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독한 사랑... 남편의 얼굴을 이마에 새기다

[그림의 말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본다, 나도 비로소 가면을 벗는다

등록 2018.04.01 12:12수정 2019.05.2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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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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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기둥. 1944. 돌레로스 올매도 박물관 소장 ⓒ 돌로레스 올매도 박물관 소장

 
삭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온 몸에 못이 박힌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어느 신전의 기둥이 그녀의 척추를 대신하고 있지만 그 마저도 산산이 부서져 있다. 사막은 쩍쩍 갈라져있고 그녀는 의료용 코르셋에 의지해 몸을 간신히 세우고 있다. 잔혹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표정은 외려 담담하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치열한 자기응시의 힘. 그녀의 자화상이 특별한 이유이다.

6살에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 장애를 갖게 된 소녀는 자라서 멕시코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려운 명문 국립 예비학교에서 공부한다. 기쁨도 잠시, 하교 중 그녀가 탄 버스와 전철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 버스 손잡이 역할을 하던 쇠기둥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쇄골, 척추, 갈비뼈, 골반이 골절되었고 왼쪽 어깨 탈골, 오른쪽 다리 탈골, 왼쪽 다리는 11조각이 났다. 사고 당시 18세였던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칼로'(1907-1954). 평화를 뜻하는 '프리다'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평화'롭지 못했다.

퍼즐조각처럼 부서진 뼈를 맞추는 수술만 32번. 온 몸을 깁스한 채 9달을 견뎌야 했던 그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끔찍한 고통을 잊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팔을 제외하고는 꼼짝할 수 없었던 그녀는 침대 위에 이젤을 놓고 천장에 거울을 달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전문적인 미술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다.

바람핀 남편, 산산조각난 몸... 그녀는 그렸다

기적처럼 걸을 수 있게 된 21세의 프리다는 멕시코 벽화미술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를 찾아가 자신이 화가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자신의 그림 평가해 달라고 한다. 멕시코에서 이미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였지만 운명이었는지, 거절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승낙한다.

그녀의 자화상을 본 디에고는 미술에 대한 기본기는 없지만 묘한 에너지가 뿜어 나오는 그녀의 그림에 경도된다. 21살의 나이 차이, 두 번의 이혼과 바람기로 잠잠할 틈 없는 그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결혼 초기의 프리다는 화가의 아내로 살았다. 하지만 금세 다시 시작된 디에고의 여성편력은 지칠 줄 몰랐고 프리다는 상처받고 외로워진다. 그가 그럴수록 그에 대한 집착은 강해지고 그 집착은 그의 아이를 갖는 걸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3번의 유산 끝에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고 철제 코르셋 없이는 몸을 세울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결정적으로 디에고는 프리다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워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교통사고는 그녀의 몸을 짓이겼고 디에고는 그녀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그리고 운명은 그녀 앞에 캔버스를 가져다 놓았다. 더 힘들게, 더 아프게 자신을 사지로 몰아가며 그녀의 몸속에 남은 한 방울의 피라도 더 짜내서 캔버스에 옮기라 한다. 그런 고통 속에서 태어난 작품이 '부서진 기둥'이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혼자일 때가 많았고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였기 때문에 나를 그린다."-그녀의 일기 

그녀의 자화상을 마주하고 있자면 마치 깜깜한 무대 위에 그녀와 내가 단둘이 서있고 핀 조명이 우리 둘만 비추고 있는 것 같다.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에게 동정심은 값이 싸고 위로는 어설프다.

그녀가 나를 응시한다. 눈물을 흘리는 채로 마음을 숨기지도, 포장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다. 겹겹이 찐득하게 내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가면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도 비로소 가면을 벗는다.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면서 깨닫게 되는 게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자체가 예술이고 감동이고 그 누군가에는 강력한 힘이 되는 것임을.

"내 그림들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적어도 몇 사람은 이 부분에 관심을 가져 주리라 생각한다. 혁명적인 것은 아니다. 왜 내 그림이 호전적이기를 기대하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림이 내 삶을 완성했다. 나는 세 명의 아이를 잃었고 내 끔찍한 삶을 채워줄 다른 것들도 많이 잃었다. 내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일기를 읽다가 뜬금없이 "나는 그럴 수 없다"에서 눈물을 쏟았다. 나도 그럴 수 없었던, 그래서 부대꼈던 내 시간들을 껴안아 주는 말.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그림도, 글도 보는 사람의 서사에 따라 읽히기 마련이니까.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 디에고를 향한 마음을 접을 길 없는 프리다는 수많은 염문을 뿌리지만 그녀의 일기장 속에는 디에고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다. 허기진 아이가 엄마 젖을 찾듯 그녀는 외로움의 허기를 달래줄 누군가를 찾고 또 찾았다.

인생이여 만세 

1939년 피에르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피카소, 칸딘스키, 뒤샹의 찬사를 받으면서 그녀는 유명해진다. 특히 칸딘스키는 그녀의 자화상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루브르에서 그녀의 자화상을 구입했고 루브르에 진출한 중남미 출신의 첫 여성작가가 된다.

같은 해 디에고와 프리다는 이혼한다. 하지만 1년 만에 둘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과 '경제적인 독립'을 조건으로 재혼한다. 그녀의 그림 속 해와 달처럼 만날 수 없지만 서로를 계속 끌어당기고 있어 영영 헤어질 수도 없는 관계. 만류인력의 법칙이 여기에도 있다.

재혼 후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인생이 그럴 리가. 다시 디에고는 그녀의 친구였던 배우 '마리아 펠릭스'와 염문을 뿌린다. 그를 놓아버릴 수 없었던 프리다는 그녀의 이마 한가운데 그를 그려 넣는 자화상을 그린다.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그를 그대로 인정하고야 마는 그녀다운 그림이란 생각이 든다.(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혹은 내 마음 속의 디에고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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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혹은 내 마음 속의 디에고. 1943. 멕시코시티, 하케스&나타샤 첼만 소장 ⓒ 하케스&나타샤 첼만 소장


46세에 그녀는 첫 개인전이자 마지막 개인전인 '칼로 회고전'을 연다. 진통제 없인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구급차에 실려 자신의 개인전에 참석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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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여 만세. 1954. 프리다 칼로 박물관 소장 ⓒ 프리다 칼로 박물관 소장

 
몇 달 후 그녀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 눈물겹다.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 그녀의 작품은 이후에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콜드 플레이의 'viva la vida'도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다.

수박을 그린 정물화를 통해 그녀는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한없이 부드럽고 쉽게 으스러지는 그녀 자신을, 스치는 바람에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마음을. 그리고 죽기 전 그녀의 마지막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었습니다.
#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인생이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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