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학살당한 아버지, 그 후 가족들에게 일어난 일

[박만순의 기억전쟁 ④] '군·경 민간인 학살'로 아버지 잃은 '역경' 이겨내기까지

등록 2018.11.18 15:50수정 2018.12.0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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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개머리판총 개머리판으로 재소자들을 내리치는 호송군인 출처: Picture Post-5086-Korean War Series- pub. 1950 ⓒ 박만순


[기사 수정: 23일 낮 12시 28분]

"남편 어디 있소?" "모내기하고 있어요" 총을 멘 충남 대전경찰서 경찰들은 윤영희(가명)씨가 알려 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영호(가명)씨 잠깐 봅시다" "무슨 일인데요?" "잠깐 지서에 갑시다" 김영호는 개울에서 발과 종아리를 씻고, 집에서 양말과 옷을 갈아입고 경찰들과 동행했다. 집에서는 출소한 지 6개월이나 된 김영호 걱정으로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지서에서 간단한 조사나 하려는가 보다'하며 큰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서로 간 집안 막내 김영호가 십여 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집안 어른들이 사방팔방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집단 학살되었다고 소문이 난 곳을 다니며, 시신을 찾았다. 그러나 결국 막내아들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김영호가 지서로 끌려 간 지 1년이 지나자 집에서는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이유로 학살되었는지는 60년이 지난 후에야 밝혀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김영호(가명, 1929년생)가 "1949년 3월 9일 포고 제2호 '조선전기사업령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에 처해졌다"라고 밝혔다. 그는 1950년 1월 초 만기 출소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6개월 만에 지서를 경유해 공주형무소에 재수감됐다. 이른바 '예비검속(豫備檢束)' 대상이 된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공주 상왕동 살구쟁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진실화해위원회,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실정법 위반으로 형을 받은 이가 만기 출소했는데, '앞으로 또 죄를 지을 수도 있겠다'라는 추측으로 다시 붙잡아 들였다. 상상 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역사 속에 실재한 것이다. 이런 일은 공주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다. 충청북도 청주에서도 있었다. 6.25 당시 청주형무소 간수였던 홍두표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했다.
 
"그때부터 직원 전원이 비상근무를 하였다. 나는 정문에서 근무할 간수 10명 가운데 1명으로 선발되었다. 그런데 (1950년) 6월 28일에 그동안 포고령 2호 위반죄로 복역했다가 그 전날 만기 출소했던 사람들이 다시 입소해왔다. 그들은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출소하자마자 교도소 정문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청주경찰서로 데려가더니 아무 설명도 없이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다가 오늘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홍두표, 『나의 餘韻(여운)』, 새틀, 2006)"
 
 

살구쟁이로 끌려 가던 날살구쟁이로 끌려 가는 공주형무소 재소자 사진출처: Picture Post-5086-Korean War Series- pub. 1950 ⓒ 박만순



  
김영호는 1949년에 대천경찰서에 검거되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만기 출소했다. 그는 6.25 발발 후 다시 붙잡혀 살구쟁이에서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 아내 윤영희씨는 집안 어른들과 함께 시신 수습을 위해 돌아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5년 후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12살 연상의 새 신랑 집은 '하꼬방'

아내 윤영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외갓집으로 간 지 3일 만에 외할머니와 함께 충남 보령군으로 찾아 왔다. "죽이든 살리든 내 자식 데리고 가겠어요" "안 된다. 진기는 김씨 집안 씨여. 죽이든 살리든 김씨 집안에서 해결할 테니 너나 당장 나가라." 시댁은 완고했다.

1955년 당시 8세였던 아들 김진기(가명)는 어머니가 집에서 쫓겨나는 상황에서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소년에 불과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엄마"하고 울부짖기만 했다. 엄마가 어이없이 쫓겨나면서 아버지 몫의 땅도 구름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친정으로 간 윤영희는 바늘방석에 앉게 되었다. 손위 오빠는 '출가외인'이라며 여동생을 구박했다.

결국 친정집으로 간 지 1년 만에 윤영희는 친정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충남 부여군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얼굴도 한 번 못 본 새 남편은 12살이 많았다. 집이라고 가보니 고개에 있는 하꼬방(판잣집)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전 부인에게서 낳은 딸이 셋이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운명이려니' 하며 체념하고 살아야 했다.

중학교 보내 주지 않는다는 말에 가출

김진기는 기가 죽어 살아야 했다. 난데없이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큰 아버지 집에 기숙해야 했기 때문이다. 눈칫밥을 먹고 살다가 어느덧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내년이면 중학교에 진학할 나이였다. 그런데 큰 아버지가 상급학교에 진학시켜 주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아다녔다. 동네사람들은 쉬쉬했지만 소년 진기의 귀에도 소문이 실려 왔다. 그는 이후 검정고시 등 독학으로 학업을 마쳤다.

소년 진기는 가출해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어머니 집에는 식구들이 바글바글했다. 새아버지, 어머니, 누나 3명, 어머니가 낳은 동생 2명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생활력은 단연 돋보였다. 집안 가사노동을 하면서 베 짜는 일을 꾸준히 해 근방에까지 소문이 났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의 재산은 날로 늘어나 불과 5~6년만에 논 1천 평, 밭 1600평을 구입했다. 재산이 증식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었다.

사실 어머니는 과거 진기네 집에서도 농사와 살림을 도맡았었다. 아버지 김영호는  바깥일을 보러 자주 나다녔고, 농사를 포함한 집안일은 어머니가 거의 다했던 것이다. 과연 '어머니는 잠을 자기나 하는 걸까'하고 의구심이 날 정도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그 결과로 하꼬방 같은 집에서 살림을 시작해, 몇 년만에 반듯한 집을 장만하고 살림이 피게 한 것이다.

미꾸라지 잡아 상경

어머니의 살림은 해가 갈수록 폈지만 김진기의 마음은 펴지지 않았다. 다른 남매들과 어울리기도 힘들었고, 더군다나 '촌'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사촌 형이 "서울에 와서 세탁 일이나 배워라"고 해서, 1966년 상경했다. 처음에 간 곳은 서울 서대문구 정동의 달동네였다.

세탁 일을 배우면서 새로운 일도 도전해 보고 싶었다. 신문에 '성우 모집'이라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당시 서영춘, 송해가 운영했던 '성우음악학원'이었다. 몇 달 다녔지만, 잔심부름만 하다가 학원도 때려치웠다. 그러다가 기숙하던 사촌형님 집의 조카가 대학 입시에서 낙방했다. 형수는 자기 아들이 낙방한 분풀이를 김진기한테 퍼부었다. 사촌형 집에 더 머무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있는 부여로 낙향했다. 3개월 있으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다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차비가 필요했다. 부여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대천에 가서 파니 몇 천 원이 수중에 들어 왔다. 어머니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돈을 얻어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서대문구 신촌으로 가서 세탁소에 일자리를 구했다. 당시 월급이 1800원이었다.

세탁소 일을 하면서 호신술이나 배울 요량으로 합기도 도장에 들어갔다. 당시 단비가 1천 원이라 월급의 50% 넘게 차지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무역업을 하는 미국 사람 집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에게 창업비용으로 70만 원을 부탁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그는 쾌히 승낙하며, 며칠 후 돈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7만원이었다. 의사전달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돈 빌리는 입장에서 더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당시는 막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본격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할 때였다.

부여에 사는 어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쌀을 보내줬다.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일만 했다. 세탁소만 해서는 비전이 보일 것 같지 않아 새로운 일을 꾸준히 모색했다.

10전 11기
  
1968년 영등포구 구로에서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가 개최되어, 김진기는 구경을 갔다. 무역박람회가 끝난 후 구로에는 공단이 만들어졌고 의류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일본에서 원단을 수입해, 가공 수출했다. 김진기는 세탁소를 경영하면서 의류공장에 취직했다. 그는 주임에서 계장으로, 다시 부장으로 고속 승진을 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직접 차리면 돈을 많이 벌 텐데'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싱을 한 대 두 대 구입해, 공장을 차렸다. 하지만 차리는 것도 쉬웠지만, 망하는 것은 더 쉬웠다. 그는 의류공장이 망하면 세탁소에서 부지런히 돈을 벌어 다시 공장을 차렸다. 열 번을 망했다. 하지만 그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10전 11기의 '역전의 용사'였다.

현재 김진기는 모 섬유회사 협력업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서울의 소속 옷 매장에서 옷을 구입한 소비자들이 매장에 수선을 의뢰하면, 김진기가 운영하는 업체에 수선을 다시 맡기는 것이다. 그는 청바지 '리바이스' 수선도 위탁받아 일을 하고 있어,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직원도 15명이나 있어 사업이 작은 규모가 아니다.

어머니 장례 치르던 날

2013년 어머니 윤영희가 사망했다. 부여에서 생의 끝자락을 맞이한 어머니가 화장을 한 곳은 공주 상왕동 인근이었다. 어머니를 화장해 유골을 수습해 선산으로 가면서 아버지 김영호가 6.25때 학살당한 곳을 지나쳐서 가게 됐다. 이를 우연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증언을 마친 김진기(71, 서울시 관악구)는 "6.25 같은 민족의 비극이 재발되어서는 안 되죠. 젊은이들이 전쟁의 참혹함을 알았으면 합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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