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다가 왜... 갑자기 허전함이 몰려올까

[미련 없이, 그곳! 산티아고 순례길 28] 리곤데~멜리데

등록 2018.07.11 09:31수정 2018.07.1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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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스웨터를 걸친 할머니와 강아지들 ⓒ 차노휘



완주할 날짜가 구체적으로 잡혀서인지, 걸음걸음이는 가볍기만 했다. 언제 내가 물집과 발목 무리로 고생했나 싶었다. 나는 무사했고 무사했다.

갈리시아는 해물요리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 나는 문어 요리(Pulpu Galega)가 간절하게 먹고 싶었다. 마리아호세에게 문어 요리를 하는 곳이 있으면 꼭 알려달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녀는 내일 문어 요리로 유명한 도시를 지나간다고 했다. 나는 그곳을 체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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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상점 ⓒ 차노휘


다음날(오늘) 목적지로 정한, 멜리데(Melide)였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구시가지의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길에는 상점과 바, 식당이 즐비했다. 엑세키엘(Exepuiel)이라는 문어 요리 맛집 앞에는 긴 줄이 있었다. 우리나라 맛집처럼 이곳도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일단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서 다시 나오기로 했다.

번창하는 행정 도시 멜리데. 도시는 시골과 달리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북적거렸다. 조용한 곳을 찾아 시골 알베르게만 선택했던 내게 멜리데(Melide)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길은 남달랐다. 시장과 상가 건물을 지나가야 했다. 공원 한쪽에는 야시장이 열렸다. 우후죽순 도시가 형성된 듯 다른 도시와 달리 허름한 잿빛 분위기였다. 첫인상 때문인지 사람들 표정 또한 밝아보이지 않았다.

알베르게 직원도 퍽이나 사무적이었다. 방 안에 45개 정도 침대가 들어 차 있었다. 그 모양새가 차갑고 딱딱했다. 더군다나 이층 침대를 배정 받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맛있는 문어 요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를 해놓고 밖으로 나갔더니 이곳 씨에스타 시간과 겹쳤다. 야시장은 철수하기에 바빴다. 차분히 시장 골목을 돌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는데 차질이 생겼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식당으로 갔다. 두 곳 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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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데(Melide). 씨에스타 시간과 겹쳐 시장이 철수하고 있다. ⓒ 차노휘


아, 그래도 맛봐야하는 것이 아닌가. 줄을 섰고 마침내 내 순서가 되어 요리가 나왔다. 화이트 와인도 곁들였다. 와인은 11도였다. '뽈뽀 가예가'는 짭조름하고 쫄깃했다. 그곳에서 페나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했던 스페인 아가씨들을 만나 수다를 떨었다. 그녀들은 한국인보다 더 수줍어 했고 조용조용했다. 한국인 현희와 그의 파트너 J가 뒤늦게 합류했다. 현희는 큰 목소리에 만담가였다. 오늘따라 만담가가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큰 소리와 쉴 사이 없이 떠들어대는 음성이 유리 조각이 바스락거리는 소음처럼 들렸다. 이미 한 병을 비운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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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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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 요리와 화이트 와인 ⓒ 차노휘


식당 맞은편에 성당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서성거렸다. 아, 일요일이었구나. 그때서야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알았다. 걷다보면 날짜도 요일도 무심해졌다. 만약 이곳이 집이라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특별할 것 없을 일상을 보낼 그곳이었지만 일요일이라는 자체가 나를 흔들어 놓았다.

나는 몸을 흔들거리면서 잿빛 골목으로 들어갔다. 스페인의 해는 저녁 9시 30분 즈음에야 지지만 골목은 온통 잿빛이었다. 먹구름 때문이었다. 걷는 중에도 검은 머릿속에는 취기가 작은 불꽃처럼 터졌다. 그 덕인지 나는 상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요즘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고 있었다. 내 영역을 누군가가 침범하는 것에 잔뜩 신경 쓰고 있었다. 혼자인 것은 좋으나 다른 사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는데도 나는 나 이외의 것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만담가인 현희가 부담스러운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새 인물을 반가워했다. 큰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놓고 그 반응에 따라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놓기를 좋아했다. 다른 때처럼 내게 흥이 있었으면 그 반응에 호응해주면서 분위기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그 시간들이 나를 과묵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우중충한 거리를 걷는데 밀물처럼 허전함이 몰려왔다. 이런 허점함 속을 헤매느니, 다시 그 자리로 가서 한바탕 실컷 떠들 수도 있지 않는가. 하지만 뒤돌아서지 않았다. 허전함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찾으려 했다. 달리 생각하면 날씨도 흐려서 걷기에도 좋고 발목도 발바닥 물집도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내게는 나쁠 것이 없었다. 완주하는 그날, 다 나을 수도 있었다. 나는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에서 100km를 더 걸을 계획이니 그렇더라도 감사할 일이었다. 수요일 이른 아침에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10시 30분 미사를 볼 예정이었다. 조그만 힘을 내면 목표한 곳에 '곧'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허전할까?' 

아,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은 다들 도착했다. 연석은 금요일에, 데미안은 토요일에, 데이비드는 오늘(일요일)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들이 먼저 도착해서 일까? 내가 허전한 이유가? 뒤처졌다는 느낌?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와 함께 이 수고로움을 공유하고 함께 축하해줄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혼자이고 싶어하면서 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 관계라는 것이 나를 까다롭게 했다. '아무나'하고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이것은 순전히 내 '고집'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 책은 '관계'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간절하게 다가오는 대목들이었다.

여우와 어린 왕자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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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곤데(Ligonde)를 떠나며 ⓒ 차노휘


장미를 혼자 남겨두고 온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말한다.

"그래서 난 좀 지겨워. 만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의 인생이 환하게 밝아질 거야. 나는 모든 발자국 사이에서 너의 발자국 소리를 구분하겠지. 만약 다른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바로 굴 속으로 숨을 거야. 그렇지만 너의 발자국 소리는 마치 음악인 양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내겠지.

그리고 저길 봐. 밀밭이 보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그래서 밀은 나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존재야. 밀밭을 보아도 나는 어떤 감흥이 생기지 않지. 그건 나에겐 정말 슬픈 일이란다. 그러나 너의 머리카락 빛이 금빛이니, 네가 나를 길들여 놓게 되면 얼마나 멋지겠니? 난 금빛으로 빛나는 곡식을 볼 때마다 널 생각할 테니 말이야. 그리고 밀밭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테지…."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이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자신을 길들여달라고 한다.

"우린 우리가 길들인 것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어.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것을 이해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아. 상점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건만 산단 말이야. 그러나 어딜 가도 우정을 살 수 있는 가게는 없어. 사람들에겐 이제 친구도 사라질 거야. 네가 친구를 원한다면 어서 나를 길들여줘!"


그리고 나서 그는 구체적으로 길들이는 방법을 제시한다.

"우선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할 거야. 처음에는 나와 거리를 두고 그렇게 풀 위에 앉아 있으면 돼. 내가 곁눈으로 너를 보더라도, 내게 말을 시켜서는 안 돼. 말이란 항상 오해를 낳으니까. 그러나 넌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나에게 다가와 앉게 될 거야."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질 거고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하게 되겠지. 그런 나의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보여주는 거야!"


나는 알베르게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근처 조용한 바에서 와인 한 병을 더 시켰다. 오후 네 시에 온다면 아침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릴 존재, 그 존재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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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외곽에 있는 공동 묘지 ⓒ 차노휘


*'여우와 어린 왕자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인용문은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웅진 지식하우스, pp.80~81를 참조했다.

덧붙이는 글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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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자 광주대 초빙교수이다. 2016년부터 걷기 시작하여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집으로는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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