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두번째 수도로 웅진을 택한 까닭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백제역사문화 편] 공산성

등록 2018.03.26 13:48수정 2018.03.2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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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은 새로운 도읍으로 웅진을 선택하게 되는데,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백제의 왕실과 사직의 보존을 위해 최대한 안전한 도시를 찾아야 했는데, 웅진은 이런 면에서는 최적의 장소였다. 우선 북쪽으로 차령산맥이 막아서고 있고, 도읍으로 삼은 웅진성(공산성)은 금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자연 요새였다. 따라서 웅진의 선택 중 가장 큰 목적은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효용성이라는 점에서 웅진의 지리적인 위치는 중요한 결정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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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촌리 고분군 수촌리 고분군의 전경,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배경을 수촌리 고분군을 통해확인할 수 있다. ⓒ 김희태


이어 두 번째로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하남 위례성의 파괴로 인해 문주왕의 행렬은 쫓기듯이 내려오던 상황이라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 명의 병사와 한 톨의 쌀조차 아쉬웠던 상황이었기에 당시 지방 세력 중 어느 정도 힘을 갖춘 세력과 결합하는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웅진에는 수촌리 고분군으로 상징되는 지방 세력이 존재했는데, 발굴 조사를 통해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제 도자기 등의 위세품이 출토된 바 있다.


웅진백제의 시작, 그 중심에 있던 공산성

남하하던 문주왕 일행이 웅진을 도읍으로 삼았던 것은 문주왕 즉위 해인 475년 10월이다. 이때부터 백제는 새로운 도읍인 웅진의 이름을 따서 웅진백제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때 새로운 도읍으로 낙점된 웅진성은 지금의 공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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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웅진시대의 중심에 있던 공산성 ⓒ 김희태


대부분 공산성을 처음 찾게 되면 금서루를 입장해 금강을 끼고 있는 공산성의 성벽을 따라 걸어보게 되는데, 의외로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조선시대에 수축이 된 것이다. 따라서 백제 때는 공산성은 부여의 부소산성처럼 토성으로 축성이 되었으며, 백제시기의 특징인 판축 기법이 잘 드러난다. 지금도 공산성의 일부 구간은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공산성을 찾을 때는 이 부분도 함께 관찰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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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의 토성 흔적 공산성에 남아있는 토성의 흔적, 백제 때의 성은 판축기법으로 축성된 토성의 형태였다. ⓒ 김희태


63년간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이 되었던 공산성은 성왕 때 사비로 도읍을 천도하게 되면서, 도읍으로서의 기능은 잃게 되지만, 여전히 방어에 중요한 요충지로 인식이 되었다. 중국 측 사료인 <북사>는 백제에 5방이 있다고 했는데, 중방인 고사성, 동방인 득안성, 남방인 구지하성, 서방인 도선성, 북방인 웅진성이 있다고 했다. 이중 북방에 해당했던 공산성은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 위기에 빠지자, 의자왕이 웅진으로 피신을 했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방어의 요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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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명 기와 웅천명 기와, 웅천주는 신라 신문왕 때 웅진을 부르던 명칭으로, 821년 웅천주도독으로 부임한 김헌창이 웅천주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사진 : 국립공주박물관 직접 촬영 ⓒ 김희태


이후 백제가 멸망된 이후에도 공산성은 꾸준하게 사용이 되는데, 통일 신라 때는 웅천주'(熊川州)'로 불렸으며, 신라 헌덕왕 때 일어난 '김헌창의 난(822년)'을 최종적으로 진압했던 곳 역시 공산성이다. 이 같은 사실은 공산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웅천주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면서 확인이 되었다. 아울러 조선시대에 이르면 '이괄의 난(1624년)'이 발생하며, 인조가 공산성으로 몽진을 하게 된다. 이 같은 이야기는 공산성 내 쌍수정 사적비와 인절미의 유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백제 멸망 때도 등장한 공산성, 지정학적 요충지

현재 공산성에서 확인되는 백제 관련 유적은 쌍수정 아래 위치로 추정되는 추정 왕궁지와 현재 복원된 임류각 아래로 백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임류각지가 남아있다. 임류각은 동성왕 시기에 지어진 건물로 <삼국사기>에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현재 발굴 중인 옛 성안마을에서 출토된 유물이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貞觀十九年四月卄一日(정관 19년 4월 21일)' 명문이 새겨진 칠갑옷이 확인되었다. 연대를 보면 백제 의자왕 시기로 백제의 멸망과 관련해 또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유물이다. 당시 칠갑옷에 칠했을 재료로 여겨지는 황칠나무에 대한 기록이 <통전> 백제전에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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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십구년명 칠갑옷 성안마을에서 출토된 칠갑옷, 붉은 색 글씨로 ‘貞觀十九年四月卄一日’가 새겨져 있다. 사진 : 세계유산 백제전 직접 촬영 ⓒ 김희태


아울러 <삼국사기> 보장왕 조의 기록을 통해 645년 5월 의자왕이 당나라에 칠갑옷을 바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계룡산 자락에 있는 '고왕암'은 백제 멸망 당시 부여융이 숨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성안마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화살촉과 전쟁 무기류 등과 불에 탄 흔적 등이 확인이 되면서, 백제 멸망 당시 치열한 항쟁이 벌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공산성은 백제의 멸망이라는 혼돈 속에 그 흔적을 남겼으며, 지금은 말없이 흐르는 금강이 그 치열했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 포스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백제역사문화 #공산성 #웅진백제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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