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살인자의 말... "평생 이렇게 살까 봐"

[주장] 연민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재현될 것 같은 우려... 나는 왜 찜찜했나

등록 2018.12.03 16:02수정 2018.12.0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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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전 서울 강서구의 한 PC방 앞 흉기 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아르바이트생을 추모하는 공간에 추모하는 국화가 놓여 있다. 지난 14일 서비스가 불친절하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생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김성수 씨는 이날 공주 치료감호소로 옮겨져 길게는 한 달간 정신감정을 받는다. 2018.10.22 ⓒ 연합뉴스

 
얼마 전 뉴스에 오르내린 강서구 피시방 살인 사건 피의자가 검찰에서 나와 구치소로 송치되는 장면이 방송되고 있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사건이란 자극적 제목이 넘쳐나는 일상에서 분노와 성토로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까, 딱히 눈여겨보고 싶지 않았다.

얼굴 공개의 원칙이 타당한지 모르겠으나 피의자 김아무개의 얼굴은 공개되었다. 초췌했고 안경 너머 시선은 세상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겠다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호송차에 실리기 전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에 '죄송하다, 죽을죄를 지었다'를 연발하는 여느 피의자와 달리 김아무개는 그날 일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심경을 담담하게 구술했다. 의외였다.

그가 불러온 엄청난 파국에 분노와 경악, 단죄의 시선이 당연했으나 몇 분간 그의 짧은 구술에 마음이 심란했다. 그의 심경엔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다. 단순히 그날 그 시각의 억울함만은 아니었다. 무시당했다는 불쾌감이 켜켜이 쌓인 억울함에 더해져, '평생 이렇게 살까 봐' 순간의 격분이 비극을 낳았다.

그날 일에 대한 그의 기억과 발언이 사실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유족들의 분노를 일으킬 만한 진술도 있었고 감형을 계산한 거짓 발언이라는 의혹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평생 이렇게 살까 봐' 라는 구술이었다.

김아무개에 대한 연민을 내비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 억울함이 극단적 행동을 낳는 인과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소소한 다툼으로 끝나야 할 상황을 참극으로 몰아간 그의 울분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디선가 재현될 것 같은 우려인 걸까. 소확행조차 불가능하게 하고, 헤어나기 힘든 열패감이 곳곳에 번져가는 사회에 대한 답답함인 걸까. '평생 이렇게 살까봐' 라는 그의 말을 쉬이 지우지 못했다.

이 사건을 두고 오가는 주변의 말들은 '끔찍하고 잔인해. 그런 일 당할까 봐 두려워' 였다. 매스컴은 동생이 공범인지, 심신미약 상태의 범행이었는지, 우발적 살인인지 계획적 살인인지 온통 집중하고 있었다. 온라인 댓글에는 가족까지 신상을 털어야 한다, 그런 괴물을 키운 부모도 괴물이다, 김아무개는 감히 억울해 할 자격도 없다는 성토가 넘쳐났다. 그의 관상을 두고 전형적인 범죄인 얼굴로 단정짓는 사람조차 있었다.

이런 참극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하면서 그 방법의 끝은 보다 강력한 처벌로 수렴되고 있었다. 심신미약에 의한 감형 제도를 폐지하자는 청원도 이어졌다. 이제 모든 조사가 끝았으니 김아무개를 최대한 무거운 양형으로 감옥에 격리하고 다시 사회의 안전망을 믿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럼에도 미진한 숙제가 남은 듯 찜찜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김아무개를 다루었다. 단순 뉴스 보도가 아닌 한 시간 분량의 심층 취재였다. 내심 '평생 이렇게 살까 봐' 라는 그 말의 단서를 방송 프로그램에서 찾고 싶었다.

왜 그는 피해자와 피의자 모두에게 최선인 길을 내팽개치고 둘 모두에게 최악인 길을 선택한 것인지, 눈덩이처럼 불어난 적대감을 제어할 방도는 진정 없었던 것인지 헤아려 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인과 범죄 전문가를 동원한 프로그램은 그를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를 단죄하고 이를 확인 사살하는 증언, 분석으로 진행되었다.

시사 프로그램의 심층 취재 의도가 사건을 자극적으로 되새김질하여 공분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 안전망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면 좋지 않았을까.

문득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떠올랐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오롯이 남겨진 네 남매가 저희들끼리 살아가다 막내가 죽자 암매장한 사건.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렸던 이 사건을 두고 세상은 온통 비정한 엄마와 불행한 아이들의 잔혹사라고만 했다. 하지만 히로카즈 감독은 다른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그 엄마가 아이들에게 늘 비정하기만 했을까. 엄마와 행복한 기억이 단 한 순간도 없었을까. 방치된 채 살아간 아이들은 늘 불행하기만 했던 걸까. 경찰에 인도된 남매들을 취재했을 때 첫째 아이가 배다른 동생들을 책임감 있게 돌보았고 동생들에게 다정한 오빠이자 형이었다는 사실을 포착하며 던진 질문이었다.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엄마이기만 했다면 첫째가 동생들을 따뜻하게 보살필 수 없었으리라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이런 섬세한 시선은 잔인하다, 비정하다, 비도덕적이다, 몇 가지 단정적 비난을 쏟아내고 잊혔을 사건을 다시 불러내어 영화 <아무도 모른다>로 태어났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사회적 비극에 대해 몇몇 비난의 언어로 판단하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빈곤하고 안일한 것인지 돌아보았을 것이다.

'평생 이렇게 살까 봐.' 이 말은 김아무개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들려 오지 않았다. 익명의 다수 목소리로 들려왔고 짧은 한마디에 응축된 열패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살아가면서 좌절과 열패감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개인적 노력으로 그 순간을 벗어나 다시 삶에 응할 수 있다면 답답한 불운의 기운이 열린 창으로 환기되고 순환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조심스레 묻고 싶다. 우리는 얼마나 열린 창을 가진 사회에 살고 있는가, 라고.

과도하게 불필요한 열등감을 강요하는 사회, 꼭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그물에 걸려 자존감을 잃고, 열패감에 고립되는 분위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럭저럭 괜찮은 사회적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은 나 역시도 비교의 시선, 차별과 배제의 시선을 은연중 던지며 누군가의 자존감에 상처를 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가장 비극적인 형태의 상실은 안전의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힘의 상실이다"라는 블로흐의 말을 상기한다. 이런 사회적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안간힘을 모아 상상하고 싶다. 그 상상의 힘 속에서 '평생 이렇게 살까 봐'라는 자조의 언어가 '평생 이렇게 살아도' 자존을 잃지 않는 언어가 되어 버티어 주길 간절히 기도한다.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 #엄중한 사회적 처벌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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