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수덕사로 모여드는 인연들... 왜?

[덕숭총림 수덕사에서 길을 찾다 ①] 원담선사 10주기 추모제

등록 2018.04.03 12:05수정 2018.04.0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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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선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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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선미술관에 있는 원담선사상 ⓒ 이상기


3월 27일 원담(圓潭)선사 1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선사는 2008년 3월 18일(음력 2월 11일) 수덕사 염화실에서 열반했으니 올해가 입적 10주년이 된다. 원담진성(眞性) 대종사는 경허선사로부터 만공선사로 이어지는 덕숭문중의 법맥을 잇는 큰스님이다. 혜암현문(惠庵玄門), 벽초경선(碧超鏡禪) 선사의 뒤를 이어 수덕사 제3대 방장을 역임했다. 그는 1970년 수덕사 제4대 주지가 되었고, 1983년에는 수덕사를 덕숭총림(德崇叢林)으로 만들었다. 1986년에는 덕숭총림의 방장이 되었다.


총림은 선원 강원 율원이 갖춰진 큰 절을 말하고, 총림의 큰스님을 방장이라 부른다. 원담선사는 20년 이상 수덕사에 주석하며 불법을 펴고 선풍(禪風)을 휘날렸으며, 서화(書畫)에도 일가를 이룬 선지식이었다. 후학들은 "아침마다 달마(達磨)의 소림굴(少林窟)을 드나들고 저녁마다 육조(六祖)의 조계(曹溪)에서 발을 씻었다"는 말로 원담선사의 선풍을 표현하고 있다. 1943년 사미 진성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고, 만공대선사로부터 계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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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선사가 쓴 금강경 ⓒ 이상기


한 조각 비고 밝은 것 본래 묘하고 둥글어 一片虛明本妙圓
마음의 있고 없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네. 有心無心能不知
거울 가운데 형상 없는 이 마음은 鏡中無形是心卽
확연히 허공 같아 티끌만큼도 걸림이 없네. 廓如虛空不掛毛

몽술(夢述)이란 이름으로 이 세상이 태어나 진성이란 법명을 받고 원담이란 법호를 받은 큰스님 원담진성은 2004년 대종사라는 법계를 받았다. 2007년에는 <원담대종사 선묵집>을 냈고, 2008년에는 '오고가는 일이 본래 없다(去來本無事)'는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당시 조계종 종정 법전(法田) 큰스님은 다음과 같은 법어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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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봄꽃 ⓒ 이상기


나툴 때는 우리 종문宗門의 선지식善知識이신 원담圓潭 대종사大宗師이시고
자취를 옮겨 숨을 때는 공적空寂하고 응연凝然한 일점영명一點靈明입니다.

성성惺惺하실 때는 선지禪旨가 대방무외大方無外하여 바다와 산을 눌렀고
대기대용大機大用은 드넓어 저 하늘을 치솟았습니다.

입적入寂하시고는 형상形象 없는 한 물건이 있어 허공虛空을 쪼개고
봄바람을 일으켜 온 누리에 꽃을 피게 합니다.



원담선사 10주기 추모제는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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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선사 추모제가 열린 대웅전 ⓒ 이상기


원담선사 10주기 추모제는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추모제의 정확한 명칭은 원담대종사 열반 10주기 추모 다례다. 먼저 수덕사 본·말사 스님들이 대웅전에 모여 대중삼배를 진행한다. 대중 삼배란 불단 삼배, 호법신중 삼배, 영단 삼배를 말한다. 10시 20분에는 수덕사 방장으로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된 송원설정(松原雪靖) 스님이 입정해 다례를 주재한다. 다례 전에 두 가지 행사가 이루어진다. 하나는 원담선사 육성녹음 청취다. 또 다른 하나는 종사영반(宗師靈飯)이다.

종사영반은 큰스님의 기일에 행하는 천도재 의식이다. 종사영반은 거불(擧佛) 거량(擧場) 착어(着語) 진령게(振鈴偈)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도량의 이름을 부른 다음, 진리의 말씀을 전하며 요령을 울린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의식이 헌화(獻花)와 헌다(獻茶)다. 헌다는 송원설정 스님, 원담선사 상좌스님, 주지스님의 순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에는 수덕사 신도회장 등이 헌다례를 한다. 그리고 송원설정 스님의 대표 인사말로 다례행사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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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선사 추모 헌다례 ⓒ 이상기


 
대표 인사에서 송원스님은 경허-만공-혜암-벽초-원담 큰스님으로 이어지는 덕숭산 정신을 강조한다.

"원담선사는 청강에 비친 달이요, 만상에 깃든 성품이다. '우리는 진여를 찾고 있는가?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있는가?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행사는 11시에 끝났다. 행사 후 다례상을 살펴보니 한 가운데 '선은사 비구 원담당 진성대종사 각령(先恩師比丘圓潭堂眞性大宗師覺靈)'이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 동안 이루어진 원담선사를 추모하는 행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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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선사의 서화: 小月山高靜 ⓒ 이상기


원담선사는 선뿐 아니라 서예에 일가를 이룬 큰 스님이었다. 2007년 12월에는 원담선사 83세 생신을 기념해 <원담대종사 선묵집>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80여 점의 글씨와 그림이 실렸다. 경허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석마방광(石馬放光: 돌로 만든 말이 빛을 발한다), 구모토각(龜毛兎角: 거북이털과 토끼뿔) 같은 선시(禪詩), 남이 장군의 한시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그림으로 달마도와 소월산고정(小月山高靜: 높은 산 위 고요한 작은 달)이 유명하다. 이 책을 발간한 수덕사 주지 옹산스님은 간행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느 누구에게도 사사받은 바 없고 어떤 글씨를 모방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습작을 하신 적도 없으시나 일필휘지는 법필(法筆)이요 도필(道筆)이요 선필(禪筆)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봉스님 회상에서 한철을 지내실 때 큰스님 서필(書筆)을 보고 방장스님께서 쓰셨는데 '내 글씨보다 자네 글씨가 낫네.'

(…)

언어는 글로써 기록을 남길 때 역사가 되고 책이 됩니다. 특히 서예는 한지에 쓰면 천 년 이상 보존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한편의 게송과 짧은 명구, 서예의 예술은 많은 감화와 감동을 줍니다. 미술이나 서예예술 작품은 단순히 보는 이에게 시각적 즐거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공간을 채워주는 예술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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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선사가 그린 달마도 ⓒ 이상기


2008년 4월 15일부터 5월 4일까지는 '원담대선사 선묵유작 전시회'가 절 아래 수덕여관에서 열렸다. 수덕여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과 고암 이응로 화백이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다. 1944년 고암 이응로가 구입했고, 부인 박귀희 여사가 2001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2009년 3월에는 원담선사 열반 1주기를 맞아 <원담대종사 법어집. 대관절 이것이 무슨 일이냐?>가 발간되었다. 이곳에는 2004년 이후 선사가 행한 법문과 인터뷰 기사 등이 실려 있다.

2009년 6월에는 원담 큰스님 열반 1주기 기념 선시화전(禪詩畫展)이 수덕사 선미술관에서 열렸다. 원담선사가 남긴 게송을 일연(一然)스님이 뽑았고, 김대열 교수가 그림을 그렸다. 2010년에는 원담대선사 2주기 선필 추모유작전이 열렸다. 전시회 초청 글에 보면, 원담선사의 선필은 '창공을 비상하는 새의 날갯짓처럼 자유롭고 호방하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추모제만 열릴 뿐 원담선사를 조명하는 학술발표회나 연구책자 발간 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원담선사 10주기 추모제를 찾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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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선미술관 ⓒ 이상기


2007년 10월 26일 수덕여관 옆에 수덕사 선미술관이 개관되었다. 수덕사 선미술관은 불교전문 미술관으로 16억 원이 투입돼 410㎡의 단층건물로 지어졌다. 미술관은 고암전시실, 원담전시실,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고암전시실에는 고암 이응로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었고, 원담전시실에는 원담대선사의 서예와 선화가 전시되었다. 그리고 기획전시로 이응로 화백의 제자인 금동원 화백 작품전시회가 열렸다.

금동원 화백의 전시는 2008년 10월 <무자(無字) 원두막전>으로 이어졌다. 금동원 화백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수제자다. 1948년 이응로 화백으로부터 그림을 배우면서 수덕사와 인연을 맺었으니 70년 세월이 흘렀다. 그런 인연으로 금화백은 수덕사를 자주 찾았고, 이제는 매년 3월에 열리는 원담선사 추모제에 꼭 참석한다. 이번 10주기 추모제에도 참석할 예정이니, 필자를 수덕사에서 만나면 좋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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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선사 추모제에 참석한 금동원 화백 ⓒ 이상기


그렇게 해서 필자는 추모제 전날 수덕사에 도착했고, 금동원 화백으로부터 수덕사와의 인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원로스님인 벽초선사는 선농일여의 모범을 보인 통큰 스님이었다고 한다. 밭일을 한 후 곡차를 한 잔 마시는 모습이 그렇게 호탕할 수 없었다고 한다. 40년 동안 수덕사 주지를 하면서 사판승으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벽초스님은 아버지와 함께 어릴 때 출가했으며, 만공선사의 법맥을 원담선사에게 전해 주었다.

원담선사는 1926년생으로 세속의 나이는 금동원 화백과 비슷하다. 금화백이 1927년생이기 때문이다. 금화백은 원담선사와는 대화할 기회가 많았던 것 같다. 만공선사 지도로 금선대 앞 백척간두에서 10일 동안 수도정진하면서 죽을 뻔한 얘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공선사가 원담선사를 보고 '마천루를 맨손으로 기어 올라갈 수 있는 놈'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원담선사는 또 붓글씨를 써달라는 스님들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는 정 많은 스님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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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선사가 만든 피리 ⓒ 이상기


금동원 화백은 원담선사가 만들어준 피리를 하나 가지고 있다. 금화백과 함께 수덕사 경내를 산책하던 원담선사가 오죽(烏竹)을 보고는 피리를 하나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냥 지나가는 소리거니 했는데, 다음에 수덕사를 방문하니 정말 피리를 만들어주더라는 것이다. 피리에는 원담작품(圓潭作品)이라는 친필이 쓰여 있다. 금화백은 이 피리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금화백은 이런저런 인연 때문에 수덕사를 찾게 되었으며, 원담선사 추모제에도 매년 참석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3월 26/27일 이틀간 수덕사에 머물며 금동원 화백 외에 스님들과 많은 인연을 지을 수 있었다. 원담선사의 상좌스님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옹산스님과 함께 경허선사와 만공선사의 흔적을 찾아 천장암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최인호의 구도소설『길 없는 길』을 다시 읽게 되었고, 경허에서 만공으로 이어지는 선불교의 맥을 다시 한 번 공부하게 되었다. 또 옹산스님이 쓴 책『만공』을 통해 경허에서 원담에 이르는 현대선불교의 법맥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지은 수덕사와의 인연을 4회에 걸쳐 정리하려고 한다. 제2회는 만공선사 이야기고, 제3회는 경허선사 이야기다. 그러므로 순서는 법맥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 된다. 제4회에는 수덕사 성보를 살펴보려고 한다. 대웅전과 소림초당 등 당우와 성보박물관의 문화재를 자세히 소개할 것이다. 이번 글을 쓰면서 ‘길 없는 길’이 ‘길 있는 길’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덕사 #원담선사 10주기 추모제 #만공선사 #금동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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