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라디오가 있다" 유대인들을 살린 그의 거짓말

[미련 없이, 그곳! 산티아고 순례길 14] 프로미스타~칼사디야 데 라 케샤

등록 2018.04.17 13:51수정 2018.04.1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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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형상 조형물 ⓒ 차노휘


야콥의 거짓말

폴란드 출신 작가 유레크 베커(Jurek Becker, 1937~1997)의 소설 <거짓말쟁이 야콥>이 있다. 이 작품은 1940년대 유대인 거주지역(Ghetto)인 로츠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은 로츠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4㎢ 넓이의 거주지역에 몰아넣고,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시킨다. 신문, 책, 라디오, 심지어는 시계마저도 압수하고 재산권 행사도 금지한다. 아무런 희망도 보람도 없이 아우슈비츠나 헤우무노 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까지 단지 독일이 꿈꾸는 제3제국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로 봉사해야 했다.

그들 중 야콥 하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령부 주위에서 우연히 러시아 군대가 400km 밖 인근까지 진격해왔다는 뉴스를 듣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기대를 걸 만하다.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희망을 버린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내게 라디오가 한 대 있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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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미스타를 떠나며 ⓒ 차노휘


이 말이 퍼지면서 동료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고, 그는 매일매일 거짓 뉴스를 만들어낸다. 그러다 스스로 불안해진 야콥이 한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나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사람들이 내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라고.


다음날 그 친구가 자살한다. 그러자 야콥은 자신이 하는 1그램의 거짓말이 1톤의 희망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래서 수많은 동료들이 사막에서 자살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건너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만난 데이비드

길이 징그럽게 여겨지는 것은 오늘 말고 또 있을까. 봐도봐도 비슷한 도로와 자갈길. 양옆으로 밀밭이거나 잡풀. 가끔 키 큰 미루나무. 또 가끔 달리는 차. 차바퀴에 회오리바람처럼 이는 먼지. 풍경을 바꿔주는 스크린을 보고 트레드밀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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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km를 걷기 전, 마지막 마을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 ⓒ 차노휘


결정을 해야 했다. 프로미스타에서 19.7km 지점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에서 멈추느냐, 그곳에서 다시 17.5km를 더 가느냐.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멈추지 않고 더 갈 경우 17.5km는 기본적으로 걸어야했다. 그 거리에는 어떤 식당도 숙소도 없다. 숙식을 위해서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다음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까지 가는 것 외에는.

데이비드, 성주 그리고 나는 그 길을 들어서기 전의 마지막 마을인 카리온 데 로스 사거리에 있는 바에 앉았다. 사거리 바에는 순례자들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이 땀을 식히면서 쉬고 있어 북적거렸다. 바와는 달리 도로는 한적했고 가끔 자동차가 지나갔다.

"데이비드, 부르고스에서 생일 맥주는 마셨니?" 나는 맞은편에 앉은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성주는 데이비드를 오늘 처음 만났기 때문에 그 말뜻을 알고 싶어했다. 나는 성주에게 샤워실 문이 닫히지 않은, 창고를 개조해서 만들었을 알베르게에 묵었던 날을 이야기했다. 아타푸에르카. 데이비드가 프란체스코를 두고 이탈리아 마피아 같다고 말했던 곳. 데이비드는 내 질문에 고개를 흔들었다.

데이비드는 프로미스타에서 약 15km 지점인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Villalcazar de Sirga)에서 우연히 만났다. 13세기 템플 기사단이 지은 유명한 '순백의 성 메리(Santa Maria la Blanca) 성당'이 있는 곳이었다. 그 앞 바에서 성주와 함께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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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성 메리(Santa Maria la Blanca) 성당과 그 앞 Bar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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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성 메리 성당 맞은편 바에서 우쿠렐라를 연주하고 있는 남자 ⓒ 차노휘


그곳 사설 알베르게에서 늦게 일어나 준비하고 나온 데이비드(8시)와 이른 시간에 걸어온 우리와 시간이 딱, 맞아 떨어졌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내 발가락 안부를 물었다. 프란체스코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까미노 위에서는 비밀이 없다). 그러면서 신발은 왜 그대로냐고 했다. 프란체스코가 세세한 것까지 말한 듯했다. 나는 프란체스코가 말한 신발 상품이 없어서 살 수 없었다고 했다. 마지막 대도시인 레온에는 더 좋은 스포츠 매장이 있을 거라고 했다.

정오를 향해 가는 시간. 더위는 점점 무게를 더해갔다. 나는 시원한 생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늦었지만 데이비드의 생일도 축하해야 했다. 생일 맥주 한 잔씩 돌렸다. 데이비드를 보니 맥스 안부가 궁금했다. 데이비드는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맥스는 한참 앞서갈 것이니 그도 나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그에게 아타푸에르카에서 평화로운 풍경에 대해 말했다. 내 머릿속에는 맥스와 데이비드가 그늘진 나무 아래에 누워서 수다를 떠는 장면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내가 하루의 일을 메모하는 동안, 그 둘은 동네 한 바퀴를 돌고는 그곳에서 남자들만의 수다를 이어갔다. 슈퍼를 찾아 밖으로 나온 나는 그들과 합류했다. 각자 맥주 한 캔씩 마시면서 한가로운 시골 마을에서 한없이 늘어질 듯한 시간 앞에서 각자의 피로를 녹이며 어렸을 적 자연과 벗했던 이야기를 했다.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때의 그들 얼굴은 순수함만으로 환했다.

그 평화로움을 방해한 것은 나였다. 데이비드는 긴 속눈썹을 부르르 떨면서 걱정스럽게 내게 물었다. "아프지 않니?" 그가 발톱 빠진 내 발을 본 것이다. 냉정한 맥스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내가 표정을 꾸미자 그는 곧바로 내게 조언했다.

"노휘, 너는 병원에 꼭 가봐야 해. 내일 부르고스에 도착할 수 있으니 그곳 병원에 가는 게 낫겠어."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은 짧았지만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뻗은 길을 보며 말했다.

"일어나봐야겠지?" 
"맥주가 에너자이저군. 기운이 막 솟아!" 

데이비드가 대꾸했다. 우리는 의기투합하며 외쳤다.

"저까짓 길! 가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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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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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과 성주 ⓒ 차노휘


1800km를 걸어 온 남자

에너자이저는 얼마 가지 않아서 사라졌다. 그 변화 없는 지루한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포플러 나무 가로수와 흙먼지. 포플러 나무 입에 난 구멍을 보고 해골이라고 데이비드가 말해도 성주가 보이스카우트 흉내를 내며 원기를 북돋우어도 그때뿐이었다. 서로 힘들어서 대화도 잇기 어려웠다. 재미있는 화제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그때, 뒤따라오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작은 키에 잔뜩 어깨를 구부리고 그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빠른 속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말' 같다고 말했다. 흡사 말처럼 보이기도 했다. 배낭 무게 때문에 상체를 기울였는데도 걸음이 빨랐다. 우리는 그 남자에 대해 추측성 이야기를 하면서 지루함을 떨쳐버리려고 할 때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는 떡, 하니 우리 앞에 나타났다.

작은 키지만 다부진 몸매였다. 키만 한 배낭에 꿩 깃털 두 개와 장미 한 송이를 꽂아 장식했다. 목덜미 쪽 셔츠 안쪽으로 문신이 보였다. 그는 유쾌한 농담을 연신 우리에게 던졌다. 성주와는 구면이었다.

오늘 아침 5시에 성주가 나를 깨우러 왔다. 5시 30분에 출발하자고 했더니 그때 일어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삼십 분 일찍 온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성주는 너무 더워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낭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먼저 자리 잡고 있는 네덜란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와 밤하늘에 별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새벽 3시에 배낭을 꾸려 나갔다. 그때 성주도 그와 함께 배낭을 꾸렸다. 되레 밖에서 잤더니 잠이 잘 오더라고 그가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새벽 3시에 떠날 수 있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궁금했다. 데이비드가 말 같다는 그이가 바로 성주가 밖에서 함께 잤던 네덜란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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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km를 걷고 있는 네델란드 출신 마틴. 저녁 식사를 하고 오니 알베르게 뒤뜰 풀장 근처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 차노휘


그는 말이 많았다. 끊임없이 사람을 웃기려고 노력했다. 노래도 부르고 성주와 달리기 시합을 하기도 했다(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그중 제일 우리를 기쁘게 했던 것은 조금만 더 가면 맥줏집이 있다는 말이었다. 안내 책자에는 이 길이 끝날 때까지 없다고 나와 있다고 하니 그것은 오래전 이야기이고 몇 개월 전에 나온 안내서에는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의 말에 힘을 얻었다. 그늘에서 잠깐 쉬고 시원한 맥주를 마신다면 남은 거리는 달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맥줏집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힘을 얻었다.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이 길을 왜 걷느냐고.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이 길을 걸으면 혼자라도 즐겁단다. 겸사 아름다운 경치도 볼 수 있단다. 내 기준에서 보면 그는 야인이었다. 유쾌한 야인.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왜 밖에서 잤냐고 또 물었다. 그러자 그는 코 고는 흉내를 내며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했다.

그와 이야기하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위트 있는 말뿐만 아니라 제스처도 풍부했다. 한참을 웃다 보니 상당히 걸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우리는 길가 쉼터를 발견했다. 이미 쉬고 있는 순례자 세 명이 있었다. 하지만 쉼터에는 맥줏집 같은 것은 없었다. 우리는 그에게 동시에 물었다.

"마틴, 맥줏집은?" 

마틴은 앞서 쉬고 있는 순례자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다 마셔버렸어."

그때야 우리는 마틴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화를 내기보다는 그냥 웃었다. 마을을 2km를 남겨둔 지점이었고 조금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었다. 앞서 쉬고 있던 순례자들이 일어섰다. 마틴은 심각하게 우리를 보며 말했다. 

"저 남자야, 저 남자. 밤새 코를 골아서 나를 밖으로 내쫓은 이가." 

그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해서 나는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발설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코 고는 당사자는 잠을 푹 자서 걸음도 빠르군. 다음 알베르게에서 저 이와 같은 방을 사용한다면 나는 다음 마을까지 걸어갈 거야."

우리는 또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그가 말하는 이탈리안은 며칠 전부터 빈번하게 마주쳐서 인사하는 사이였다. 큰 키에 운동을 많이 한 듯 다부진 몸매에 늘 밝은색 옷만 입어서 긍정적으로 보였던 인물이었다. 외모와 달리 그가 코를 고는 주범이었다니. 마틴도 알고 보니 나와 같은 방을 사용했다. 나도 코 고는 소리에 설핏 눈을 떴지만 너무 피곤해서 잠들어 버렸다.

이제는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2km 거리를 걸었다. 계속 대화하다 보니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그는 4월 8일부터 네덜란드 수도에서 걷기 시작해 1800km를 걷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 1800km라니!

우리는 다 같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고작 800km 거리 완주를 위해 걷고 있는 지금, 그 앞에서 힘들다고 투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야인에 기인이자, 귀인이었다. 야콥의 거짓말까지 할 수 있는 그를 우리는 용서하기로 했다. 

2km를 걷는 동안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낮은 둔덕을 지나자 알베르게가 보였다. 나는 마틴을 위해 빌었다. 오늘 밤 저 '기인'을 밖으로 쫓아낼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말이다.

알베르게는 훌륭했다. 고작 5유로 주고 묵은 알베르게에 풀장이 있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는 프랑스인 데미안이 합류해서 유쾌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유쾌함 속에서도 고질병처럼 도사리는 걱정이 있었다. 왼쪽 발바닥에 새로 물집이 잡힌 것이다. 사람하고는 빨리 적응 하는데 내 발은 왜 자꾸 까탈을 부릴까.

자면서 물집 터뜨린 발바닥이 자꾸 신경 쓰여 일어났다. 자정 지나 화장실을 가는데 열린 창문으로 비바람이 들이쳤다. 길 떠날 때는 날씨가 얌전했으면 싶었다. 젖게 될 발이 걱정되었다. 침대에 눕자 스무 명의 순례자들이 새근거리는 소리가 공중에 떠다녔다. 무사한 하루를 보내고 달콤한 꿈속 여행을 하는 소리였다. 나 또한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나른한 졸음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헨리 밀러의 말을 중얼거렸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라도 삶에는 의미가 주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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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시간. 시계반대방향으로 성주, 노휘, 연석, 데미안, 데이비드. 우리들 때문에 데미안과 데이비드는 포도주를 많이 마셨다. ⓒ 차노휘


(* '야콥의 거짓말' 부분은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웅진 지식하우스) 208~209쪽을 참조했다.)
덧붙이는 글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까미노 #프레그리노 #거짓말쟁이 야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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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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