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게이'라던 아버지의 말, 너무 행복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싸웁니다②] 박진영 목사

등록 2018.12.17 16:42수정 2018.12.1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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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기독교단의 성소수자 혐오는 학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올해 장로신학대학교(아래 장신대)는 신학대 최초로 신입생들에게 '반동성애' 서약을 받기로 결정했다.  장신대에서는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학교에서 무지개깃발(성소수자를 상징하는 여섯 색의 무지개 깃발)을 들었다는 이유로 해당 학생들을 불러 조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성소수자 교회인 로뎀나무그늘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박진영 목사 역시 장신대에서 공부했다. 그는 로뎀나무그늘교회에서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그 결과물 중 하나로 '그리스도인의 위한 성소수자 바로알기'라는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 전, 예술가로 활동했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선언을 받는 '나는 앨라이입니다' 캠페인과 종교에 기반한 혐오에 맞서기 위해 '종교인 앨라이'를 만나 인터뷰를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번에는 누구보다 신학대가 혐오로 물드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활동을 펼쳐왔으며 너무나 흥미로운 삶의 경로를 걸어오신 박진영 목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한국 기독교, 변할 수밖에 없다"

- 우선 인터뷰를 읽으실 분들에게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목사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자유롭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여전히 사람들이 저를 '목사'라고 부르는게 어색해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쳐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의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뭔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어려서부터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이래야 해' 같은 고정된 성역할 등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각자가 가진 무수한 역할과 정체성은 단지 꼬리표일 뿐 본질은 아니잖아요. 뿐만 아니라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등 사회적 위치에 따른 정체성이 저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나는 목사가 아니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의식을 동시에 가질 수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거부감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내게 붙여진 꼬리표로 나와 다른 사람을 제한하지 않고, 더 많은 가능성으로 소통하기 원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조직적인 방해나 성소수자에 대한 가짜뉴스 제작 등 보수 기독교계의 혐오 행위가 극심했던 한 해였습니다. 종교인으로서 박진영 목사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보셨나요?
"다양한 감정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아요.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책임감이 들기도 하고, 무력감이 들기도 하죠. 저 한 사람은 너무 힘이 없고, 한국 기독교는 너무 거대한 권력이잖아요. 

그러나 변화는 우리가 상상했던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니 지금 이런 일을 겪는다고 좌절할건 아닌 것 같아요. 태풍이 오면 피해도 있지만, 공기의 위아래를 뒤집는 순환작용으로 균형을 가져오고 자연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 주잖아요. 지금 우리 시대가 그런 과정을 겪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랫동안 가라앉아 잠잠했던 문제들을 다 수면 위로 올라오게 만들어주는 거라 생각해요."

- 종교인으로서 책임감을 많이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종교가 가지고 있는 모순, 즉 사랑을 말하면서 뿌리 깊은 배타성과 이기심을 표출하는 모습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잖아요. 그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변화를 원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종교인이라면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런 자기성찰적 질문을 계속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결국에 한국 기독교가 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혐오를 부추기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것이에요. 하지만 그것으로 완전히 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죠. '우리가 믿는 종교는 사랑의 종교인데, 왜 우리는 이런 모순된 행동을 취하는가' 이 물음을 끝까지 묻고 또 물어서 그 모순을 극복해냈으면 좋겠어요. 아마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도 있을 거고, 희생자도 나올거라 예상해요. 그때마다 외롭지 않게 함께 싸워야겠지요."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박진영 목사님 ⓒ 비온뒤무지개재단

  
- 그런데 올해 장신대에서 신입생들에게 반동성애 서약을 받기로 했고 성소수자 당사자거나 혹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은 학습권을 박탈한다는 취지의 방침을 내렸습니다. 아무래도 목사님께서 나오신 학교여서 질문을 드리고 싶었어요. 신학교이지만 또 대학교이기도 한데 도무지 왜 이런 사태까지 벌어졌을까요?
"한국 기독교는 특권을 많이 가진 집단이다 보니 더 정치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단순히 신앙적인 입장에서만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이해관계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아요. 그만큼 잃을 게 많다는 거죠. 더욱이 한국의 장로교는 개신교 중에서 가장 많은 신도 수를 가졌잖아요. 보수적인 결정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게 너무 마음 아파요. 양심적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사람들조차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어요. 신학교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교회에 의존을 많이 하게 되거든요. 그러다보니 학교여도 어떤 논란이 되는 사안이나 이슈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중립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교단의 힘 있는 교회가 원하는 관점에서 다룰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어요. 그 구조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자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결정에 무력할 수밖에 없죠. 다른 의견이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것은 그 공동체가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 올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사실 이전에는 그런 지침이 없었다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목사님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 장신대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이슈 자체가 표면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한편으로는 장신대에서는 '동성애는 언급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목회적 차원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공유되기도 했다고 선배님들께 듣기도 했어요. 

한국 교회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가 성소수자에 대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혐오를 표출하기 전이었으니 당연히 학교에서도 관심 밖이었고, 제가 처음 성소수자 목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직접적인 혐오나 차별보다는 격려해주는 분위기가 훨씬 컸던 것 같아요."
  
- 장신대가 작은 교육기관도 아니고, 그래서 이런 지침에 영향을 받을 사람들도 광범위해서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우려도 드는데요, 목사님께서는 전망을 어떻게 보시나요?  
"이런 일이 있으면 항상 그런 것 같아요. 전진이 있으면 후퇴가 있고, 후퇴가 있으면 전진이 있죠. 신학교가 인권을 유린하는 방식으로 후퇴를 하니까 그동안 침묵했던 분들이 침묵을 깨고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한국 기독교나 신학교가 이렇게 성소수자 혐오를 부추기는 것은 성소수자 인권에 더욱 이목을 집중하게 해주지요. 그동안 교계의 분위기는 '어차피 변할 건데 뭐, 괜히 지금 싸우며 힘쓸 필요 없지'라는 입장이 다수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장신대의 결정은 차별을 공식적으로 명시하는 것이잖아요.

이런 지경까지 오니까 '이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내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먼저 공부하려는 모임이 생기기도 하고, 배우려고 먼저 연락을 주시는 분들도 계셔요. 저는 이런 힘든 상황들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거라고 믿어요."
  
- 이런 일들이 신학대생뿐만 아니라 목회자 개인에게도 발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진영 목사님께서도 작년에 여전도연합선교대회에서 성소수자를 주제로 한 강의에 강사로 초빙이 되셨다가 돌연 취소 통보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 마음이 어떠셨나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라 그렇게 화가 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애초에 여전도회에서 저를 불렀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거든요. 매우 보수적인 조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서 뭔가 공정한 배움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믿겨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여전도회 안에 그런 기획을 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너무 반갑고 감사했지요.

조직이 보수적이라고 해서 그 안에 속해있는 사람이 다 그렇다는 편견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는 것 같아요. 강연이 취소된 것에 대해서 저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는데, 오히려 주변 분들이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기 해주셔서 좀 놀랐어요. 그만큼 한국교회와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서로를 잘 모르고 온도차가 크다는 점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 저라면 억울한 마음이 많이 들었을 텐데 그러시지 않으셨다니 다행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요. 

"외부의 탄압이나 제가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의 어떤 차별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아요. 내 자신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고, 그 선택이 외부의 시선이나 의견에 좌우되기 보다는 내면의 양심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누가 그것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냥 제 길을 계속 가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거절당하는 일이 저 혼자만 겪는 일도 아니잖아요. 아무리 훌륭한 학자라도, 뛰어난 사람이라도 종종 선한 일을 하다가 오해 받거나 차별을 당하는 일이 많더라구요."
  
- 목사님은 어떤 계기로 종교인이 되셨나요?  
"저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청소년기에 유난히 종교적이었던 것 같아요. 주변에 저에게 종교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들이 많았고, 성경공부에 관심도 많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의 가치를 크게 생각했었어요. 평소 신학교를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시를 준비했던 건 아니고, 미술이나 경영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미술은 형편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정적으로 대학을 정할 때 마침 장신대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던 사촌오빠 덕분에 장신대를 알게 되었어요.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선교사가 되겠다고 설득했고, 부모님 입장에서도 안전한 기숙사가 있는 장신대라면 괜찮을 거라 믿으셨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서울로 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지방 국립대 합격을 포기하고서라도. 그렇게 입시철에 선교사가 되겠다며 장신대 기독교교육과에 가게 된 것이 시작이에요." 
  
- 생각해보면 원래 마음먹은 학교 선택이 아닌 셈인데, 신학대학 생활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기대와는 달리 힘든 시간들이었어요. 기독교교육이라는 학문에 대해 흥미가 없다보니 학과 공부가 재미없었고, 지방에서 대도시 서울로 와서 겪게 되는 문화충격도 있었고, 집안 형편이 어렵다보니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또 신학교는 성경만 연구하는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전국의 교회에서 한가닥 했던 잘난 사람들의 집합소 같았죠. 몇몇 친구들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학교생활이 달라서 휴학이나 자퇴를 했고, 저는 그런 용기를 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잘 적응하지 못했고, 계속 겉도는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겉으로는 친구도 많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공허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어요. 오히려 신학과를 갔다면 좋았을텐데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신학대학원 진학이 너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장신대 신학대학원은 단순히 신학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교단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민도 많았어요. 신학은 공부하고 싶지만 목사는 되고 싶지 않고." 
  
- 그런데 결국에는 목회자의 삶을 살게 되셨네요.
"처음 신학대학원을 진학할 때는 나름대로의 합리화를 했었지요. 한국 기독교 안에 여성 지도자가 많지 않았고, 여성 리더쉽, 여성 목회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 때였어요. 목사들이 차고 넘치는 시대에 굳이 나까지 목사가 되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강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 안의 여성들에게는 모델이 될 만한 여성 리더쉽이 부재한데, 내가 그런 리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늘 충돌했었어요. 

만약에 제가 학부 때 여성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신학대학원 졸업 후에 굳이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여성학을 공부하고 나서 교회 안의 여성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교회가 여성에게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차별적인지 알게 되었죠. 어쩌면 목사가 되겠다는 마음 한켠에는 내 이후의 세대는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기 때문일 거예요."
  
- 사실 교회하면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차별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을 접하고 목사고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드셨으면 어쨌든 의도치 않게 '교회의 소수자'가 될 운명에 놓인 셈이셨을 텐데 목사 생활이 어떠셨나요? 
"목회 생활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어요. 저는 교회의 모순되는 모습에 대해서 침묵하기 보다는 변화를 얘기하는 쪽이었어요. 문제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교회라는 조직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사회에 영감을 불어넣기에는 너무 생기가 없었어요.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 이후에 너무 큰 충격과 슬픔으로 노란리본을 항상 가슴에 달고 다녔어요. 그때 교회에서 목회자 중에서 노란리본을 단 사람은 저 혼자였고, 사람들이 서로서로 눈치 보느라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런 모습이 교회의 생기 없는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왜 이런 일에 눈치를 봐야하나. 이렇게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었는데, 그 슬픔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것을 고작 정치적으로만 판단하는 수준이 안타까웠어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할 교회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숨이 막혔어요. 계속 교회에서 일한다면 앞으로의 제 삶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노란리본도 눈치 보는 사람들... 숨이 막혔다"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박진영 목사님 ⓒ 비온뒤무지개재단


-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실 때, 소수자들이나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셨다는 소개를 보았어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사회의 소수자들이나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에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늘 공평히 나누고, 어려운 분들을 더 챙기는 모습을 자주 보았어요. 크게 의식하며 자라지 않았는데 돌아보면 그런 부모님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살면서 많은 경험들이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을 많이 키워준 것 같아요. 청소년 시기에 교회에서 장애인 친구들과 우정을 쌓는 경험을 했어요. 그 덕분에 목회를 하면서 장애인 어린이나 학생들을 대할 때 예외로 생각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중요한 멤버의 일원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대학생 때 한부모 가정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 봉사 등 뭔가 큰 결심을 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 놓일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사회의 소수자들, 억압과 차별과 가난 속에 있는 사람들이 더 눈에 들어오기도 했죠." 
  
- 그 중에서도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으실까요?
"2008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 시기가 한국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반동성애 운동이 수면 위로 올라왔던 것 같아요. 연일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적인 내용들이 많았어요.

당시 제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괴리감이 엄청 컸죠. '둘 중의 하나다. 저런 소식들이 거짓이든지, 한국의 성소수자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성소수자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든지.'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성소수자를 직접 만나서 확인하리라 마음먹었죠. 샌프란시스코에서 제가 만난 사람들은 전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 미국에서 성소수자들과 관련한 특별한 경험이 있으셨나보군요.
"정말 많았어요. 저는 미국에 가기 전까지 성소수자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그런데 영어선생님 중 한분이 첫 수업에서 자신이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하시며 수업을 시작했어요. 선생님이 게이인게 나랑 무슨 상관일까 싶었는데, 나중에 그분이 그렇게 학생들에게 커밍아웃 하는게 얼마나 큰 용기이며 멋진 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지금도 페이스북에 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주 올려요.

또 대학원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던 친구가 하루는 자기 여자친구라며 사진을 보여주었어요. 보통 동성친구는 그냥 '친구'라고 소개를 하는데, 자기가 여자이면서 굳이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니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 친구가 자기의 애인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예쁘지 않니?'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저에게 커밍아웃을 했고, 저도 아무렇지 않았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자신이 레즈비언인 것을 아무에게도 숨기지 않았고, 작품에도 퀴어한 요소들을 반영하기도 했었어요. 

결정적으로 한 이론 수업에서 어떤 학생이 미묘한 여성 차별적 발언을 했는데, 아무도 딱 꼬집어서 비판하지 못했어요. 그냥 넘어갈 뻔 했는데 한 남학생이 자신을 게이라고 소개하며 왜 그 발언이 차별적인 것인지 조목조목 얘기하는 거예요. 그 순간에 세상이 달리 보였어요. 여성이 경험하는 미묘한 차별을 느끼는 남자가 존재할 수 있다니. 그때부터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차별이 여성이 사회에서 이등시민 취급 받으며 경험하는 차별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 아까도 유학생활이 끝나고 한국에 오셔서 목회자 일을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미국과 한국의 상황이 많이 다르죠. 특히 교회는 더더욱. 쉽지 않은 생활이셨을 것 같아요.
"교회에서 왜 이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들은 저의 선생님이거나 친구이거나 동료였으니까요. 그래서 한번은 반동성애 쪽에서 주장하는 성경본문을 모두 찾아서 번역서들을 모두 비교하고, 주석서들도 찾아보고, 참고할 책들을 찾아 읽어보며 제 나름대로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해 보았어요. 물론 제가 미국에서 경험한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했지요. 아무리 살펴봐도 성소수자를 차별할 수 있는 근거는 발견하기 어려웠어요. 오히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했던 예수의 말이 더 크게 와 닿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해한 대로 얘기 했어요.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한번은 어떤 모임에서 저에게 동성애 관련 강의를 요청하셔서 사회적 소수자들과 함께 언급하면서 한국교회가 이들을 환대하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강연을 했는데, 그 일로 담임목사님과 신뢰가 깨지게 되었어요. 평소 담임목사님이 하시던 말씀과 반대되는 얘기를 하려고 했을 때, 단단히 각오를 했었어요. 만약 이 일이 문제가 된다면 교회를 떠나리라."
  
- 그런 상황에서 교회에 계속 계시기 힘드셨을 것 같아요.   
"많이 힘들었어요. 각오는 했지만, 그 일로 담임목사님 뿐만 아니라 다른 목회자님들과도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졌어요. 소외감을 많이 느꼈고, 우울감이 엄청났어요. 그 때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어요. 당장이라도 그만둘 생각으로 담임목사님을 찾아가 솔직한 심정을 모두 말씀드렸고, 그때 비로소 목사님께서도 제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이해해주셨어요. 서로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지만, 마음이 다 풀렸지요. 그 이후로 목회 대신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전직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웹퍼블리싱을 배웠고, 사임 이후에 앱디자인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했죠."
  
- 사실 그런 식의 갈등을 겪고 나면 힘이 빠져서 활동을 접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성소수자 옹호자로 교회에서 문제가 되어서 사임을 하니 오히려 성소수자 인권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임보라 목사님의 강연을 처음 듣게 되었고, 비로소 기독교인과 목회자 중에서도 나를 이해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기뻤던 것 같아요. 임보라 목사님을 통해서 무지개예수(성소수자 기독교인과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를 알게 되었고,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아는 사람 거의 없어서 임보라 목사님 한분 믿고 육우당 추모기도회에 참여했고,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찬집례도 함께 했었어요. 덕분에 뜻을 함께 하는 분들을 많이 알게 되고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 오히려 그런 결심하셨기 때문에 로뎀나무그늘교회와 함께한 시간이 있을 수 있으셨군요.
  
"맞아요. 처음 로뎀에서 저를 담임목사로 불렀을 때, 상상도 못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전혀 어색하거나 이상하기 보다는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다'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 때는 정말 행복하고 감사했어요. 다른 면들에서는 잘 준비된 목사가 아니었지만,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각별한 애정과 관심이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 로뎀에서 한 활동이 많으셨어요, 홈페이지를 보니 세미나나 공부도 엄청 많이 하신 것 같아요. 교회에서 강의도하고 이를 통해 '성소수자 바로알기'와 같은 책자도 만드셨고요.  
"성소수자 교회의 목사로서 가지는 책임감이 컸던 것 같아요. 성소수자 관련된 강연이라면 뭐든 찾아다니며 다 들었고, 관련된 뉴스나 소식도 빠짐없이 찾아보고, 책들도 나오는 대로 사서 읽었어요. 더욱 구체적으로 한국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상황을 알게 되었어요.

또한 훌륭한 활동가분들과 전문가 분들을 많이 알게 됐고, 자신이 성소수자라고 해서 모두가 성소수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성소수자 바로알기 프로젝트'는 당사자가 공부하면서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더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되었지요. 나아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성소수자가 자기 자신의 이슈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목소리를 내고 연대해야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도 되었던 것 같아요."

"성소수자 바로알기, 또 다른 차원의 인간 이해"
  
- 공부를 해보시고 나시니 어떠셨나요?  
"저 개인적으로는 인간 이해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 느낌이었어요. 단순히 성소수자를 아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달라지게 되는 거죠. 서로 다른 타자를 어디까지 수용하고 환대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내 자신을 실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여성학을 공부했고, 그 이후로 모든 삶에 그러한 관점을 적용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퀴어 이론은 또 다른 차원의 인간 이해를 열어주었어요. 이러한 관점에 눈이 열리니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다 연결되는 것 처럼 더 가깝게 다가왔어요. 한 인간을 어느 한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고,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아니 그보다 더 복잡하고 우린 아직 다 알 수 없는 존재들인 거죠. 그게 신비인 것 같아요. 이런 앎들이 진짜 주어진 선물 같았어요." 
  
- 이외에 혹시 성소수자 목회를 하시면서 느꼈던 점이나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으신가요?
"정말 많지만, 두 가지만 얘기하자면 오랫동안 소수자 활동을 계속해 오신 분들 중에서는 성품이 매우 뛰어난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어려운 일을 기꺼이 기쁨으로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뭘까 궁금하기도 하고, 인권활동 오래 하신 분들 보면서 참 여유 있고 마음이 말랑말랑 하시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본받고 싶고 존경스러워요. 

두번째는 성소수자도 사람이고 그 안에 개인차와 다양성이 존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아웃팅을 당하거나 커밍아웃을 했으나 원치 않은 결과를 마주했을 때 겪게 되는 고통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어요. 또 혐오와 차별적 발언도 견디기 힘들지만, 커밍아웃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분들은 혹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차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일상의 스트레스도 엄청나지요. 하루 빨리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종교인 앨라이 인터뷰에 참여 중이신 박진영 목사님 ⓒ 비온뒤무지개재단


- 제가 인터뷰를 할 분들 중에 가장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유학을 가서 예술을 전공하고 또 활동까지 하고 오셨거든요. 계기가 있으신가요?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였어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신에 대해 얘기하는 건 모순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좋아해요. 대학원 과정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심리학과 영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을 이해하려면 먼저 나를 알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 같아요.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사람이 뭔지 인간이 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런 근원적인 질문들에 답하기 어렵겠구나 했었죠.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교회에서 일하는 것이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모두가 똑같은 동기와 과정으로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면의 목소리가 가장 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했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더이상 종교적인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무엇을 하든 참된 나를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 그런데 많은 분야 중에서 왜 그림을 선택하셨나요?
"비록 신학교에 갔지만,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미술에 대한 흥미나 열정이 식지는 않았어요. 영적인 탐구와 예술적 탐구는 뭔가 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내 안에서 어떤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심이었고, 더 연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술과 영성의 관계를 제 나름대로 풀어보고 싶었죠. 미술을 통해 제가 가진 신학을 표현해 보고 싶기도 했구요.

한편으로는 저 스스로 미술적 재능을 신뢰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의 첫번째 꿈이 화가가 되는 것이기도 했어요. 다른 사람의 눈에는 거만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알잖아요. 이 재능을 썩히는 것이 오히려 신 앞에서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시던 시절의 포트폴리오를 보았어요. 전시 제목이 'Rebirth' 그러니까 다시 살아남 혹은 부활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게 작년에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 보내신 글의 제목은 '다시 살리는 일'이셨어요. 4년의 세월을 지나오셔서도 '살리는 것'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하신 게 인상적으로 남았는데요, 이 주제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부탁드려요.
"사실 '살리는 일'은 신학 공부를 하고 꾸준히 내면화한 주제에요. 여성신학과 생명신학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살림'하면 보통 집안 살림이 떠오르잖아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림을 맡아 했던 사람들이 어머니들이었죠. '살림'은 말 그대로 살리는 일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살림하는 사람'하면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하찮게 여기죠. 

사실은 진짜로 위대한 거에요. 생명을 살리는 일이란 먹이고, 입히고, 안전한 곳을 제공하고, 결국 생기 있게 하고, 성장시키고 성숙시키죠. 그 법칙을 아는 사람만이 살림의 깊은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살리는 일은 신의 일이기도 해요. 복음이란 살려주는 일이에요. 구원이라는 말이 살리는 거잖아요. 저는 구원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아요. 대신 살림이라는 말이 좋더라구요."
  
- '구원' 대신에 '살림'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있으실까요?
"구원이라는 단어가 너무 종교적이고 교리적이다 보니 생동감 있게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지 못하거든요. 저는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가르침과 삶의 원리들이 좀 더 보편적인 언어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었으면 좋겠어요. 만약 기독교의 신이 기독교인들만 살린다면 너무 무능한 신이잖아요. 교회 가서 혼자 구원받고 혼자 천국 가는 거에 만족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수준의 종교라고 생각해요. 신의 일은 모두를 살리는 일이에요. 그래서 신을 믿는 사람들도 모두를 살리는 일을 해야죠." 

"앨라이의 행복? 사람들이 변하는 순간"
  
- 성소수자의 연대자인 앨라이로 활동하시면서 힘이 나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제가 앨라이로 활동하면서 제일 행복한 순간은 사람들이 변하는 걸 볼 때에요. 그 때가 제일 행복해요.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나라는 존재로 인해서 누군가가 해방감을 느끼고,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 인식과 태도가 변하는 걸 보는 건 엄청난 축복이거든요. 

특히 기독교인 성소수자 분들 중에 자기 정체성과 신앙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그분들이 자신의 정체성이 죄가 아니라 축복으로 여기며 신앙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보면 정말 보람되고 힘이 나죠. 또 하나는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계속해서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면 정말 많은 희열과 감사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 혹시 그렇게 변화하신 분 중 기억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으실까요?
"20대 게이분이셨는데, 처음 만났을 때 '동성애하면 에이즈에 걸린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계셨어요. 그날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상담하면서 기독교 안에서 주입된 자기혐오를 하나씩 깨뜨려 드렸던 것 같아요. 이후 지속적으로 함께 공부하고,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연결해서 다른 좋은 분들을 소개해 드리고 많이 격려해 드렸어요. 지금은 신앙 안에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보다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지를 고민하면서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또 한분은 저의 아버지에요. 연세도 많으시고, 기독교적 가치관도 강하신 분이라서 처음에는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저에게 직접 내색하지 않으셔도 저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우셨는지 알고 있어요. 감사하게도 아버지는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어요. 그냥 대충 듣지 않고, 과연 그런가 하며 깊이 들어주세요. 저를 믿어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시는게 많이 느껴졌었어요.

한번은 '게이는 성적인 욕구 때문에 남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여자를 좋아 할래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렸어요. 마치 이성애자인 아버지가 남자를 좋아하고 싶어도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죠. 그랬더니 아버지도 그런 친구를 한 명 안다고 하셨어요. 아무리 여자가 유혹해도 절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면서 그 사람이 바로 게이였나 보다고 하시더라구요. 이런 작은 깨달음의 순간들이 하나씩 하나씩 쌓이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자기 안의 선입견을 교정하고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을 보면 너무 행복하죠."
  
- 종교인으로서 성소수자의 앨라이가 된다는 것은 목사님께 어떤 의미로 다가오시나요?
"종교인이 앨라이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좀 더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고,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감수성이 더 높아야 하는게 마땅해요. 기독교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힘없는 사람, 병든 자들, 고아와 과부 그리고 죄인들. 이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하는 것이 곧 신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하거든요. 복음은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자들을 결코 배제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 나가죠.

저 개인적으로는 앨라이와 당사자의 경계가 모호한 것 같아요. 저도 성별이분법에 반대하는 삶을 살아왔고, 그러다보니 젠더퀴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성소수자는 저와 무관하지 않아요. 성소수자가 행복한 것이 곧 저의 행복이고, 성소수자가 고통 받는 것은 곧 저의 고통이기도 하죠.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저와 같은 사람들이고, 앞서 말했듯이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의 고통에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마지막 질문입니다. 앨라이 활동을 하고 싶지만 성소수자에 대해 잘 모르고 그래서 꺼리는 종교인들, 아니면 교회에서 이런 게 나쁘다는데 괜히 함께 했다가 억압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종교인들에게 드리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많은 부분 올바른 지식만 가지고 있어도 함부로 정죄하거나 가짜뉴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소문인지 직접 확인해보는 과정을 꼭 가졌으면 합니다.

만약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다면 직접 차별금지법 전문을 찾아 읽어보세요. 만약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에서 관련 정보를 모두 찾아 읽어보세요. 그렇게 직접 공부하는 것이 귀찮다면 성소수자 관련된 강연을 찾아가 들어보세요. 가장 좋은 것은 당사자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세요. 성소수자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다면 친구를 위해서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죠. 만약 사람들이 소문만으로 내 자신을 나쁘게 평가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스럽겠어요. 직접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지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내 안에 신의 충만한 사랑이 있는지 돌아보면 그 사랑이 자연스럽게 용기를 북돋아 줄 거에요. 생명을 살리는 일은 위대한 일이고 즐겁고 신나는 일이에요. 나 혼자만 잘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모두가 잘 살아야 좋은 거 아닌가요. 다함께 사는 것, 다함께 누리는 것, 서로 좀 달라도 환대하고 공존할 수 있는 여유를 추구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덧붙이는 글 이 인터뷰는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나는 앨라이입니다' 블로그(https://blog.naver.com/i_ally)에도 실립니다. 보다 자세한 인터뷰는 블로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앨라이입니다 #성소수자 #박진영 #로뎀나무그늘교회 #비온뒤무지개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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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뒤무지개재단은 한국 최초의 성적소수자들(LGBTAIQ)을 위한 재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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