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왜 그녀에게 이주노동을 강요했을까

인도네시아 인권활동가 마이지다 살라스 이야기①

등록 2018.10.23 10:10수정 2018.10.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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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가 인신매매(TIP) 보고서에 따라 매해 선정하는 올해의 '인신매매 방지 활동 영웅'에 선정된 인도네시아 인권활동가 마이지다 살라스(Maizidah Salas, 이하 살라스)가 지난 주 한국을 방문했다. 기자는 외국인이주노동운동연합회와 아시아이주노동자포럼(MFA)이 주최한 '고용허가제 논의를 위한 아시아시민사회 회의(10월16~17일)'와 '2018 광주인권도시포럼(10월 18일~ 21일)'에 참석한 살라스와 4일간 동행하며 인신매매 방지 활동을 하게 된 경위 등에 대해 들었다... 기자말

미 국무부는 지난 6월 28일 세계 인신매매(TIP) 보고서에 따라 '2018 인신매매 방지 활동 영웅' 10인을 선정했다. 미 국무부는 '인신매매 피해자 보호법(Trafficking Victims Protection Act)'에 따라 각국 정부, NGO, 언론 등을 통해서 입수된 정보를 바탕으로 인신매매(TIP) 보고서를 작성하여 2001년 이래 매년 의회에 제출하고 있다. TIP 보고서는 안전 등급인 1등급부터 주의 2등급, 요주의 2등급, 3등급 등 4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인신매매 피해자 보호법은 3등급 국가에 인도적 지원이나 대외 원조자금 지원과 교육문화교류 프로그램의 참여도 금지하고 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의 비인도적 구호 및 지원금 지원이 중단될 수 있다. 이 말은 최악 등급인 3등급을 받을 경우 미국으로부터 원조 중단, 수출 제한 등의 제재를 받을 수 있고, 국제사회의 압력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각국은 매년 TIP보고서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미국무장관 폼페이오와 수상 기념 사진2018 인신매매 방지 활약 영웅 10인에 선정되어 상을 받은 살라스 ⓒ salas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조합(SBMI) 중부자바 오노소보군 지부장 마이지다 살라스는 성폭행이나 강제 노동 등으로 피해를 본 이주노동자 인권 옹호와 귀국한 이주노동자들의 사회재정착 지원 활동성과를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그는 인신매매 피해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출연하여 인도네시아에서 화제를 모았던 '안개 가득한 나라의 꿈'과 같은 영화 제작을 통해 이주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영화제작자라도 활동하고 있다. 
 

이주인권 옹호 영화 제작성매매 피해 이주노동자가 직접 출연하여 그 피해 심각성을 알렸던 영화 '안개 가득한 나라의 꿈' 제작 과정 ⓒ 살라스

 
살라스는 20년 전 한국에서 외국인산업기술연수생으로 이주노동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어린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상처를 극복하고 이주인권 활동가로 성장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머니가 살라사에게 이주노동을 떠밀었던 이유

고등학교 1학년 말에 같은 학교 남학생에게 성폭행 당했을 때 부끄러워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 또래 남자들이 의례 그렇듯이 자랑하듯 떠들고 다닌다는 소리를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려도 이를 악물고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6개월쯤 되어 배가 불러오면서 감출 수 없게 되자 학교를 그만뒀다.

그때 성폭행했던 남학생이 내가 혼자 집에 있을 때 찾아와서 아이를 지우라며 배를 걷어찼다. 쓰러진 사람 위에 올라타서 얼굴에 멍이 들도록 주먹질을 했고, 복부에 통증이 오도록 반복해서 발길질을 하고 떠났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몇 달 뒤 출산했을 때 아이가 살아있다는 게 신기했고, 장애 없이 태어난 사실에 한없이 감사했다.

아이를 낳았지만 중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여자가 시골에서 혼자 키울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앞날을 생각하면 캄캄해서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인력송출업체 브로커에게 데리고 갔다. 당시나 지금이나 시골 여자들이 인력송출업체를 찾는 이유는 중동이나 홍콩, 싱가포르에 가사노동자로 가기 위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성폭행 당했던 경험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가사노동자들이 성폭행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에게 브로커는 한국으로 가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난색을 표했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동이나 싱가포르 등에 비해 두세 배는 더 많은 돈이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브로커는 빚을 내서라도 보내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이상하다며 어머니를 채근했다. 결국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돈을 끌어 모아 브로커에게 갔다 줬지만 출국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돈을 마련하고 나서 반 년 넘게 브로커가 마련해 준 곳에서 출국 준비 명목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그곳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서류 등을 준비하여 송출기관에 보낼 때마다 이번에는 호출이 오나 했지만 몇 번씩이나 퇴짜를 맞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나이가 문제였다. 그렇게 빚이 쌓여가자 어머니와 브로커 사이에 다툼이 일기도 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송출기관으로부터 호출을 받은 건 딱 만 18세가 되었을 때였다.

산업연수생으로 선발된 뒤 송출기관에서 석 달 동안 출국 전 교육을 받았다. 머리를 짧게 깎고 하루에도 몇 킬로씩 입에 단내가 날 때까지 매일 뛰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 낳고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빠질 살이 있나 싶었는데, 1주일 만에 3킬로나 빠졌다. 교육을 마쳤을 때 너무 말라서 내가 봐도 낯설 정도로 야위었다. 하루 네 시간씩 한국어교육을 받았지만 군인처럼 훈련받느라 지쳐서 그런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잘 배워뒀으면 지금도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을 텐데, 다 잊어 버렸다. 배움이라는 게 언젠가는 다 쓸모가 있는데,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산업연수생 출국전 교육살라스는 인도네시아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출국 전에 남자들과 똑같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 살라스

    
신분증 압류, 강제 적립, 외출 금지... 그래도 행복했던 시절

1997년 여름에 한국에 도착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여권을 만들었지만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공항에서 연수생 관리업체 직원이 여권을 갖고 단체로 출국시켰다.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신분증을 직접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압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월급은 매월 4~5만 원을 용돈으로 준 뒤, 회사에서 강제 적립해 버렸다. 

목돈 마련하고 귀국하라고 적립하는 거라 했지만, 업체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회사에서 통장을 압류했기 때문에 하루 14~15시간을 일하면서도 실제 급여를 확인해 본 적이 없다. 토요일은 당연했고, 일요일도 잔업 하는 날이 많았다.

회사는 청주에 있는 방직공장이었다. 공장 앞에 큰 길이 있었고, 공장 뒤로 식당과 무슨 '실'이라고 하는 건물들이 있었고, 맨 뒤에 3층짜리 기숙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인권침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행복했다. 작업환경은 방직 기계가 돌아가던 공장을 나오면 귀가 멍할 정도로 소음이 심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한 방에 여덟 명이 지냈던 기숙사는 이제껏 봐왔던 어떤 방보다 크고 아늑했다. 같이 입국한 인도네시아 연수생들은 방 세 개를 썼는데, 성질 사나운 사감이 있을 때 말고는 오순도순 고향 이야기를 하고 공기놀이도 하고, 자수도 놓으면서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외부 출입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회사에서 딱 한 번 단체로 외출했었다. 독립운동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곳이었다. 인도네시아도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했기 때문에 그곳이 인상 깊었다. 

쉬는 날도 많지 않고, 외출도 자유롭지 않지만 3년만 참고 귀국하면 빚도 갚고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참았다.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 귀국하면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있었다.

회사에는 산업체 야간학교에 다니는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있었다. 더불어 군대 대신에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던 남자들도 많았다. 그때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야간학교들이 거의 사라질 시기였다. 산업체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가장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부모가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일하면서 배우는 삶을 강요받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일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대한민국이 참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공장 일을 마치고 작업복에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퇴근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다짐했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도 저렇게 일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나도 귀국하면 반드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 그 각오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20년 전 일했던 회사 이름은 까먹었지만, '이영주'라는 중학생 아이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아이가 참 착했다. 나에게 잘 해 줬고 잘 웃는 아이였다. 보고 싶다.

20년 전 한국에서 마음먹었던 각오대로 대만에서 이주노동을 마치고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서 SBMI에서 활동가로 일하면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방송통신대학을 통해 법학 학사도 받았다. 미국무부 인신매매 방지 올해의 영웅으로 선정된 뒤, 독일과 호주에서 대학원 과정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초청도 받았다. 영어가 서툰 부분도 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둘 수 없어서 인도네시아에서 계속 공부를 이어가겠다.
 

차별없는 세상을 위해아시아시민사회회의에 참석하여 차별철폐 캠페인을 나서는 모습. 그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 ⓒ 고기복

 
1998년은 인도네시아나 한국이나 어려운 시기였다. 한국 온 지 1년 반이 지났을 때 회사가 부도났다며 연수생 관리업체로부터 짐을 싸라는 연락을 받았다. 연수생 관리업체에서 출국 동의 서류를 들이밀며 서명을 강요했다. 출국하지 않을 경우 강제 적립된 돈을 받지 못한다고 적혀 있었다. 당시 산업연수생 월급보다 불법체류자 월급이 많다는 소문이 있었다. 강제적립금을 포기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작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출국하며 졌던 빚을 다 갚고 남을 돈이었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새로 일하게 된 회사는 섬유 원단 제작업체였다. 방직회사에서 실을 뽑다가 원단을 만들게 됐으니 좀 더 성장한 셈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일을 했다. 사장 부부는 소등 시간부터 밤에 이야기하는 것까지 시시콜콜 간섭하며 쥐 잡듯이 목소리를 높였던 방직업체 기숙사 여자 사감과는 딴판이었다. 어린나이에 외국에 와서 고생한다며 딸처럼 대해줬다. 한국 사람끼리 족발을 시켜 먹을 때면 꼭 통닭을 따로 시켜줬다. 통닭 위에 뿌려놓은 참깨가 인상적이었다. 그때까지 먹었던 한국 음식 중에 최고로 맛있는 음식이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동생처럼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원단업체에서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딱 두 달 일하고 출입국단속에 걸렸다. 외국인보호소에서 공중전화로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에 와서 한 번도 전화하지 않았었다. 국제전화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고, 모질게 마음먹고 돈만 모으겠다고 해서 그랬다고 핑계라도 대고 싶지만 그게 아니었다. 한국에 있는 내내 이주노동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었던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었다. 강제 적립한 돈은 찾을 수 없고, 수중에 2천 달러가 전부라는 사실, 산업연수생으로 출국하면서 브로커에게 뜯긴 돈 때문에 빚만 안고 귀국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하려다 목이 메 다하지 못했는데 전화가 끊겼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참 모진 딸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젖먹이였을 때 놔두고 떠난 아이를 돌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하지 않았던 걸 보면 원망이 쉬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보다. 지금은 그 아이가 미국에 있다. 아이 이야기를 하려면 늘 죄인이 된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마치고 곧바로 태국에서 4년 7개월, 자카르타에서 4년을 사느라 아기가 12살이 넘도록 떨어져 지냈다.

그래도 엄마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착한 아이로 잘 커줬다. 아이와 늘 서먹서먹했는데, 지난 번 미국무부에 상을 받으러 갔을 때 2주 동안 같이 호텔에서 지내면서 처음으로 아이에게 엄마 노릇을 제대로 했다. 우리 아이에 비하면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게 되기까지 나는 너무 오랜 세월을 허비했다. 이젠 다 옛날이야기다. 어머니가 나를 자랑스러워하신다. 나도 이젠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곤 한다.

출입국관리소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외국인등록증과 여권을 봤다. 여권에는 내 출생지가 고향인 오노소보가 아닌 당시 산업연수생 송출이 많았던 지역 이름으로 돼 있었다. 18개월 동안 신분증도 없이 갇힌 생활을 하면서도 위험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면 믿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이라는 나라는 나에게 그런 인상을 줬다. 그때 경험에 비춰보면 20년이 지난 지금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인권침해를 당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이상하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고용허가제 논의를 위한 아시아시민사회회의20년 만에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현실을 접한 살라스는 더욱 악화된 노동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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