문학에 수여되는 DSC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문학에 대한 유사한 종류의 불편함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작가들은 카레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와 소통할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침묵 속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입니다."

번역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번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잘, 그리고 얼마나 다르게, 이 소통의 작업 가운데 실패와 성공을 동시에 겪고 있는지에 대해 측정하는 법을 배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소통에 실패하는 동시에 성공하는 일이란 실로 매우 중요하고, 즐겁고, 그리고 진실된 것입니다.

배하은 옮김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AD

AD

인기기사

  1. 1 윤석열 총장님, 이건 해명이 필요한데요?
  2. 2 걱정스러운 황교안 호감도...1위 이낙연·2위 심상정
  3. 3 무릎 꿇린 전두환 동상, 손으로 맞고 발길에 차이고
  4. 4 "전 역대 어느 대통령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5. 5 [단독] 허위 학력 최성해 '총장자격' 박탈? 교육부 결정 임박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