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상설을 '왕 교장'으로, 서전고의 특별한 실험

[현장] 고교 최초로 독립운동사 과목 채택, '헤이그 특사'도 파견 계획

등록 2019.02.25 18:24수정 2019.02.2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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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서전고 '왕 교장' 이상설 선생의 청동 좌상. ⓒ 윤근혁

 
1906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룽징춘(龍井村).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한국 최초의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이 문을 열었다. 교장은 이상설 선생. 헤이그 특사 가운데 한 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그 분이다.

113년 만에 되살아온 '최초의 민족학교 서전서숙'

이로부터 113년이 흐른 2019년 3월. 충북 진천군에 있는 공립 서전고가 '한국 독립운동사'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했다. 서전서숙에서 이름을 따온 이 학교가 고교생들에게 자주독립을 위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매 맞아 죽은 조상들'의 삶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이상설 선생의 '자주독립의 참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벌어진 한국 고교 최초의 일이다.

이상설 선생의 생가로부터 4k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서전고. 지난 15일 오전 10시쯤 이 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무명옷을 입은 이상설 선생이 팔을 벌리며 학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해 세운 청동 좌상이다.

교직원들이 우르르 나와 이상설 선생 동상 맞은편 체육관 계단 앞에 하트모양으로 선다. 앨범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체육관 벽면엔 고종황제가 붉은 색 도장을 찍은 '헤이그 특사 파견 밀서'가 박혀 있다.
  

15일, 서전고 교직원들이 하트 모양으로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그 옆 체육관 벽에 고종이 도장을 찍은 '헤이그 특사 파견' 밀서가 보인다. ⓒ 윤근혁

 
본관 현관문에 들어섰다. 현관 안 왼편 벽 전체에 이상설 선생의 활동과 서전서숙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앞 널빤지 게시판엔 학생들이 그려 넣은 독도 부채가 나란히 걸려 있다.

"우리는 이상설 선생님을 '교장 중의 교장' 왕 교장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한상훈 교장의 말이다. '대안학교도 아닌 정규 공립학교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다'는 기자의 평가를 듣고서다.


충북교육청 소속 일반계고인 이 학교가 문을 연 때는 지난해 3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이 '정책협력학교'로 지정해 힘을 보태고 있다.

이런 학교가 올해 3월 새 학기부터 새로운 교육 실험을 시작한다. 2학년 교육과정에서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사상'이란 과목을 개설하기로 한 것. 2학년 학생들 모두가 한 학기 동안 일주일에 2시간씩 국내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배운다. 학교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율교육과정을 이 학교에서는 '독립운동사'로 정한 것이다.

특히, 이상설 선생의 생애와 사상은 별도 단원으로 만들었다. 현재 이 학교 역사교사 등은 수업자료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상설 선생 동상을 직접 만든 정창훈 교수(전 충북보건과학대)도 이 학교 교사들과 협력 수업을 벌인다.

한 교장은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사상'을 과목으로 개설한 이유는 서전서숙의 역사적 전통성을 계승하려는 것"이라면서 "개인의 출세와 명예, 부를 추구하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열정적인 삶은 현 시대를 사는 학생들에게 능동적인 문제해결의 본보기가 될 거라 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학교에서는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민족교육도 준비하고 있다.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독립군가 경연대회', '3.1운동 100주년 기념 역사탐방 <나도 밀사, 헤이그 원정대>', '조선족 학교와 자매결연', '이상설 작은 학술제' 등이 그것이다. 특히 <나도 밀사...>는 학생들의 활동 계획서를 심사해 학생들을 직접 헤이그에 보내려는 계획이다. 
 

현관 왼편 학생들의 독도 부채 작품과 이상설 선생 사진들. ⓒ 윤근혁

 
이 학교는 지난해에도 비슷한 행사를 했다. 2학년 한승균 학생은 "사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가 고리타분해서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면서도 "막상 이상설 선생님과 독립운동가들을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이들을 잊어선 안 되겠다는 학생들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 학교 학생자치회는 오는 3월 1일 만세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25일 현재 이 학교 학생과 교직원, 지역 주민 등 300여 명이 참여 뜻을 밝혔다. 이날 참석자들은 이 학교 이상설 선생 동상 앞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벌인 뒤 이 지역 3Km 거리를 행진하여 '자주독립 만세'를 외칠 예정이다.

문제는 남아 있다. 이상설 선생 등을 '왕 교장'으로 모시며 가르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교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음처럼 말했다.

"이상설 선생은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의 중추적 인물이다. 그런데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될 정도로 국제적인 감각을 익힌 지식인이었다. 수학 교과서의 저자이기도 하고, 정치·경제·법·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융합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융합적 사고를 갖춘 인재상'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교육목표와 방향에 비춰봐도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돌아오지 못한 이상설 선생님 몸, 하지만 그의 뜻은 서전고 곳곳에

한 교장은 "해방 뒤 줄곧 제대로 우대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우리의 교육적,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한 교장은 학교와 지역인사, 한국교육개발원 관계자가 모인 심사위에서 뽑은 평교사 출신 내부형 공모 교장이다.
 

학교 건물에 붙어 있는 서전서숙 사진. ⓒ 윤근혁

 
지난해 이 학교가 세운 기숙사인 '서전학사' 울타리엔 다음과 같은 이상설 선생의 유언이 적혀 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워라."
 
이상설 선생의 몸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자주독립' 의지는 고국으로 돌아와 서전고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서전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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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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