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필리핀 어학연수생이 주말을 보내는 법

[50대 백수의 어학연수 ⑦]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등록 2018.12.28 10:55수정 2018.12.2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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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원 수업은 금요일 오후 6시에 끝난다.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휴식 시간이다. 연수생들은 바기오 시내로 진출하여 주말을 즐기거나 여행을 떠난다. 일주일 내내 공부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굳게 닫혔던 철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바기오의 마법(Baguio's magic)

금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어학원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군대에서 첫 외출을 기다리는 이등병처럼 것처럼 들뜬 모습이다. 연수생들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나며 화장과 옷차림이 화려해진다. 짝을 지어 먹거리, 놀거리 준비에 여념이 없다. 바기오 시내는 카페, 공원, 클럽 등 위락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젊음을 발산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청춘들의 주말 주말 댄서 파티를 안내하는 어학원 게시판 ⓒ 신한범

   

어학원에서 외출을 기다리는 학생들 주말을 보내기 위해 철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학생 모습 ⓒ 신한범

  
어학원의 일과는 까다롭고 바쁘게 진행되지만 혈기왕성한 젊은 연수생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한다. 국적이 다르고 영어가 자유롭지 않아도 그들의 사랑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사랑은 언어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에 짧은 영어 몇 문장으로도 애정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학원 선생님들은 '바기오의 마법(Baguio's magic)'이라고 한다.

젊은이들과 달리 50대 후반인 나는 고즈넉한 주말을 즐긴다. 텅 빈 기숙사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연수원 밖 슈퍼에서 맥주 몇 병을 사서 노트북에 담아 온 영화를 보며 한주의 노고를 잊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비례하여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여전히 귀는 들리지 않고, 입도 열리지 않지만 현지 생활에 적응되고 있는 것이다.

토요일에는 나들이를 즐긴다. 바기오는 필리핀 북부 고산 지대에 있어 울창한 삼림과 많은 관광지가 있다. 미국 식민지 시대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캠프 존헤이'와 '번함 공원', 과거 광산을 개조하여 만든 '마인즈 뷰', 대통령 여름 별장인 '대통령궁' 그리고 울창한 삼림을 자랑하는 '마운틴 울랍'까지.
 

번함 상 번함 공원의 설계자 흉상 ⓒ 신한범

     

번함공원 번함공원 모습 ⓒ 신한범


나들이 파트너는 연수생이 아니라 어학원 선생님. 나의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에게 동행을 부탁하면 대부분 기꺼이 응해 준다. 함께 공원을 걷고 산을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할 수 있으니 나에게는 일석이조인 셈이다.

어학원에서는 수줍음 때문에 또는 자신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문법도 어휘도 맞지 않은 나의 영어에 친절하게 답해주는 그들의 마음이 아름답다.


바기오의 랜드마크인 번함공원으로 향했다. 평지가 없는 바기오에서 시내 중심부에 넓은 녹지대를 가진 공원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을 설계한 번함(Burnham)이 공원 설계를 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번함공원이라고 불린다.

번함공원은 호수를 중심으로 오래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식민지 시대를 떠올리는 건축물이 공원 주위에 있어 서구적인 내음이 풍긴다. 공원에는 놀이시설, 휴식처, 도서관 등이 있어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코리안 드림

선생님들은 경제적인 문제 아니면 우리나라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다. 산업 시설이 미약한 필리핀에서 길거리에 붙어 있는 광고 대부분은 우리나라 공장 노동자를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SNS를 통해 봐서도 우리나라 드라마와 아이돌에 심취되어 있었다.

"4촌이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 이층집을 새로 지었어요."
"한 번은 한국에 가서 일하고 싶어요."
"홍콩과 중동 지역에 많이 가지만 돈을 많이 못 벌어요."


이런 그들에게 "한국은 인종차별이 심해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은 무척 힘들어해요"라는 나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학원에 온 많은 우리나라 연수생들은 호주나 캐나다에 가기 위해 워킹 홀리데이를 꿈꾸고 있는데 우리를 가르치는 필리핀 선생님들은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근로자 모집 광고 우리나라에서 일할 근로자 모집 광고 ⓒ 신한범

  
발걸음은 번함 공원을 나와 레갈다 로드(legarda road)로 향한다. 이곳은 일명 '한국인 거리'라 불리며 우리나라 음식점, 쇼핑센터, 술집 등이 몰려 있다. 바기오에는 5000명 이상의 교민이 있고 10곳 이상의 우리나라 어학원이 있어 교민과 연수생 그리고 우리나라 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현지인이 즐겨 찾는 곳이다. 삼겹살부터 중화요리, 소주부터 막걸리까지 판매되고 있으며 한인마트에는 우리나라 생필품이 판매되고 있다.
 

한국인 거리 바기오 한국인 거리 '레갈다 로드' ⓒ 신한범

  
필리핀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삼겹살. 고기뿐만 아니라 무료로 제공되는 밑반찬도 좋아한다. 상추에 삼겹살을 싸서 먹는 것도 자연스럽다. 술을 한 잔 하게 되면 나이 든 내가 상담자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공립학교 교사였다가 어학원으로 오게 된 이유', '어학원의 분위기는 좋지만 월급이 너무 박하다는 이야기', '홍콩에서 어렵게 일해 집을 장만했다는 자랑'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의 가슴도 먹먹해진다. 1970, 1980년대 우리나라가 걸었던 길이기에. 가족의 생계와 동생 학비를 위해 도시에서 중동에서 젊음을 불살랐던 형님 이야기를 그들이 하고 있으니. 사람 사는 모습은 세상 그 어디나 비슷한 것이겠지!
#필리핀 #바기오 #어학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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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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