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압력, 그리고 김근태의 석방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47] 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등록 2018.06.20 16:07수정 2018.06.2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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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펼쳐진 통일운동의 대열에 민청련도 참여했다. 하지만 민청련은 학생운동과는 달리 통일운동에 전 역량을 투입할 정도로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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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14일 종로2가 탑공공원 앞에서 재야단체 회원들과 함께 남북공동올림픽 개최 요구하는 민청련 회원들. 앞줄 왼쪽 첫 번째는 민중신문팀 최만영, 그 옆 핸드마이크 들고 있는 이는 정봉주, 그 옆은 사무국 총무부장 신기동, 한 사람 건너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그 옆 북민청 총무 남정현. ⓒ 민청련동지회


'5공 비리'를 투쟁의 축으로

민청련의 지역지부인 동민청, 남민청, 북민청, 안민청 등은 사회단체들과 연대한 공동올림픽 촉구 집회에 참가하는 한편으로 각자 자기 지역의 공단 등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지원하는 일에 집중했다. 또 중앙에서는 정치권에 등장한 이른바 '5공 비리'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대중투쟁으로 이끄는 일에 앞장섰다.

'5공 비리'란 전임 대통령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의 직책에 앉아 대기업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아 챙기고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전두환의 재임 중 비리까지 밝혀진 사건이다. 여소야대의 국회에서는 '5공화국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새 헌법에 따라 처음으로 청문회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정치권에서는 '5공 비리'가 드러난 것은 노태우 정권이 전임 전두환 정권과의 연계를 끊고 차별성과 독자성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흘린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며 국민들을 윽박지르면서 강권을 휘두른 전두환 정권이 뒤에서는 엄청난 비리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민청련은 5공 비리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토대로 여러 단체들과 연합해 '광주학살 부정비리 원흉 전두환 이순자 구속수사 촉구 범국민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은 학생운동의 610남북학생회담 및 8.15남북공동행사에 가려져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 연말에 국회에서 열린 '5공 청문회'와 맞물려 전국민적인 투쟁으로 불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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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이순자 구속수사 촉구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어는 민청련 민중신문팀. 맨 왼쪽 이범영, 그 옆은 홍용기, 김택수. ⓒ 민청련동지회


대중을 향한 교육, 청년학교

한편 민청련 각 지역지부와 중앙이 나름의 활동을 펴는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조직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정책실이었다. 정책실은 중앙위원회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실장 이승환을 비롯해 한홍구, 노동진, 김종민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9차 총회 이후 민청련의 활동방침으로 결정된 '청년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을 정책실이라는 기능 속에서 고민하던 중, 청년대중에 대한 교육사업에 착안했다. 이를 위해 10차 총회에서는 교육위원회라는 기구를 신설했고, 이 기구에서 '청년학교준비위원회'를 꾸려 사업구상을 펼쳐나갔다.

민청련에서는 이전에도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꾸준히 진행돼 왔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위한 것으로, 내용이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이라든가 '여러 투쟁 노선의 차이점에 대한 분석'과 같은 것들이어서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일종의 '엘리트 교육'이었던 셈이다.

청년학교를 구상한 이들은 기존의 교육과는 다르게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일반 청년들, 특히 대학을 나오지 않은 보통의 '일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구상했다. 대개 중등교육과정에서 배운 우리 사회와 역사에 관한 지식들은 정권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과거와 현실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청년학교는 그러한 제도권 교육이 심어준 거짓의 껍데기를 부수고 "우리 민족사회의 역사적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준비를 마친 위원들은 1988년 7월 19일, 서울 서대문 충정로에 마련한 강의 공간에서 제1기 청년학교를 개강했다. 교장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진균이 맡았고, 이승환, 한홍구, 박기목, 윤석연 등이 간사로 운영을 맡았다.

강의는 매주 수, 금요일 2회씩 총 16강으로 구성됐다. 강의 주제는 첫 강의 '세계관'으로 시작해 자주, 민주, 통일, 한국경제의 구조, 80년대 운동, 애국과 매국의 역사 등이 전반기 강의였고, 이어서 후반기 강의로 사회참여와 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문화운동, 주민운동 등이 이어졌다. 강의 제목만으로는 기존 교육과 차별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 강의는 철저하게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진행됐다.   

강사로는 소설가 김영현, 노동운동가 장명국 등이 참여했고 민청련 선배 활동가로 김희택, 연성수, 권형택, 김희상, 현역 간부로 의장 김성환과 청년학교 측 한홍구가 직접 참여했다. 1기 강의에 참여한 학생은 70여 명으로 다른 지역지부 활동에 비해 규모가 컸다. 직업별 비중을 보면, 사무직 노동자와 대학생이 각 35% 정도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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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년학교 교장 김진균 2.간사 한홍구 3.정책실장 이승환 4.교육위원장 박기목 5.정책실 노동진 6.정책실 김종민 ⓒ 민청련동지회


민청련의 청년학교는 지역의 청년단체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곧이어 충남민주청년연합에서도 청년학교를 개강했고 광주, 부산 등으로 번져나갔다. 충남민청의 경우, 지역 교육청에서 비인가 교육 시설이라며 폐쇄하라는 공문을 보내와 갈등을 빚기도 했는데, 이는 청년학교 운동이 정권에게 상당한 타격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NL의 흐름 속으로

그런데 민청련 중앙에서 청년학교 개교를 논의하던 중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청년학교의 위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는데, 중앙위에서는 청년학교를 민청련의 '부설'로 할 것을, 청년학교준비위 측에서는 '후원'으로 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중앙위에서 부설을 주장한 것은 청년학교의 교육방침이나 인선 등이 민청련 중앙의 지도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청년학교 준비위원들은 기존의 민청련 교육이 주로 학생운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일반 대중들에게도 그런 인상이 강하기 때문에 대중 교육은 그런 민청련과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준비위 측의 주장대로 청년학교는 민청련의 후원 아래 일정한 독립성을 갖고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는 표면상 드러난 논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청년학교를 꾸린 이들은 당시 학생운동을 풍미하던 이른바 NL계열의 논리를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의 주제도 NL운동의 핵심개념인 '자주, 민주, 통일'이 뼈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는 중앙의 노선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후 청년학교 활동은 그 자체로는 크게 활성화됐지만, 민청련 중앙에 대해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김근태 석방되다

한편 민청련의 지역지부 사업이 또 하나의 성과를 거두었다. 9월 3일, 성남민청련이 창립됐다.

성남은 일찍이 70년대 초 서울 재개발 사업으로 밀려난 서민들이 모여 들어 만들어진 도시로 주민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특히 1980년 6월 9일, 광주 항쟁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던 때에 21살의 성남 노동자 김종태가 서울 신촌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온 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했다. 이후 김종태를 기리는 지역 활동가들이 모여 모임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 활동가 중 한 명인 허남정(서울대 철학과 77학번)이 주축이 돼 민청련 지부를 결성한 것이다. 이로서 민청련은 서울 이외 경기 지역에 안양에 이어 성남에 근거를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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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남민청련 현판식. (아래)성남민청련 초대 위원장 허남정과 성민청 임원 명단 ⓒ 민청련동지회


성민청 창립식에서는 뜻깊은 강연이 있었다. 민청련 초대 의장 김근태의 강연이었다. 김근태는 이에 앞서 6월 30일, 구속된 지 2년 10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김천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당시 전국의 교도소에는 대학생과 노동자를 비롯한 양심수가 1천 명을 헤아리고 있었으므로 김근태의 가석방은 특별한 경우였다. 민청련에서는 그것은 미국 정치인들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았다.

6월항쟁이 있던 87년 연말,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에서 김근태를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80년 광주 학살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보는 민청련에게 이는 뜻밖의 뉴스였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원로들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은 정치와 상관없이 전 세계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단체이므로 수상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고 민청련도 수긍했다.

그런데 정작 옥중에 있는 김근태를 대신해 부인 인재근이 수상을 위해 출국하려 했으나 정부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미국에 가지 못했다. 결국 88년 5월, 재단 관계자인 로베트 케네디의 딸이 직접 상을 들고 방한해 인재근에게 수여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이 김근태 석방에 대한 압력을 넣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정부는 6월 30일 김근태를 석방했다.

당일 김천 교도소에는 부인 인재근, 함께 민청련에서 활동했던 이해찬, 박우섭, 당시 의장 김성환 등이 찾아가 교도소를 나서는 김근태를 뜨겁게 환영했다. 김근태는 겉으로는 건강해 보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등과 허리가 몹시 쑤신다고 했다. 또 두통이 심해 잠도 제대로 못자고 하혈까지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당분간 쉴 것을 권유했지만, 당시 상황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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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강연하는 김근태 전의장 ⓒ 민청련동지회


성민청 강연의 제목은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현황과 과제".

감옥을 나온 지 이제 두 달 된 김근태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였다. 김근태는 87년 대선에 대해 옥중에서 '김대중 비지'를 천명했고, 그것은 결국 노태우 당선, 그리고 운동권의 대분열이라는 업보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운동 전반이 처한 현실을 되짚어 보면서 무언가 방향을 찾고 싶었다.

이날 강연은 그에 대한 김근태 생각의 대강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른바 '두 개의 전선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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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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