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고 싶지 않은 세계 최고, 후진적 대응

등록 2019.01.03 08:36수정 2019.01.0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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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최장, 최다와 같은 내용으로 채워지는 신기록에 우리는 놀라기도 하고, 때로 긍정적 결과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나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상대적으로 앞선다는 증거처럼 느껴져 흐뭇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의 일상과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에 그 여운이 길지 않다. 그러나 그런 기록을 접하다 보면 결코 쉬이 넘길 수 없는, 인간과 사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남기는 '무거운 흔적'이 묻어날 때가 있다.

파인텍 노조가 417일째 세계 최장기 굴뚝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홍기탁, 박준호씨는 2017년 11월 12일부터 공장 정상화와 단체협약 이행을 요구하며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올랐다. 75미터 굴뚝 위에서 농성 중인 그들은 이제야 원치 않은 신기록 때문에 언론의 관심을 받고, 사측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듯했으나 지난달 31일 비공개 3차 교섭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그들이 왜 이 추위에 배를 주리고, 몸을 상해가며 높은 곳에서 농성을 하는지, 그렇지 않고는 사측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할 수 없는지, 우리 사회가 이런 사태를 방치할 정도로 문제해결역량이 부족한 건지 등 많은 궁금증이 남는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상황이 조성되고, 언론과 사회의 관심을 받은 후 정부와 정치권의 논의 테이블에 이슈가 오르는 것은 우리가 가진 정책문제 해결 방식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건, 사고가 발생하기 전 정비가 필요한 법과 제도를 살피고,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정책을 준비하는 노력이 지속될 때 사회는 진보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가 확인한 사회문제를 둘러싼 정책환경과 의사결정과정은 우리의 현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세계 최장기 굴뚝 농성만이 아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산재·직업병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산업재해 사망률은 10만 명당 7.9명으로 OECD 회원국 중 항상 1, 2위다. 이런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되짚게 한 인물은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근무 중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다. 김용균씨 사망으로 위험의 외주화 문제가 공론화되고, 국회는 지난달 27일 본회의에서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으로 인해 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위해 유해·위험작업의 도급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할 수 있도록 한 현행 규정상 불명확한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명확히 규정했다. 또한, 원청 사업주의 안전보건 조치 의무 위반에 대한 처벌도 강화했다. 소중한 노동자 한 사람의 죽음으로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할 수단이 한 걸음 진전됐다고 볼 수 있다.

일명 윤창호법으로 불리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및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배경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고 윤창호씨는 2018년 9월 군 복무 기간 중 휴가를 나와 만취 운전자가 몰던 차량에 치여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은 음주운전사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률안을 들고 국회를 찾아 호소했다.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법률 개정안이 통과됐다. 음주운전으로 인명 피해를 낸 운전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고, 음주운전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률 개정안이다.

그동안 음주운전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술에 관대한 우리나라에서 음주운전 관련 처벌 수위가 약한 법률에 대한 지적이 많았으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음주운전은 살인행위라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사고가 난 후 처벌이 사고를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으나 음주 후 운전대를 잡는 행위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조직과 사회 문화를 바꾸고,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죽음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눈물이 필요했다. 안타까운 우리의 법·제도적 환경이다. 교통사고사망률까지 세계 최고 기록을 보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가 불거지고, 사고가 난 후 정부가 개입하여 법·제도를 정비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시스템은 후진적이다. 국민의 생명, 안전과 관련된 문제들이라면 이런 후진적 정책결정은 특히 경계해야 한다. 정부가 모든 사건·사고를 미리 예측하고, 대응태세를 갖출 수는 없지만, 수많은 '소음' 속에 감춰진 목소리를 찾아 움직여야 한다.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 청소년 자살률이 1위, 세계 최고 수준의 사교육비 지출과 주거비 등 우리를 슬프게 하는 나쁜 기록들이 참 많다. 지난날의 과오를 씻고, 새로운 날의 각오를 다짐할 이때 나쁜 세계 최고의 기록을 깰 수 있는 정책담론이 뿌리내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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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무원노동조합 정책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사회 이슈, 사람의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 많은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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