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1년, 국회는 뭘했나 "145건 발의? 자랑거리 아니다"

국회 찾은 서지현 검사 "개인 범죄 아닌 집단 범죄, 홀로코스트였다"

등록 2019.01.29 16:35수정 2019.01.2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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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1년' 간담회 참석한 서지현 검사 서지현 검사가 29일 오전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서지현 검사 #미투 1년 지금까지의 변화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 좌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권우성


"이 사회는 지나치게 범죄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에게는 죽을 듯한 고통을 강요합니다. 피해자다움 따위는 없습니다. 피해자야말로, 누구보다 행복해져야 할 사람입니다. 그 대신 가해자다움, 범죄자다움을 장착했으면 합니다."

2018년 1월 29일. 꼬박 한 해 전 검찰 내부망에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폭력 사실을 고발한 서지현 수원지방검찰청 부부장 검사가 29일 국회 본청에서 열린 '미투 1년, 지금까지의 변화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 좌담회' 자리에서 한 말이다. 안씨는 지난 23일 성폭력과 인사보복 등의 죄가 인정돼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서 검사와 같은 자리에는 극단 대표의 성추행 사실을 끄집어낸 연극배우 송원씨, 체육계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는 젊은빙상인연대 권순천 부회장, 학교 성폭력 문제인 '스쿨 미투' 집회를 기획한 양지혜씨 등 각계에서 미투를 전개하고 있는 이들이 함께 했다.

이들을 관통하는 목소리는 여전한 '두려움'이었다.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더 추궁하고 고발자의 삶을 옥죄는 2차 가해가 아직도 만연한 사회에서는 또 다른 미투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였다.

"일종의 홀로코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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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1년' 간담회 참석한 서지현 검사 서지현 검사가 29일 오전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서지현 검사 #미투 1년 지금까지의 변화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 좌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권우성


서 검사는 자신의 1년을 반추하며 공익 제보자로 사는 삶을 "생명을 위협받는 일"이라고 요약했다. 그 원인은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조직적 은폐와 2차 가해, '피해자다움'에 대한 요구, 피해자의 성적 흥미대상만 소비하는 언론에서 찾았다. 이들 범죄를 "결코 개인이 아닌 집단 범죄이고 일종의 홀로코스트였다"라고 정의한 이유다.

전북 전주에서 올라온 연극인 송원씨는 성추행을 저지른 극단 대표가 미투를 통해 징역형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며 "나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수도권보다 지역에서의 고발은 은폐되기 쉽다는 현실을 반영한 발언이었다. 송씨는 "중앙에서 보면 고만고만한 지방극단 같지만, 지원금을 생계로 하는 우리는 가해 행위자의 영향력이 엄청나다"면서 "발의조차 되지 않고 의원실을 표류하는 예술인 권리보장법 제정에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호소했다.

오히려 가해자가 더 떳떳한 '가해자다움'의 역설 또한 참가자들이 동일하게 주장하는 문제들이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가해자 전문 변호인들의 피해자를 향한 '반격' 사례를 꺼내들었다.


상담 단체에 후원금을 낸 뒤, 피해자와의 합의가 불성립될 경우 후원금 기부영수증을 법원에 제출해 가해자의 죄를 감경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벌어진다는 것. 이 소장은 "정말 이제 다 된 건가. 전 착시 현상처럼 느껴진다"면서 "피해자가 '내가 공연히 사법절차를 밟았다, 혼자 삭힐 걸 그랬나' 생각하는 게 가장 두렵다"고 토로했다.

스쿨미투 집회 기획자 양지혜씨는 고발자에게 오히려 사과를 요구하는 가해자의 당당함,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 양씨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 허위제보로 받아들이거나 고발자의 사과를 요청하기도 한다"라면서 "80건 가까이 됐던 고발이 지금은 트위터 상 30개 정도 남은 상태다"라고 전했다. 스포츠계 성폭력 피해자를 돕고 있는 권순천 부회장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계속 현장에 있고, 피해자가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는 게 다반사"라고 지적했다.

"대중 관심 끌려고 부작용 큰 입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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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 #미투 1년 지금까지의 변화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 좌담회’에서 서지현 검사,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여성폭력근절특위 위원장, 조정식 정책위원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권우성


'떳떳한 가해자, 두려운 피해자'.

서 검사의 용기가 촉발한 한국 사회 미투 운동은 '목소리 내기'의 첫 발을 뗐지만, 이들 목소리를 향한 공동체 분위기는 여전히 이 명제 안에 갇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변화를 소화하지 못한 국회로 죽비가 날아드는 이유다.

"안희정 사건을 보자. 재판부는 업무상 위력으로 성폭력을 당했다면 피해 다음날 피해자가 아침 도지사를 경계하고 피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엔 '성폭력 피해자는 이렇게 행동했어야 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만들어져 있고, 그 이미지로 법이 해석되고 적용된다. 이를 깨지 않는 한 어떤 입법을 훌륭하게 하더라도 사회로 관철되지 못한다."

형사법 전문인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일침이다. 이 교수는 국회가 당면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조건 '찍어내기 식' 입법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145건 법안 발의했다고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비슷한 내용이 대부분이고 아무 문제의식 없이 가십거리를 기사화하는 언론처럼 대중의 관심에 어필하기 위해 오히려 부작용이 큰 입법을 낸 경우도 꽤 있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성폭력이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피해자 동의 없이 이뤄지는 성적인 행동이다. 이를 입법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은 비동의 간음죄다"라면서 "성폭력은 성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이 아니라, '동의가 없음'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왜곡된 행동 자체라는 인식을 사회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다"라고 정리했다.

이 교수의 쓴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비동의간음죄를 신설하자는 입법이 상당히 많이 입법됐는데 왜 통과가 안 되느냐는 질문에 한 의원은 '사회적 합의가 부족해서'라고 답했다. 억장이 무너졌다. 사회적 합의가 부족해서 못한 것을 미투 운동을 통해 이제 해 보자는 게 우리 요구 아닌가.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니 아직 버겁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 주길 바란다."

결국, 가해자 처벌이란 당연한 일까지 멈추게 하는 '남성중심적 권력' 구조를 타파할 수 있는 장치를 입법부에서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이 교수는 "형법적 대응에 있어 권력 관계를 이용한 성폭력을 근본적으로 처벌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면서 "형법은 (권력관계를)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스포츠 영역, 종교 영역 등 가해자에 대한 종속성을 다양하게 포괄할 수 있는 처벌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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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1년' 간담회 참석한 서지현 검사 서지현 검사가 29일 오전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서지현 검사 #미투 1년 지금까지의 변화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 좌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권우성


서 검사는 발언을 마무리하며 한 책의 내용을 소개했다. 성인의 29%가 에이즈에 감염돼 기대 수명이 61세에 불과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무상으로 치료약을 공급한 이후 한 지역의 기대 수명이 7년 만에 12년이나 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물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그동안 에이즈 때문에 죽었을까요, 에이즈 치료약을 공공자금으로 제공하지 못했던 공동체로 죽어갔을까요?"

그는 성폭력 피해 역시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가해자를 두둔하는 사회가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호소였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입을 열지 못하게 한 것은 그들의 두려움이나 나약함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들을 꽃뱀, 창녀로 부르며 손가락질한 공동체 때문일까요?"

서 검사의 질문이 거듭 이어졌다. 국회와 우리 사회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안태근 #미투 #스쿨미투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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