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낯선 다리에 가자는 아빠, 대체 왜

[아빠와 함께 쓰는 파리 여행기 ②] 미라보 다리

등록 2018.04.16 10:15수정 2018.04.1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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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이야기] 미라보 다리에 가다

파리를 관통하는 강을 '센 강'으로 표기하지만 예전엔 '세느 강'이라고 했다. 내 세대는 어느 쪽인가 하면 세느 강 쪽이다. 그편이 더 친숙하다.


그런 내게 세느 강이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다. 연상작용은 추억과 관계있는 것이므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딸에게 미라보 다리는 안 가볼 것이냐고 물어봤다.

"미라보 다리요?"

약간 쇳소리가 났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딸이 만든 일정표는 동선을 중심으로 짜여진 것이라 파리의 서쪽 끝에 있어 사람들이 찾는 관광 포인트와 동떨어진 미라보 다리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미라보 다리를 가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딸은 납득했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갈등은 때로 사소한 것에서 비롯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나는 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실제 동으로 만든 조형물이 몇 개 교각에 붙어 있긴 했지만 15구와 16구를 이어주는 아치형의 미라보 다리는 관광객들이 시간을 내서 찾아 가볼만큼 아름다운 다리는 아니다. 어찌 보면 도심을 관통하는 세느 강의 물줄기보다 훨씬 넓어진 강물 위로 덩그러니 놓인 긴 다리일 뿐이고, 동쪽으로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과 그 뒤로 보이는 에펠탑의 원경이 그런 휑한 느낌을 더해줄 뿐이었다.


파리의 낯선 다리에 가자는 아빠, 이게 뭔가 싶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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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다리에서 바라본 에펠탑 다리의 동쪽으로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과 그 뒤로 보이는 에펠탑의 원경이 그런 휑한 느낌을 더해줄 뿐이었다. ⓒ 강재인


그런데도 내가 굳이 딸을 설득해서 그곳까지 가게 된 것은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라는 시 때문이었다. 나이든 독자들 가운데는 청소년 시절에 그 시를 읽어본 이도 있을 것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Sous le pont Mirabeau
세느 강은 흐르고 Coule la Seine
우리 사랑도 흐르는데 Et nos amours
다시 되새겨야 하는가 Faut-il qu'il m'en souvienne
기쁨은 언제나 La joie venait toujours
고통 뒤에 온다는 걸 Après la peine
밤이여 오라 Vienne la nuit
시명종(時鳴鐘)아 울려라 Sonne l'heure
세월은 가도 Les jours s'en vont
나는 머무니... Je demeure...

인근 메트로역에서 RER로 갈아타고 자벨(Javel)역에서 내리니 곧바로 미라보 다리였다. 1896년에 완공된 폭 20미터, 길이 173미터의 아치형 다리다. 특별히 아름다운 것도 인기가 있는 다리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아폴리네르는 이 다리를 배경으로 위와 같은 시를 썼던 것일까?

사연이 있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의 이야기

원래 로마 출생의 아폴리네르는 19세 때 파리로 이민 와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자유로운 삶을 즐기며 화가 파블로 피카소, 화가 앙리 루소, 시인 장 콕토, 화가 마르크 샤갈, 시인 앙드레 살몽, 시인 앙드레 브레통, 시인 막스 자코브 등과 어울리면서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하다가 1907년 피카소의 소개로 세 살 밑의 화가 마리 로랑생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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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로마 출생의 아폴리네르는 19살 때 파리로 이민 와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화가 파블로 피카소 등과 어울리면서 아방가르드운동에 참여하다가 1907년 피카소의 소개로 세 살 밑의 화가 마리 로랑생을 만났다. ⓒ wiki commons


발랄하고 쾌활한 로랑생은 특유의 총명함으로 입체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던 몽마르트르의 뮤즈였다. 파리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몽마르트르 근처의 샤펠가에 살았기 때문에 데생학교에서 만난 화가 조르주 브라크의 소개로 피카소가 살던 낡은 아파트 '바토 라부아르'를 들락거리다가 아폴리네르를 만나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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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로랑생 발랄하고 쾌활한 로랑생은 특유의 총명함으로 입체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던 몽마르트르의 뮤즈였다. ⓒ wiki commons


아폴리네르는 첫눈에 반했고, 그녀도 훤칠한 용모의 아폴리네르에게 호감을 보였다. 둘은 빠르게 가까워졌고 서로의 예술에 대한 찬미자가 됐다.

얼마 후 로랑생은 세느 강의 서쪽, 불로뉴 숲 부근의 오퇴유로 이사했다. 그러자 아폴리네르도 사랑을 따라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거기서 가까운 다리 이름이 바로 미라보였다. 그러나 오퇴유로 이사한 뒤부터 두 사람은 자주 다투게 됐다. 로랑생은 빨리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아폴리네르는 결혼을 자꾸 미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로랑생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두 사람의 골은 깊어갔다.

결별 후 그녀가 오토 폰 바예첸 남작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폴리네르는 한동안 정신적 공황에 빠져 있다가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자원해서 참전했다. 그러나 부상을 입고 후송된 뒤 쇠약해진 그는 유행성 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1918년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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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입고 후송된 뒤 쇠약해진 아폴리네르는 유행성 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1918년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1916년 유산탄에 의한 부상을 입은 뒤 그의 모습. ⓒ wiki commons


한편, 바예첸 남작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던 로랑생은 결혼 7년 만에 헤어진 뒤 파리로 돌아와 삽화가와 무대미술가로 크게 성공하지만 속으로는 젊었을 때 사랑을 나눴던 아폴리네르를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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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로랑셍 기념우표 마리 로랑셍을 기념해 2016년 발매된 프랑스 우표. ⓒ 강재인


몽마르트르 뮤즈의 유언

몽마르트르의 뮤즈였던 그녀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1922년 그녀의 시를 모아 출간한 <부채>(L'Eventail)라는 시집에는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자신의 심경을 그린 <진정제>(Le Calmant)라는 시가 들어 있는데 이를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울적하다기보다 슬픈 Plus quènnuyé, triste
슬프다기보다 비참한 Plus que triste, malhereuse
비참하다기보다 괴로운 Plus que malhereuse, souffrante
괴롭다기보다 버림받은 Plus que souffrante, abandonnée
버림받았다기보다 Plus que abandonnée,
세상에 홀로 남겨진 Seule au monde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기보다 Plus que seule au monde,
추방된 Exilée
추방되었다기보다 죽어버린 Plus que exilée, morte
죽었다기보다 잊혀진. Plus que morte, oubliée.

울적함 → 슬픔 → 비참 → 괴로움 → 버려짐 → 혼자 남음 → 추방 → 죽음 → 잊힘의 점진적 감정을 열거함으로써 결국 잊히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라는 점을 지적한 시의 원문에는 '여인'이란 말이 쓰여 있지 않다. 아폴리네르를 그리워하던 마리 로랑생은 1956년 73세의 나이로 숨졌다. 죽기 전 그녀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 몸에 흰 드레스를 입히고 빨간 장미와 아폴리네르의 시집을 놓아 달라."

친지들은 그렇게 해줬다고 한다. 장미는 사랑, 시집은 아폴리네르, 흰 드레스는 결혼의 상징이다. 결국 아폴리네르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염원이 담긴 유언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시신은 아폴리네르의 시신이 안치된 파리 제20구의 페르라셰즈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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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로랑생 무덤 마리 로랑생 무덤 파리 제20구의 페르라셰즈묘지에 있는 마리 로랑생 무덤. 같은 묘지에 아폴리네르도 묻혔다. ⓒ wiki commons


나는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로랑생의 삶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화려한 것 같지만 밑바닥은 외롭고 쓸쓸한 것이 삶의 본질이다. 로랑생도 그 누구도. 미라보 다리 밑의 강물은 거대하기 때문에 흐르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삶의 시간도 그런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내일은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가실 거죠?"

사실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이 활동 무대로 삼았던 몽마르트르를 먼저 가봤어야 한다. 나는 딸의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괜찮겠니?"

딸은 1년에 한 번쯤 고국을 방문하기는 한다. 그러나 서먹서먹한 상태로 청소년기를 보낸 딸과 나 사이엔 유년기의 작은 에피소드를 빼놓고선 이렇다 할만한 공통의 추억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감 같은 것도 없다. 그래서 대화는 늘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당면 안건을 말하는 수준에서 끝나고 말았던 것이 현실이다.

"그럼요, 아빠."

딸의 대답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미소 짓고 있는 딸의 등 뒤로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강민성(필명)씨는 강재인 시민기자의 아버지로, 딸과 함께 여행기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미라보 다리 #아폴리네르 #로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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