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샘 공방전까지... 민청련이 마주한 치열한 논쟁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28] 전면적 탄압, 그리고 AB논쟁

등록 2018.01.29 14:42수정 2018.01.2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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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최고 의결기구는 규약에 따라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였다. 이 규정은 충실히 지켜졌다. 독재정권의 탄압에 쫒기면서도, 어김없이 총회를 열었다. 제6차 총회는 1986년 3월 1일에 열었다.

제6차 총회를 앞둔 민청련에게는 중요한 현안 문제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조직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당면 투쟁의 전술 문제였다. 둘 다 논쟁적인 성격을 띠었다. 조직 문제는 제6차 총회의 가장 큰 이슈였다. 탄압으로 야기된 조직의 위축 양상을 떨쳐버리고 조성된 정세에 맞게 조직 체계를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회원들 사이에 널리 공유됐다.

그러나 대응책은 각양각색이었다. 네 가지 주장이 제기됐고, 각 주장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됐다. 각 입장은 익명으로 불렸다. 크게는 A와 B로, 다시 세분되어 A1, A2, B1, B2로 나뉘었다. 내부에서는 이를 'AB논쟁'이라고 불렀다.

AB 논쟁

A안은 창립 이래의 조직 위상을 그대로 발전시키려는 입장이었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기반으로 하여 반외세 반독재 정치투쟁을 선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는다는 관점이었다. 그에 반해 B안은 민청련의 조직적 혁신을 주장했다. 조직 기반을 노동자와 농민 대중 속으로 옮기자는 주장이었다. 학생운동 출신자를 규합하는 데에 머물지 말고, 독자적으로 기층 민중을 조직한다는 관점이었다. A2와 B2는 각각 A안과 B안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도출된 수정안이었다. 

이 논쟁은 총회준비위원회(총준)에서 시작됐다. 총준위원은 각급 부서와 기구에서 선출된 10명 이내의 열성 회원들로 구성됐다. 총준위원 최성웅의 회고에 따르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총준위원 진재학이 그 동안 진행된 논쟁에 대해 브리핑을 했는데, 민청련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줄줄 꿰더란다. 그 얘기를 듣고 자기가 네 개의 초안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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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총회 총준위원과 이후 11인체제 상임집행위원이었던 진재학(왼쪽)과 총준위원으로 활동한 최성웅(오른쪽) ⓒ 민청련동지회


이 논쟁은 쉽사리 종결되지 않았다. 각 주장이 팽팽하게 평행선을 그었다. 부득이 대의원총회의 힘을 빌어야만 했다. 대의원총회란 정기총회에 앞서서 비공개적으로 열리는 실질적인 최고 의사결정 기구였다.


각급 기구와 계반에서 선출된 대의원 수십 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조직 문제 이견을 해소하기 위한 최고 심급의 최종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회원들의 이목을 끌었던 네 가지 제안이 발표됐고 그를 둘러싼 찬반 논의가 시작됐다. 논쟁은 뜨거웠다. 논리적 공방전이 밤새워 계속됐다.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긴 논란을 종결지을 필요가 있다는 데에 참석자들의 의견이 모였다. 대의원들은 네 개의 제안 가운데 A안과 B안 두 가지만을 표결에 부치기로 합의했다. 긴장 속에서 표결이 이뤄졌다. 그 결과 A안이 근소한 차이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음이 판명됐다.

조직 논쟁은 다수결로 종결됐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양측 지지자들의 숫자 차이는 아주 작았다. 그래서일까. B안을 지지했던 간부와 회원들 사이에 실망감과 함께 불복종의 기운이 돌았다. 자칫하면 결별마저 불사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따라서 새 집행부 구성이 지혜롭게 이뤄질 필요가 있었다. A안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B안 지지자들의 심리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절충이 이뤄졌다. 새 집행부의 면면은 주로 A안 지지자들로 구성하되, B안 지지자들에게도 일정한 몫을 할애했다.

총회 결정에 따르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집행부 안배만으로는 내부 이견을 봉합할 수 없었다. B안을 지지했던 회원들 가운데 많은 수가 대의원총회 결정에 불복했다. 그들은 민청련 탈퇴를 선택했다. 탈퇴한 사람들 중에는 임원들도 있었다. 한경남 의장, 천영초 상임위원회 위원장 등이 그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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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논쟁 이후 민청련을 탈퇴한 한경남 의장(왼쪽)과 천영초 상임위원회 위원장(오른쪽) ⓒ 민청련동지회


탈퇴하는 회원이 많았던 데에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던 마음 속 규범이 영향을 미쳤다. 그 시기에는 학생운동을 마친 사람은 마땅히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기층 민중운동을 강화하는 데에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당시 정세도 영향을 끼쳤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이후에 노동운동 내에서 정치투쟁 그룹이 활성화하던 시기였다. 그 결실로서 출현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은 전체 민중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거대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민청련 회원들은 서둘러 노동 현장으로 이전하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민청련의 조직 기반은 큰 타격을 받았다. 6차 총회 이전에는 계반과 각급 기구에 망라된 민청련 회원 숫자가 400∼500명 정도였다. AB논쟁은 회원 숫자를 감소시켰다. 논쟁이 끝난 이후에 그 숫자는 50%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평가된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해서 탈퇴를 결행하는 것은 공동체의 논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행위였다. 조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논쟁이 왜 이처럼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는가? AB 논쟁이 조직의 분열과 약화로 귀결된 원인에 대해서 민청련은 뒷날 자체 분석의 결과를 내놓았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민청련의 조직 기반을 학생운동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비판 의식과 동지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운동 출신자의 규합에만 힘썼을 뿐, 독자적인 회원 재생산을 꾀하지 않았다.

둘째, 학생운동 출신자였기에 학연에 민감했다. 출신 학교와 써클 등의 차이가 구성원들 내부에 균열을 가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학생 출신이기에 이론적 승부욕을 갖기 쉬웠다. 내부 토론과정에서 상대방에게 밀리거나 지기 싫어했다. 따라서 다수결에 승복하지 않고 분파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회원 감소와 함께 민청련의 위상과 영향력도 축소됐다. 민청련은 출범 초기부터 민주화운동 단체들 간의 연대에 힘을 기울였고, 또 노동운동 세력과의 연대 활동에도 관여해 왔다. 이 두 갈래 연대 활동은 총체적인 조망과 방향 설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민청련의 위상이 위축됨에 따라 상황이 일변했다. 민청련을 향한 구심력보다도 외부 운동을 향한 원심력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어느 쪽과의 연대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됐다. 그 틈은 어느새 넘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벌어져 갔다.

김희택 집행부의 출범

새 집행부가 출범했다. 6인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선출됐다. 김희택 의장을 비롯하여 최민화, 김병곤, 박우섭, 이범영, 윤여연 등이 중앙위원이 됐다. 이미 구속됐거나 수배중인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최민화, 김병곤은 구속중이었고, 박우섭은 6차총회가 끝난 이튿날 체포됐다. 다른 3인은 지명 수배중이었다. 도망자의 처지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들은 지도력을 발휘했다.  윤여연이 운영위원장을 겸했다. 김근태 초대 의장에 뒤이어, 짧았던 한경남 의장 체제를 이어받아 세 번째 의장 리더십이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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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총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 1.김희택 의장 2.박우섭(수배 후 구속) 3.최민화(구속 중) 4.김병곤(구속 중) 5.이범영(수배) 6.윤여연 운영위원장 ⓒ 민청련동지회


탄압 국면이었으므로 실질적인 집행부는 비공개 상태로 두어야 했다. 그래서 종전의 비공개 상임위원회 체제를 확대 개편하여 상임집행위원회를 설치했다. 상임집행위원으로는 장준영, 이병호, 이승환, 유기홍, 오세중, 임태숙, 최경환, 진재학, 이난현, 박선숙, 진영효 등 11인이 선임됐다. 대학교 입학년도를 기준으로 볼 때 73학번에서 79학번에 이르는 세대였다. 이들은 상임위 내부 부서를 하나씩 책임지고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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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총회에서 선출된 11인의 비공개 상임집행위원회 1.장준영 2.이병호 3.이승환 4.오세중 5.유기홍 6.임태숙 7.진재학 8.이난현 9.진영효 10.최경환 11.박선숙 ⓒ 민청련동지회


타오르는 개헌 요구 투쟁

AB논쟁 못지않은 또 하나의 논쟁이 있었다. 개헌 문제였다. 이것이 당면 전술 논쟁의 초점이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독재정권이 개헌논의 불가 방침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1986년 1월 16일, 전두환은 헌법상 대통령 임기가 보장된 1988년까지 개헌 논의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헌법논의를 빙자한 범법행위를 처벌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처사였고, 따라서 이제 개헌 요구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최대 현안이 됐다.

끓는 물에 기름을 부은 듯 개헌 요구 투쟁이 불타올랐다. 대학생들이 가장 먼저 항의 행동에 나섰다. 학생운동 세력은 개량주의적인 노선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혁을 수행할 수 있는 혁명적인 노선에 입각해서 개헌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전학련은 2월 4일, 헌법제정국민의회 구성을 요구하는 범국민서명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군사독재와의 타협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던 야당 정치세력도 개헌 요구를 촉구하고 나섰다. 신민당은 2.12총선 1주년 기념식에서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그에 뒤이어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개헌촉진 1천만인 서명운동' 명단을 3월 6일자로 공개했다.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연합기구인 민통련과 기독교계 민주인사들은 민주제 개헌을 요구하고 나섰다. 박형규 목사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 지지 교역자들은 2월 17일 '기독교 민주헌법개정 서명추진본부' 결성 준비회의를 열었다. 민통련은 3월 5일, '군사독재 퇴진 촉구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 선언'을 발표하고, 서명자 303인의 명단을 공개했다.

구로동맹파업 이후 강력한 정치투쟁 드라이브를 걸고 있던 노동운동 세력도 개헌 요구투쟁에 나섰다. 서노련은 "우리가 진정 획득해야 할 헌법은 오직 삼민통일헌법 뿐"이라고 주장하고, "일천만 노동자가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 개헌투쟁을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이와 같이 개헌 문제를 둘러싸고 전체 민주화운동 진영 내에서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제기됐다. 직선제 개헌, 민주헌법 쟁취, 헌법제정회의 구성, 삼민통일헌법 제정, 개헌투쟁 무용론 등이 어지럽게 교차됐다. 민청련 회원들 내부에는 이 모든 입장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영향이 큰 것은 민주헌법 쟁취론과 헌법제정회의 소집론이었다. 이 두 가지 견해를 지지하는 회원들이 민청련 내에서 다수를 점했다.

이처럼 내부의 이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6차 총회는 개헌투쟁의 전술에 관한 민청련의 통일된 견해를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두 개의 골자로 이뤄져 있었다. 하나는 직선제 슬로건을 폐기한 점이다. 종전에는 직선제 개헌 슬로건을 다른 주요한 슬로건들과 함께 병용해 왔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다른 슬로건들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의도와는 달리 개량주의적 색채를 전면에 내세우는 착오를 범하게 됐다고 인식했다. 그 결과 6차 총회 논의 과정에서 직선제 슬로건은 개량주의적 성격을 갖는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다른 하나는 헌법제정회의 소집론이 승인된 점이다. 「군사독재헌법 철폐하고 헌법제정회의 소집하자」는 슬로건이 기본 슬로건으로 채택됐다. "군사독재의 즉각적인 종식 → 군사독재의 잔재를 일체 배제하고 민중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헌법제정회의의 소집 → 민주헌법의 제정" 이라는 정치 일정을 실현해야만 반독재투쟁의 근본적 승리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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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제정회의 소집론’을 슬로건으로 채택하여 배포한 민청련 전단지 ⓒ 민청련동지회


#민청련 #6차총회 #김희택 #AB논쟁 #개헌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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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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