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허기' 꿈꾸었던 고 박노정 시인

계간 <시와경계> 박노정 시인 추모특집 다뤄 ... 성선경, 박종현 시인 등 글 써

등록 2018.10.29 10:40수정 2018.10.29 11:17
0
원고료로 응원
a

고 박노정 시인. ⓒ 윤성효

 
천년쯤은

시인이여 바보가 되라
한 천년 물속에 가라앉아
침향(沈香)이나 되라


천년을 내리 숨죽여
천년을 내리 까마득 잊어버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음과 마음이
어슴푸레 이어지는 때가 있거든
그때 세상 밖으로 불끈 속아올라라
한 천년쯤은 넉넉히 기다려
철들 세상 꿈꾸라


지난 7월 4일 세상을 뜬 고 박노정(1950~2018) 시인의 작품이다. 계간 <시와 경계>가 '가을호'를 내면서 고 박노정 시인을 '추모 특집'으로 다루었다.

성선경 시인은 '시읽기'에서 이 작품에 대해 "아마 시인의 사명에 대한 생각은 박노정 선생님 자신에 대한 질책이며 자신이 가고자 했던 시인의 길이기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 시인은 "천년의 시공간을 뛰어 넘는 향기를 품은 존재, 침향이 되는 시간과 공간의 침묵, 이것이 박노정 선생님이 걸어가고자 했던 시인의 길이었다는 것"이라며 "나는 지금 은은한 그 향기를 맡고 있다"고 했다.

박종현 시인은 고인의 시 "거룩한 허기"에 대해 "거룩한 꿈, 아름다운 허기"라고 했다. 박 시인은 "스스로 '제 몸에 깊은 상처'를 내면서 살아왔구나 '누구에겐가 오래 빚지고 산' 적이 있는 사람만이 정녕 아름다운 꿈인 '거룩한 허기'를 꿀 수 있다"고 했다.


거룩한 허기

한 숟갈 삼키다 울컥한다
한 문장 베끼다 울컥한다
울컥하는 것들은 모두 거룩한 것들이다
거룩한 것들은 모두 허기진 것들이다
모두 한때 제 몸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들이다
누구에겐가 오래 빚지고 산 것들이다
누군가 그 옆에 슬그머니 줄을 선다
갑자기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여태전 시조시인(남해 상주중학교 교장)은 "다만 가물거리는 것들과 함께"라는 제목의 글에서 고인을 회상했다. 대학 다닐 때 고인을 첫 만났다고 한 여 시인은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말씀은 선생의 삶을 이해하는 첫 단추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는 "시인 박노정 선생은 한결같이 마음으로 시민운동이나 문화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금강경>의 핵심사상을 몸소 깨닫고 실천한 것이리라"며 "선생은 세상의 그 어떤 물질이나 존재에도, 어떤 깨달음이나 생각, 또는 사상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다"고 회상했다.

고인은 화장해서 산청 선영 쪽에 '수목장'을 했다. 여 시인은 "한 그루 '큰 나무'처럼 우리 곁에 계셨던 선생을 하루 아침에 화장했다"며 "육신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몇 줌의 재로 갈아서 나무상자에 담았다. 선생을 사랑했던 우리들은 작은 배롱나무 밑에 얕게 파서 한 줌씩 재를 뿌리고 흙을 덮어 묻어드렸다"고 소개했다.

정진남 시인은 "박노정 시인의 삶과 문학"이란 제목의 글에서 "친일화가가 그린 진주성 의기사 '논개영정'을 떼어냈고, 각종 시국사건 관련 성명서 낭독 등의 모습으로 그를 만나기도 했다"며 "어떤 이는 시인의 가난을 흉보기도 했는데, 이 또한 시인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발전적 가난을 실천한 선두주자였기 때문"이라 했다.

진주에서 태어났던 박노정 시인은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 <늪이고 노래며 사랑이던>, <운주사> 등을 펴냈다. 고인은 시민주로 만들었던 옛 <진주신문> 대표이사 겸 발행편집인, 진주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진주문인협회 회장,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대표, 남성문화재단 이사, 진주가을문예 운영위원장 등을 지냈다.
 
a

8월 19일 경남 산청군 차황면 철수리 산에 있는 고 박노정 시인의 '수목장'에서 '시비' 제막 행사가 열렸다. ⓒ 윤성효

#박노정 #시와경계 #성선경 #박종현 #여태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김 여사 성형' 왜 삭제? 카자흐 언론사로부터 답이 왔다
  2. 2 [단독] 순방 성과라는 우즈벡 고속철, 이미 8개월 전 구매 결정
  3. 3 해외로 가는 제조업체들... 세계적 한국기업의 뼈아픈 지적
  4. 4 돈 때문에 대치동 학원 강사 된 그녀, 뜻밖의 선택
  5. 5 "모든 권력이 김건희로부터? 엉망진창 대한민국 바로잡을 것"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