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김두환 미술관 설립 위해 민간추진위 구성

신현국 화백 등 참여… 화실벽화·가족·자화상 문화재등록도 병행

등록 2018.11.12 17:45수정 2018.11.1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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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설봉김두환기념사업·미술관건립추진위원회’가 김두환 화백 자택과 화실을 찾아 둘러본 뒤 미술관건립의지를 다지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왼쪽부터 황인기·이원동·김광식·신현국·이진자·박천복·김기융·박학규). ⓒ 무한정보신문 ⓒ 김동근


충남 예산이 낳은 서양화가 1세대 설봉 김두환(1913~1994) 화백.

후진들이 그가 살며 작품활동을 했던 충남 예산읍 예산리 505-3번지 일원(추사학당 뒤쪽)에 미술관을 건립하기 위해 뜻을 모았다. 지금은 자택과 아뜰리에(화실) 모두 무너져가는 초라한 모습이지만, 화실의 경우 한국 최초 여성서양화가 나혜석과 이응노 화백이 기거하며 김 화백과 교류했던 예술공간이었다.

후진들의 바람대로 이곳이 그의 예술을 만날 수 있는 미술관이자, 침체된 원도심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콘텐츠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양화가설봉김두환기념사업·미술관건립추진위원회(회장 신현국, 아래 추진위)’가 지난 10월 24일 첫 모임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빠르면 연말이나 내년 초에 김 화백의 일대기와 작품세계 등을 담은 자료와 더불어 미술관건립제안서를 제작한 뒤 예산군 등 행정에 제출할 예정이다.

추진위에는 예산지역인사들은 물론 전국적인 예술인들이 참여했다. 회장은 우리에게 ‘계룡산화가’로 알려진 예산출신 원로 서양화가 신현국 화백이 추대됐고, 해초 박학규(충남도무형문화재 50호) 각자장과 조각가인 이진자 전 예산군의원, 대학교수 등을 역임한 서양화가 황인기·박천복·임종만 화백이 힘을 보탰다.

유족인 차남 기융씨는 명예회장을, 20여년 동안 설봉작품을 수집하며 연구회를 조직했던 사업가 김광식씨는 상임고문을 맡았다.

신현국 화백은 첫 모임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김두환 선생님께 사사를 받았다”며 “애석하게도 예산에 설봉미술관이 없어 이번에 제자로서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틀림없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진자 전 의원은 “예산군의회에 있을 때 추진한 일랑미술관이 무산돼 미술인으로 부끄러웠다. 예산토박이 작가로서 설봉미술관 건립에 힘닿는데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김광식씨는 “갖고 있는 자료와 지식을 통틀어 좋은 결실을 맺도록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황인기 화백은 설봉 선생과의 인연을 회상했다. 그는 “내가 경복중학교 2학년 때 미술교사로 전근을 오셨다. 당시 깊이 있는 그림에 충격을 받았다”며 “설봉 선생님의 영향으로 공과대학을 다니다 미술로 전향했다. 아주 특별했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유족대표인 기융씨는 “원로작가님들을 모셔서 영광”이라며 “앞으로 아버님께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노력해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인사했다.
 
김 화백의 가족그림과 자화상, 벽화에 대한 문화재등록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2013년 2월 21일 배운성(1900~1978)의 ‘가족도’를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지정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김두환 화백이 1941년 그린 ‘가족(130㎝×162㎝)’. ⓒ 서양화가설봉김두환기념사업·미술관건립추진위원회

 
문화재청은 당시 문화재 등록예고 사유를 통해 "가족도는 한옥 마당에 군집한 대가족이 아기를 안고 앉아있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배열된 작품으로 근대기 가족사진을 연상시킨다. 등장인물 17명이 직립자세로 정면상을 보이고 있으나, 몇 명은 움직임이 내포돼 있어 근대기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며 "가족도는 한국미술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대형 가족초상화다. 우리나라 최초로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 화단에서 활동했던 배운성의 대표작으로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추진위 관계자는 “왜정 초에 만든 화실에는 설봉 선생이 그린 벽화가 남아있다. 한국에서 서양화가 1세대가 자기 화실에 남긴 유화 작품은 거의 유일무이”라며 “1940년대 초에 그린 100호 크기의 가족그림과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두 작품과 벽화를 묶어 문화재청 문화재등록도 다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김 화백은 삽교 신가리에서 태어나 예산초등학교(11회)와 경성 양정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천단화학교를 마치고는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재학시절 다수의 대회에서 입상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 뒤 1940년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10회 이상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예산농업학교와 서울 경복중, 경기여중, 경동중고, 오류중 등에서 미술교사로 후학을 양성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정년퇴직한 뒤에도 다시 파리 국립미술대학교로 유학을 떠나는 등 미술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으며, 1994년 82세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예산읍 예산리 505-3번지 자택에서 살며 창작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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