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살림꾼의 고민 "돈 필요할 때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대담 ①

등록 2019.03.01 11:58수정 2019.03.0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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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6일,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 내외분 및 애국지사 후손, 정부 관계자와 함께 중국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중앙계단에서 환국 72년 만에 기념촬영을 하다(앞줄 왼쪽 두번째 문재인 대통령, 김정숙 영부인, 김자동 회장, 둘째 딸 김선현).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한 마디로 감개무량합니다.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재작년인 2017년 12월 16일, 바로 그 자리에서 72년 만에 대통령 내외분 및 애국지사 후손, 관계자 여러분과 함께 기념 촬영한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감개 무량했습니다.

그때 그 자리를 지켰던 임정 요인 및 독립지사 어른들은 이미 작고하셨거나 살아계셔도 거동을 할 수가 없답니다. 다행히 나는 지팡이를 짚고라도 움직일 수 있었기에 둘째딸(김선현)의 부축을 받으면서 대통령 내외분을 안내했지요. 아마도 하늘에 계시는 선열께서도 그날 그 장면에 감읍하셨을 겁니다."


지난 1월 10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로얄빌딩 602호에서 만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이 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소회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2019. 1. 10.). ⓒ 박도

 
삼일절 노래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초·중·고교 시절 삼일절이면 목이 터져라 불렀던 <삼일절 노래>(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다. 하지만 올해 삼일절은 그 노래의 의미가 여느 해와는 다르다. 흰옷 입은 우리 조상들은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방방곡곡에서, 해외 동포들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든 "대한민국 독립만세!"를 부른 지 꼭 100년이 되기 때문이다.

이 뜻 깊은 해를 앞두고 각 언론사와 출판사에서는 특집 제작을 서둘렀다. 기자도 지난해 7월, 한 출판사로부터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집필 섭외를 받아 지난해 세모까지 집필에 골몰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동안, 어렵지 않은 때가 없었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지로 이동해야 했던 '고난의 대장정' 시기를 맞았다. 그 무렵인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다. 그해 12월 일본은 난징을 점령한 뒤, '난징대학살사건'을 저질렀다.


그때 일본군은 이듬해 1월까지 40여 일 동안 일반 시민을 대량 학살했다. 그 학살자가 무려 3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중일전쟁 발발 4개월 만에 중국 정부는 충칭으로 천도했다. 그러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급하게 배(목선)를 마련해 난징을 떠났다. 그 시절 임시정부 안방 살림을 도맡았던 정정화(독립운동가 김가진의 며느리) 지사의 수기 한 대목을 봤다.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
 
"우리(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는 큰 목선 하나를 세내었다. 그 목선은 백 명이 넘는 식구가 한꺼번에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었으며, 그 많은 사람이 배 위에서 지내는 데 필요한 부엌이나 변소 등 편의시설도 다 갖추어져 있었는데, 강물을 떠올려 간단히 몸을 씻을 수 있는 세수소도 있었다. (중략) 밥은 삼시 세끼를 다 해먹을 수밖에 없었다. 큰 솥에다 지어 모두에게 나누어주고, 반찬만 제각기 몇몇씩 모여서 만들어 먹었다.

나는 석오(이동녕), 성재(이시영), 우천(조완구), 동암(차리석), 신암(송병조) 등 홀로 지내는 국무위원 전원을 돌봐드려야 했으므로 어디든지 배가 정박하기만 하면 육지로 올라가서 시장을 봐 오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다. (중략) 임시정부의 살림이라는 것이 일정한 수입과 계획적인 지출로 짜임새 있게 운영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거의 주먹구구식에 가까웠다. 그러니 임정의 살림을 책임지는 일이란 그럴수록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남모르는 가슴앓이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나처럼 임정 살림 뒤치다꺼리를 맡은 사람들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분들에게 손을 벌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지출금액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임정의 살림은 형편없었다.

돈을 받아쓰는 사람의 마음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푼전을 내주어야 하는 그분들의 심정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으리라. 동암과 우천은 그런 궁색한 살림을 맡아하면서 자신들에게만은 특히 인색하게 대했을 터이니, 늘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다." - 정정화 지음 학민사 <장강일기> 158~161쪽 축약
  

어머니 정정화 독립지사와 아들 김자동(1929년)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독립지사 정정화 어른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른은 1991년에 선종하셨다. 그래서 대신 아드님에게 그때의 말씀을 듣고자 2019년 새해 시무식 날 아침,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로 전화를 걸었다. 이일선 사무처장님이 반갑게 받았다. 그 사연을 곡진히 말씀드리자 김 회장님 일정과 조정해 1월 10일 오후 2시로 대담 날짜를 잡아주셨다. 

약속 날짜 이틀 전에 전화가 왔다. 그날 오후 2시로 정한 것은 점심시간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굳이 그날 오전 11시까지 사무실로 와서 점심을 곁들이며 대담을 나누는 게 좋겠다는 김 회장님의 뜻을 전했다. 감사히 받아들였다. 아마도 멀리서 찾아오는 손에게 밥 한 끼 대접하고픈 김 회장님의 따뜻한 배려였으리라.

추억의 장소

사실 나는 김 회장님과 연을 맺기는 오래됐다. 2000년대 초 조선일보사 옆 오양수산 건물 내에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그 무렵 독립지사 및 후손들의 사랑방이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이사장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고, 차리석 선생님의 자제 차영조 선생도 처음 만났다.

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기관지 <독립정신>에 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행적과 '100년 편지'도 두어 편 게재했던 연유로 김 회장님을 두어 차례 뵌 적이 있었다.

그날(2019. 1. 10.) 새로 이사한 새문안길 임정기념사업회로 찾아갔다. 세종문화회관 옆이었다. 11시 정각, 사무실 초인종을 누르자 이일선 사무처장님이 반갑게 맞아줬다. 이 처장님의 안내로 회장실에 들어서자 김자동 회장님이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올해 91세(1928년생)로 구순의 나이답지 않게 해맑은 상호(相好)였다. 하지만 귀는 다소 불편한 듯 보청기를 끼셨다. 동석한 이일선 사무처장님이 큰소리로 나와 회장님간 의사소통을 도와줬다.
 

김자동 회장님과 기자가 손을 잡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의불삼세 불복기약

- 대한민국임시정부 간판을 여태까지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이끌어오신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별 일 아니에요. 내가 갈 곳이 없어 사무실을 마련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에요. '독립운동가들은 3대가 가난하다'는 말처럼 후손들은 모두가 어려웠어요. 다행히 나는 그분들보다 조금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사무실을 내고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간판을 달 수 있었습니다. 실은 늙은 내가 아무 데도 갈 때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말씀에 함께 웃었다.

- 근현대사를 살아오시면서 웬만한 분 같으면 지조 없이 여러 정권에 기웃거리거나 적당히 발을 담그셨을 텐데, 초지일관 꼿꼿한 야인으로 살아오신 것은 대단한 기개요, 정신입니다.
"과찬입니다. 사람이 못났기 때문이지요."

여전히 겸손의 말씀이시다. 해방 후 서울대 법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라면 어디에 갈 데가 없었겠는가.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친필사인을 해 준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김자동 회고록을 읽어보니, 그동안 여러 차례 정권의 러브콜도 받았다.
 

푸른역사 <영원한 임시정부소년> 김자동 회고록 속지의 친필서명 ⓒ 박도

  
대표적인 사례는 1961년 5.16 쿠데타로 <민족일보>가 폐간된 후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쿠데타의 2인자 JP(김종필)가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을 추진할 무렵으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했단다. 하지만 당신의 신념상 그 제안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거절했단다. 

가장 큰 이유는 박정희가 조용수(민족일보 사장), 최백근(사회당 조직부장) 같은 사람을 사형시킨 게 용납되지 않아서였다고. 만일 그때 JP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공화당 공천은 떠놓은 당상이요, 문공부 장관 자리도 한두 번 했을 거란다.

한의학에 "의불삼세 불복기약"(醫不三世 不服其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의원을 삼대하지 않으면 그 의원 약을 먹지 말라"는 말로, 어떤 일을 하든지 3대 이상은 해야 진짜라는 말이다. 내가 십수 년 동안 여러 항일, 의병 가문의 문전을 기웃거려 보니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지만 그 아들은 일본군 장교이거나 밀정·순사였던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삼일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맞이하는 이즈음이다.  할아버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 아버지 성엄(誠广) 김의한(金毅漢1900~1964) 어머니 정정화(鄭靖和 1900~1991), 손자 김자동(金滋東 1928~) 3대에 이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의 독립투쟁사와 현대사 이야기는 진국일 것이다.

해방 후 오만 잡스러움과 가짜들의 추악한 행태에 지친 우리들에게 김 회장의 진솔한 이야기는 아마도 깊은 산골 옹달샘에서 솟는 한 모금의 맑고 시원한 생명수일 것이다. 그 생명수로 우리의 목마른 갈증을 시원히 풀고 새로운 백성의 나라 '민국' 100년을 맞이하고 싶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김자동 #김선현 #정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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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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