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생각하게 하려면 다르게 말해야 한다

[리뷰]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등록 2018.05.14 14:03수정 2018.05.1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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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신문에 실린 '좌파가 우파보다 정의롭다는 건 편견'이라는 취지의 기사를 보았다. 미국의 보수 성향 심리학 교수가 쓴 책을 토대로 인터뷰한 기사다. 그 책에서는 '배려' '공평' '자유' '충성' '권위' '신성'의 6가지 지표를 '도덕 기반'이라 제시하여 설문조사 했더니 좌파는 '충성' '권위' '신성'의 세 가지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우파는 여섯 지표 모두를 존중한다고 했다. 그래서 좌파가 정의롭지 않다는 결론이다.

이 책에서 언급한 미국식 '충성' '권위' '신성'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따지지 않고, 단어 자체로만 통계를 따진다면 그의 주장은 맞을 것이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기사는 좌파와 우파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가치 기준에서 반대편을 본다면 정의롭지 않을 수 있다는 행간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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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책표지 ⓒ 와이즈베리


그 기사를 읽으며 떠오른 책이 있어 다시 읽었다.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다. 이 책이 떠오른 이유는 미국의 '보수'와 '진보'가 다른 점을 '언어학'과 '인지학' 관점에서 설명했다는 점이다.

미국 UC버클리 교수인 조지 레이코프는 2004년 공화당의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을 때 이 책을 썼다. 대선 패배의 이유를 보수가 1960년대부터 쌓아온 '프레임' 전략에 진보가 제대로 대응 못 했기 때문이라며, 진보는 '프레임' 전략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 특히 선거에서 '프레임'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본인의 연구 분야인 '인지언어학'을 이용해 풀어나간다.

프레임이 뇌에 박힌 구조물?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 설명한다. 이러한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생활 방식을 결정"한다. 이를 정치에도 대입할 수 있는데 프레임은 "사회 정책과 그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만드는 제도를 형성"한다.


'프레임'을 '인지과학자'들은 '인지적 무의식(cognitive unconscious)'으로, 우리 "뇌 안에 있는 구조물"로 설명했다. 형태는 없지만, 그 결과물을 통해 존재를 알 수 있는 구조물이다. 개인이 가진 '상식'이나 '도덕'의 가치는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프레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반사 작용에 가깝다는 것.

'구조물'과 '무의식'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레임'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의 '뇌' 속에 자리 잡은 가치 판단에 관한 굳건한 상태다. '보수'와 '진보'가 가진 가치의 기준도 그렇게 자리 잡은 굳건한 상태 즉 '프레임'이다.

저자는 모든 정치는 도덕적이라고 전제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다름'이라는 것이다. 같은 사안을 두고 전혀 다른 두 개의 해법을 내놓는 이런 차이를 미국 정치의 두 프레임이 가진 특성으로 은유한다. "엄격한 아버지"의 가정과 "자상한 부모"의 두 가정으로.

미국에서는 종종 '국가는 가정'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미국 정치의 두 진영을 가정으로 은유했다. 강한 권위를 기반으로 미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심판자 역할을 하려 하는 '보수'와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공존을 강조하는 '진보'로.

이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른 배경과 철학을 갖고 있다는 은유이다. '뇌'의 한구석에서 서서히 자리 잡아 삶의 가치를 판단하고 행동하게 하는 그 '단단한 구조물'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두뇌는 "자리 잡은 프레임으로 납득 가능한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인지언어학적' 사실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누군가 사실을 얘기하더라도 자기의 프레임과 맞지 않으면 그 사실을 무시하거나 반박한다. 자기의 프레임은 그대로 둔 채로.

뭔가 떠오르지 않는가? 누군가 '적폐'라고 하면 '통치 행위'라 반발하고, '뇌물'이라 하면 누군가는 '통치 자금'이라 주장하는 상황. 서로가 생각하는 '상식'의 상황과 세상이 다른 것이다.

저자는 정치에서 특히 유권자들의 '상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뇌에 세상과 정치를 보는 '프레임'이 이미 구조화 혹은 고정된 사람들의 상식을 바꾸어 주긴 어렵다.

책에서는 미국에서 보수를 지지하는 유권자의 비율이 35~40%이고, 진보를 지지하는 층 역시 35~40%라고 한다. 이들의 프레임은 거의 고정되어 있어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들의 지지하는 방향을 변경하진 않는다고 한다. 한국식으로 얘기하면 '콘크리트 지지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20~30%의 향방은? 책에서는 '이중개념주의자'라고 설명한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 중간에 자리하는 이들은 어떤 쟁점에서는 보수적이고 또 어떤 정책에서는 진보적이다. 그래서 "이 두 성향이 다양한 비율로 배합된 '이중개념' 소유자"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들 '이중개념주의자'들의 프레임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인지언어학적으로 대응하여 그 프레임을 건드려 진보에 투표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유권자의 20~30%인 이중개념주의자의 이동이 선거의 향방을 좌우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다름'을 인정하고, 진보의 실패(2004년의 대선 패배)에서 교훈을 얻고, 보수의 전략(40년 넘게 프레임을 다지고 넓혀온)을 밑바닥부터 이해한 다음에 '공적 담론'을 재구성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적 담론의 프레임, 그 재구성을 위하여

저자는 보수가 1960년대부터 공적 담론을 뒷받침할 연구소를 세워 연구를 지원하고, 보수를 뒷받침할 교수와 변호사를 키워온 사실을 강조한다. 물론 보수를 지지하는 기업들이 투자했고, 보수는 기업들에 유리하게 법을 개정해왔다.

반면 진보는 지난 세월에 있었던 작은 승리에 도취하여 진보의 가치와 관심 분야를 확대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로 전선이 너무 넓어지고 허점이 많아져 보수의 전략적 공격에 무너졌다고 평가한다.

실패의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보수가 쓰는 그들의 언어를 진보가 함께 사용해서 진보 지지층에게도 보수의 이슈와 가치를 넣어줬다"라며 인지언어학적으로 분석했다. 해결 방안으로 "언어가 프레임을 활성화하기에 새로운 프레임은 새로운 언어를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르게 생각하게 하려면 다르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솔루션을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며 설명한다. 언어가 어떻게 뇌에 작용해서 프레임으로 구축되는가와, 보수와 이중개념주의자와 대화하는 법 등을 제시한다. 이론과 실제를 다양한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이 책을 3년 만에 다시 읽은 후 든 생각이 있다. 글 처음에 언급한 기사뿐 아니라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은 '좌파'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쓰고, 한국의 야당 대표도 '좌파'라는 말을 반복해서 쓰는 것이 어쩌면 의도가 있는 단어 선정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책의 주장 때문일까? 2008년에 오바마가 집권하고 재선에도 성공했다. 역자는 대선 기간에 오바마가 사용한 화법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주장한 방향과 같다고 역자 후기에서 설명한다.

지난 역사를 보며 든 생각이 있다. 실패 다음에 성공, 그리고 또 실패. 이러한 정치 혹은 역사에 파인 수레바퀴 자국을 보고 갈 길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마침 저자의 새로운 책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가 지난 3월에 출간되었다. 목차를 보니 조지 레이코프의 지난 연구와 비교하여 심화한 내용이 있어 보인다. 자연스럽게 다음 독서 목록이 정해졌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대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오피니언뉴스에도 게재됩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교보 특별판)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와이즈베리, 2018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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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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