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로 유라시아 건넌 강명구 "최고의 한류스타는 김정은"

[인터뷰] 16개국 횡단했지만 북한 통과 꿈은 못 이뤄... "내년에 다시 시도해볼 것"

등록 2018.12.06 14:00수정 2018.12.06 14:00
1
7,000

11월 30일, 유라시아평화마라톤의 마지막 구간을 남겨놓은 날의 강명구 ⓒ 이안수


  
그가 오늘(11월 30일), 서부전선 아랫마을 헤이리에 닿았습니다. 14개월 동안 16개국 1만 4천 500km의 유라시아를 오직 두 다리의 육신으로 달려 도착한 것입니다.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입니다.

지난해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덴 하그 Den Haag) 이준 열사 기념관(Yi Jun Peace Museum)을 출발했습니다.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이준 열사가 순국하신 그 장소를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더 정확히는 하루 전날 그러니까 8월 31일 유럽 대륙의 서쪽 땅끝인 헤이그 해변에서 출발해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2017년 8월 31일, 9월 1일의 이준열사기념관에서의 장정의 출발을 앞두고 홀로 유럽대륙 땅끝의 해변에 섰다. ⓒ 강명구

  
당시 헤이리에는 밤마다 대남확성기방송이 웅웅거렸습니다. 2016년 1월 북의 4차 핵실험에 따른 대응으로 대북확성기방송이 재개되어 남북 간의 상호 확성기방송의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매일 귓전을 울리는 성능 좋은 확성기에서 내뱉는 프로프간다방송소리는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긴장의 땅인가를 상기시켜주었지요.

그런 엄혹한 시간이 계속되는 중에도 강명구는 단신으로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통일의 기운을 모으기 위해 유라시아를 뛰어서 횡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권력도 갖지 못한 우리와 같은 갑남을녀의 한 사람입니다. 일제의 침탈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를 방문하는 것이 전부였던 그때처럼, 강명구는 오직 자신의 육신으로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것이 남북의 평화통일만이 답이라는 것을 환기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풀코스 마라톤 거리인 42km를 달렸습니다. 네덜란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를 따르는 것은 스스로 밀며 뛰어야 하는 텐트와 옷 등 사물을 담은 75kg 상당의 유모차뿐이었습니다.
 

터키에서 후원자들의 차량지원을 받기 전까지는 사물을 담은 유모차를 밀며 달렸다. ⓒ 강명구

 
그의 고투가 알려지자 후원자들이 생겼습니다. 터키에서부터는 그의 옆에 짐을 받아 실은 자동차가 뒤따랐습니다. 다시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중국으로 매일 동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북정상이 마주하는 일이, 그리고 북미정상이 마주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휴전에서 종전,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 완전한 비핵화 협상 국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올해 4월 말부터 헤이리에도 더 이상 대남확성기방송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북한을 달려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고자 했던 그의 목표는 단둥(丹東)에서 막혔습니다.

40여 일 간 입북허가를 기다렸지만 결국 응답이 없었습니다. 중국비자는 만료가 다가오고 메아리 없는 요청에 대한 응답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강명구는 결국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이준열사가 일제의 눈을 피해 헤이그행의 출발지로 삼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11월 15일 동해항으로 입국한 그는 다시 두 다리로 백두대간을 넘었습니다.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 연천을 지나 11월 31일 파주에 닿았고 12월 1일 임진각 망배단에서의 평화문화제 '불어라 평화의 바람'이라는 이름의 환영행사로 미완의 유라시아 횡단을 마쳤습니다.

11월 31일, 임진각까지의 마지막 구간을 남겨둔 마지막날, 헤이리에서 달리는 것만으로 평화와 통일을 향한 변화와 행동을 이끌어낸 평화마라토너 강명구님을 만났습니다.

'One Korea'를 위해 달린 1만 4500km
 

여정의 마지막을 하루 앞두고 14개월간의 1만4천500km를 회상하는 강명구마라토너 ⓒ 이안수

  
- 2017년 9월 1일 오전 9시가 이 평화마라톤의 처음 출발이신가요?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그 전날 저 혼자 유럽대륙의 가장 서쪽 바다에서 이준 열사 기념관까지 뛰어왔어요."

- 9월 1일이어야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특별하지는 않지만 고려한 것은 있습니다. 제가 제일 두려웠던 것은 겨울이었거든요. 겨울을 어디에서 맞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9월에 출발해서 겨울을 위도상 아래인 터키 정도에서 맞으면 온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그것이 절묘했던 것 같아요. 불가리아를 벗어나 터키에 들어오고 이틀 뒤 불가리아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겨울이 제 뒤를 따라온 것입니다. 저를 앞질러갔더라면 혼났을 겁니다. 

제가 원래 계획한 루트는 터키 중부를 가로질러 옛 실크로드인 에르주룸(Erzurum)을 지나 이란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탄불 사람들이 지금 그곳으로 가면 얼어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곳은 3~4천m 높이의 산이 즐비한데 들어가지도 못할 뿐더러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안은 흑해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어요. 카스피해까지 에르주룸의 북쪽 루트는 지중해성기후라 온화하다는 거예요. 그분들의 말이 옳았어요. 그 루트는 추워봐야 영하 1, 2도 정도였습니다. 뛰어야 할 거리는 조금 늘어났지만 날씨의 위협은 절묘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 출발 후 날짜를 세면서 뛰신 거지요? 내일 종착지를 앞둔 오늘까지 총 며칠이 걸린 거지요?
"사실 오늘까지는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압록강 철교까지가 총 401일 걸렸어요."

- 단둥의 압록강까지 달린 거리가 총 몇 km였습니까?
"약 1만 4300km 정도였습니다."
 

강명구평화마라토너가 달려온 유라시아평화마라톤 루트 ⓒ 강명구

  
- 그 철교를 건너면 북한의 신의주일 텐데 그때까지도 북한의 초청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전에 입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오셨나요?
"6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노력을 해왔습니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북한 초청장이 나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어요. 북한 통과는 제가 출발지부터 공표한 일이었는데 실제적인 진행은 비밀로 다루어져야 된다는 의견이었어요. 지나놓고 보니 그것이 옳았는가는 의문입니다. 공개적으로 집단의 지성과 지혜를 모아서 진행했더라면 혹시 어떤 결과가 있었을지...

그 창구는 남측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를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북한과의 접촉을 원하는 수천, 수만 건일지도 모르는 것의 하나로 제 건도 들어가 있었던 거지요. 특별케이스로 다루어지길 원했지만 전달이 되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북경을 떠나 선양에 도착했을 때도 아무 소식이 없어서 선양에서 북한대사관에 찾아갔어요. 보초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잠시 뒤에 다시 오라 했습니다.

다시 방문했더니 안으로 안내해서 직원을 만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예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내가 남북통일을 위해서 1만 4천 km, 16개국을 통과해서 여기까지 뛰어왔는데 우리나라를 왜 못 가느냐고 따지듯 말했습니다. 내 눈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가득 담겼어요. 그는 지시가 내려온 게 없다고 말했어요. 그럼 당신이 역으로 보고는 할 수 있지 않느냐, 보고 좀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알았다고 말했어요. 

며칠 후 베이징 민화협에서 제 인적 조회가 온 거예요. 조회가 오면 거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지요. 또한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송영길 의원께서 북한통과 건에 대해 대정부 질문을 했었고 통일부 장관은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하고 접촉하고 있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민화협 차원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접촉을 하고 있었던 것은 맞아요."

- 사실 강 선생님이 달리는 중에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호전이 있어서 북한 통과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거든요?
"오늘 오전에도 남북철도공동조사단 열차가 북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지금 정부 차원의 교류는 활발하지만, 민간교류가 얼마나 일어나는지는 의문입니다. 제가 출발할 때는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상황이라 제가 단둥까지만 가면 북한은 나를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길을 열어줄 것이라 확신했어요.

그런데 남북관계가 호전되니까 저의 활용가치를 못 느끼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가 이렇듯 호전되면 그 마무리에 축제가 필요하고 그 축제에 제가 활용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제게 문을 연다는 것은 평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종주하는 일이므로 북쪽에서도 부담이 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또한 열어주어도 미국측 결정이 작용하는 판문점의 통과가 가능할지도 의문이기도 했겠지요."

(대화 중에 지원팀의 식사 메뉴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김치찌개 얘기가 나왔습니다. 강 선생님이 그 말에 개입했습니다. "김치찌개는 잊어주세요. 제게 김치찌개는 구황식품이에요. 사막이 아닌 이곳에는 먹을 것이 다양하잖아요. 저는 갈비가 먹고 싶어요. 아니면 회도 있고요.")
 

그는 김치찌개보다 갈비와 회를 원했다. ⓒ 이안수

  
- 단둥에서 며칠이나 지체하셨나요?
"40일정도요."

- 입국허가를 더 기다리지 않은 것은?
"중국비자가 만료되었기 때문이에요. 사실 저는 그렇더라도 러시아 국경으로 이동해 블라디보스토그를 오가면서 입북허가를 기다려보려고도 했지만 그것이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기다리는 동안 피켓이라도 들고 시위를 할 수라도 있다면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공산주의 국가라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숙소에 머물러 있기보다 귀국해서 이렇게 평화통일운동을 이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 원래는 종착지가 임진각이 아니라 광화문광장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북경에서는 광화문이 아니라 부산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신의주를 통해 들어가 북한을 종주한다면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한반도를 종주하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향후 미완의 구간을 완성하는 노력을 계속해나가실 거지요?
"그래야지요. 2018년 4월 27일 열린 남북정상회담 1주년에 맞추어 다시 시도를 해볼 예정입니다. 그때가 되면 남북문제가 되었든, 북미문제가 되었든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에 광화문이 아닌 임진각에서 이번 여정을 일단락 짓는 것은 아직 이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이 광화문으로 들어가면 유라시아평화마라톤이 끝났다고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는 염려였어요."

(강 선생님은 대화 중에도 바닥에 앉는 것보다 계단에 앉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혹시 긴 마라톤의 후유증인가 싶어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전적 영향으로 양반다리로 앉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는 바닥에 앉기보다 계단을 선호했다. ⓒ 이안수

  
- 초반에는 유모차를 밀면서 달리셨고 나중에는 선생님을 돕는 차량이 붙었지요?
"터키 중반까지 유모차를 밀고 왔습니다. 그 후에는 고맙게도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무척 어렵더라고요. 세금을 5백만 원 정도를 물어야 하고 국제운전면허증이 아닌, 중국면허증이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중국으로 그 차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 여정 중에 페이스북에 글을 쓰셨는데 글솜씨도 뛰어나더군요?
"대체로 달릴 때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몇 문장 정도 생각이 나면 뛰다가 메모를 해놓습니다. 그것에 살을 붙이는 정도입니다."

- 평균 매일 42km 정도를 달리셨는데 시간으로는 어느 정도 걸리나요?
"7~8시간 정도로 천천히 뜁니다."

- 차량이 뒤따르지 않았던 터키까지는 숙소 이동이 불가능하셨을 텐데...
"지금은 그날 뛸 구간이 끝나면 숙소까지 차량 이동이 가능했지만 그전에는 숙소가 나올 때까지 뛰어야 했어요. 그래서 어떤 날은 60~70km를 넘게 뛰기도 했습니다."

- (울트라마라토너 마숙현)미국횡단하실 때는 밤새 뛰기도 했지요?
"새벽까지 뛰기도 했지요. 숙소가 없는 구간에서는..."
 

강명구의 다리를 물었던 캉갈 ⓒ 강명구

 
- 여정 중에 몸이 불편했던 적은 없으세요?
"세르비아에서 불가리아로 넘어오기 전에 근육통 때문에 고생했고 터키에서는 개에게 물린 적이 있어요. 캉갈(Kangal)이라는 터키 원산의 목양견이에요. 세르비아에 들어서면서부터 카자흐스탄까지는 대부분 대형견들이었어요. 중국에 들어가니까 개들도 작아지더군요.

세르비아는 전쟁이 끝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족보 있는 개들이 즐비하게 버려졌어요. 개들이 야생화되면 큰놈들만 살아남고 작은 녀석들은 도태된대요. 캉갈이 물은 것은 길에서 자다가 내가 지나가니까 내 곁으로 온 거예요. 친근감의 표시로 손을 내밀었더니 내 다리를 물어버린 거예요. 살짝 물어서 다행이지 제대로 물었으면 살점이 떨어졌을 거예요. 캉갈은 덩치가 커서 늑대를 목을 물어서가 아니라 덮쳐서 잡는다는군요. 무리 지어있는 캉갈을 만나면 그들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에워싸요. 아주 무섭습니다."
 

달리기를 중단해야 할 만큼의 큰 사고는 없었다. ⓒ 강명구

  
- 가장 무서웠던 것이 사람이 아니고 개였단 말입니까?
"맞아요. 어떤 개들은 몇십 km까지도 쫒아와요. 돌을 던져 쫓으려고 해도 도망을 안가요."

- 특별하게 선생님을 반겼던 나라가 있었나요?
"거의 모든 나라가 그랬어요. 독일과 중국 사람들이 무뚝뚝했지만 모든 나라에서 차를 대접하면서 친구 먹자고 하곤 했어요."

- 선생님의 티셔츠나 유모차의 배너 설명을 보고 더 반겼던 걸가요?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낯선 사람을 모두 반겨요. 유목인들에게 나그네에게 차 한 잔 대접하는 것은 전통이었고 저도 하루에 몇 차례나 그런 대접을 받았어요. 제가 뛰는 목적을 설명하면 더욱 반가워했고요. 어떤 곳에서는 호텔비를 받지 않거나 저녁 스테이크를 마음대로 먹도록하기도 하고요."

- 선생님을 취재하고자 했던 경우도 많았을 것 같은데...
"참 많았지요. 조지아에서는 아침 생방송에 출연하기도 하고."

- 취재진은 주로 무엇을 물어보던가요?
"최고의 한류스타는 김정은이더라고요. 김정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넘버투가 방탄소년단이에요. 제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면 김정은에 대해 물어보아요."

- 김정은의 어떤 점에 궁금해하던가요?
"사실은 김정은에 대한 무엇을 물어보기보다 자기들이 김정은을 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어요. 뚱뚱하다거나 미사일에 대해... 반면 문재인에 대해서 물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BTS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은 주로 젊은 사람들이었고 이란에서는 주몽의 송일국이 넘버원이었어요. 대장금의 이영애보다 더 인기가 있었어요. 거의 모든 국민이 주몽을 시청한 듯싶어요. 인기 있는 드라마는 시청률이 90%를 넘어간답니다."

- 2009년에 제가 몽골을 방문했을 당시에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이 몽골 지상파 방송에서 시청률 80%를 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슬람문화권에서는 술 먹는 문화가 없으니 저녁 먹고 나면 거의 모든 국민이 TV 앞에 몰려 앉습니다. 그것이 또한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요인 같고요. 그들이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표시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드라마 속 조선 여인들이 내외하기 위해 치마를 머리에 동여매고 외출하는 모습을 자신들의 히잡을 착용하는 문화와 통일 시 하더라고요. 가족적이고 부모를 섬기는 전통도 우리와 같았어요."

- 민간인이 아니라 지방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선생님을 반긴 경우도 있나요?
"이란의 바볼(Babol)을 지나갈 때였어요. 시청에 한 번 들려주길 원했어요. 몇 시가 좋으냐고 물으니 9시에 업무를 시작한다고 그때가 좋겠다는 거예요. 저는 7시에 출발해서 불가능하다고 했더니 그럼 7시에 만나자는 겁니다. 7시에 갔더니 시장과 공무원들이 일렬로 도열해 저를 맞아주는 겁니다. 그 도시의 상징이 오렌지인데 평화를 뜻한대요. 평화를 위해 달리는 당신이 우리 도시를 지나가줘서 너무 고맙다며 신문 기사와 기념패를 주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는 시민 500여 명과 함께 시내 번화가를 달렸어요. 제가 평화를 선창하면 통일을 후창하면서... 도전정신에 대한 강의까지 요청해서 타슈켄트의 2곳은 제가, 편도 4시간 자동차길인 사마르칸트에서의 강의는 저를 동행하신 송인엽 교수님이 대신 다녀오셨어요."

-외국을 다녀보면 남한과 북한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제가 한국 사람임을 알면 대개는 South Korea냐 North Korea냐고 물어봅니다. 그럼 제가 좀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하지요. 나는 South Netherlands냐 North Netherlands냐라고 묻지 않고 East Germany냐 West Germany냐라고 묻지않는데 저희들은 그게 왜 궁금하냐고 싸우듯이 되묻곤 했어요. 그러면 그들은 내가 One Korea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채곤 했습니다."
 

유라시아를 횡단해오고도 북한을 종주하지 못한 허망함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은 언제나 슬픔과 허망함에서 나옵니다.“ ⓒ 강명구

 
- 도난을 당한 경우는 없었나요?
"중국에서 여권과 돈을 모두 잊어버린 적이 있어요. 열흘 뒤에 여권은 다시 돌아왔어요. 그때는 이미 새로 신청해서 새 여권을 받은 뒤였지만..."

- 내일 마지막 일정은?
"마정초등학교에서 임진각까지 마지막 구간을 참석자들과 함께 평화의 행진을 하고 망배단에서 환영행사와 DMZ생태관광지원센터에서의 축하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는 북한 구간을 달리는 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또한 새 세상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 평화마라톤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그는 16개국 유라시아를 횡단해 오고도 북한을 종주하지 못한 허망함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은 언제나 슬픔과 허망함에서 나옵니다."

그의 결기는 오히려 굳어진 것 같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실립니다.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7,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대학을 마치고 '월간여행’의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비디오라이프(편집차장)’, '월간 뮤직라이프(편집부장)’, '디자인저널(편집국장)’등 20여 년 동안 주로 잡지를 위해 일했다. 새물결사의 편집국장으로 7년쯤 일하던 중, 미국 대학의 유학생으로 변신했다. 귀국후 세계로 부터 오는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아티스트레지던스'모티프원'를 경영하며 프리랜서 작가와 사진가 그리고 여행가로서 헤이리에서의 삶을 즐기고 있으며, ‘헤이리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문화와 여행에 관한 다양한 관심사를 나누고 싶다.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AD

AD

인기기사

  1. 1 벌거벗은 남자들 사이를 휙휙, 저 아줌마 누구야?
  2. 2 20년 함께 산 아내를 무연고사망자로 보낸 까닭
  3. 3 4인가족 한 달 식비가 45만원, 김치만 먹냐고요?
  4. 4 방탄소년단이 춘 '삼고무' 누구의 것인가
  5. 5 임기 마지막 날, 웃다가 운 김성태 "여당 나 그리워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