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가장의 어학연수, 자꾸 집생각이 났다

[50대 백수의 어학연수 ⑥] 딸에게 편지를 쓰다

등록 2018.11.27 10:17수정 2018.11.2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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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후반 나이에 2018년 4월부터 7월까지 필리핀 바기오에서 어학 연수한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말

필리핀에 대한 나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언론이 보도하는 필리핀은 치안이 불안한 국가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바기오에서 생활해 보니 많은 것이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


경찰관이나 경비원을 제외하고 총기 소지자를 만나지 못했으며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분쟁도 없었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내가 가는 세탁소, 가게, 빵집, 찻집 주인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베이커리 나의 단골 빵집(?) ⓒ 신한범

  
수강신청

어학원에서는 매달 셋째 주에 월례 고사를 치르고 새로운 수강신청이 이루어진다. 게시판에 시간표와 강사 이름이 부착되면 수강신청 용지에 과목과 시간 그리고 강사 이름을 기재하여 제출한다.

인기 있는 교사의 강좌는 빨리 마감이 되기 때문에 눈치 싸움이 치열하다. 30여 년 전 대학 시절도 아닌데, 50대 후반에 젊은 친구들 틈에 껴서 줄을 서서 수강신청을 하자니 묘한 마음이 들었다.
 

수강신청 수강신청하는 모습... ⓒ 신한범

  
여섯 과목 중 절반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우리 세대는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라서 의사 표현이 서툴다. 나의 주관을 내세우기보다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며 자랐기에. 새롭게 시작한 과목 중에 '쓰기' 과목이 있었다.

수업은 에세이를 읽고 주제를 찾아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제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의사 표현도 제대로 되지 않는데 나의 의견을 정리하여 제출하라니. 걸음마를 배우는 나에게 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격.

선배에게 이야기하니 교사와 상의하면 교재를 바꿀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나의 머릿속에는 한번 정해진 교재와 수업은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교사에게 어렵게 말을 꺼내 "내가 필요한 것은 말하고 듣는 것인데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교재와 교수법은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라고 하니 교사도 공감하였다.
 

교재 연수원에서 자체 제작한 교재 ⓒ 신한범

   

행정실 교재를 교환을 할 때 까다로웠떤 행정실 ⓒ 신한범

  
새롭게 교재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교재를 받아야 한다. 교재 한 권 바꾸는데 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유서를 작성하여 3명의 직원에게 사인을 받아야 한다.


매번 같은 질문에 답을 하자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더구나 나보다 교사가 좌불안석.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학생 수준에 맞는 교재를 선택한 것인데. 필리핀도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갑'인가 보다.

딸과 편지를...

바기오 생활이 보름 정도 지나자 자꾸만 집 생각이 났다. 직장에 다니는 아내와 큰딸, 취업 준비 중인 작은딸까지. 하루 일과가 끝나고 숙소에 돌아오면 뭔가 빠진 듯이 허전하였다.

함께 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떨어져 살다 보니 가족의 소중함이 느껴졌다. 더구나 인생의 중요한 고비를 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작은딸이 눈에 아련하였다. 마음을 담아 딸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딸!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작은딸에게 글로 마음을 전한다. 잘 지내고 있지! 내가 한국을 떠났을 때 초승달이었는데 밤하늘을 바라보니 보름달이 되었구나.

이곳 생활이 3주째 접어들고 있구나. 어학연수를 하면 쉽게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실제 상황에 부딪히니 모든 것이 난관이고 어려움뿐이구나. 들리지 않는 귀, 열리지 않는 입 그리고 구분할 수 없는 발음까지. 열심히 영어 단어를 외고 과제를 하고 있지만 얼마나 영어 실력이 늘지 나 자신도 궁금하구나.

인터넷을 검색하니 교육부에서 학생 인구의 감소로 교사 선발 인원을 점차적으로 축소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조건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간절한 마음으로 대처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아버지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 작년에는 공부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았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3월, "영어가 정말 적성에 맞지 않으면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했던 나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니? 영어 교육을 전공했지만 꼭 교사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너의 관심과 적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판단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세상 잣대가 아닌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겠지.

작은딸이 보내준 빛바랜 가족사진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해지는구나. 잘 자라!

 

가족 사진 20여 년 전 가족사진. 작은딸이 보내 줌. ⓒ 신한범

 
딸에게 답장이 왔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

어버이날이니 제가 먼저 편지를 드려야 했는데 아빠가 먼저 편지를 보내 주셔서 죄송스러우면서도 마음에 감동이 밀려와요.

집은 걱정 마세요. 당연히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지지만 엄마와 언니 모두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도, 주말 저녁에 거실에서 오순도순 대화를 했던 예전 모습이 그리워요.

저도 무심하고 무뚝뚝한 면이 있어 표현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하는 영어에 도전장을 내민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아빠의 말처럼 원하는 것을 모두 쉽게 얻을 수는 없겠죠. 영어를 손에서 놓지 않지 않고 꾸준히 언젠가는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아빠가 저희에게 보여주시는 열정, 행동 그리고 꾸준함을 본받도록 노력할게요. 필리핀에서의 3달은 정말 아빠 자신을 위한 시간인 것 같아요. 영어도 목표 중에 하나지만 인생의 새로운 길로 접어들기 전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아빠! 집 걱정은 마시고 영어 공부, 마음공부 열심히 하고 오세요.
사랑합니다. 파이팅!
덧붙이는 글 11월 24일에 올해 임용고시 시험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시험에 응시한 모든 수험생들이 자신의 노력만큼의 결과 있었으면 합니다.
#필리핀 #바기오 #어학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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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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