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폭만이 답'이라는 저들, 과연 무시하는 게 능사일까

고속도로 위에서 이런 차량을 만난다면?

등록 2019.02.28 20:08수정 2019.02.28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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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열린 전교조 집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전국에서 모인 천여 명의 교사들이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에 맞서 철회를 요구하는 자리였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 각자 자유롭게 단상에 올라 발언을 이어가는 등 광장은 집회 열기로 뜨거웠다.

그때 도로에서 요란한 군가가 들려왔다. 워낙 커서 집회 사회자의 목소리가 군가에 묻혀버렸다. 지붕에 대형 확성기를 장착한 지프 차량 두 대가 광장 주변을 번갈아 오가며 연신 군가를 틀어댔다. 누가 봐도 집회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런가 하면 앞뒤 차문에 빨간색 페인트로 큼지막하게 '멸공통일' 네 글자를 쓴 승용차도 보였다. 차량 뒤에는 태극기 문양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이고 도로를 활보했다. 길 가던 행인들은 신기한 볼거리라도 되는 양 그 차량을 향해 스마트폰을 들이대는 모습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교사들도 그들을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집회 내내 그들과 '볼륨의 대결'을 벌이는 형국이었다. 당시 함께한 교사들은 '그저 관심을 받고 싶어 저러는 거라며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고 이구동성 말했다.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건, 며칠 전 고속도로에서 비슷한 차량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뒤에서 사이렌 같은 소리가 들려 앰뷸런스인 줄로 알았다. 백미러로 보니, 비켜달라는 듯 상향등을 켠 채 차선을 바꿔가며 빠른 속도로 내달려오고 있었다.

속도도 속도지만, 스포츠카 마냥 곡예 운전을 일삼아 다른 운전자들에겐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2차선에 대형 트레일러가 앞을 가리자 갓길로 파고드는 등 위험천만한 상황이 이어졌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급작스럽게 내 차 앞으로 끼어들 땐 순간 움찔하기도 했다.

지붕에 대형 확성기 두 대를 얹은 흰색 SUV 차량이었다. 차량의 앞뒤로는 온갖 구호를 적은 팻말이 빼곡하게 붙어있고, 지붕의 양옆으로는 깃봉을 세워 태극기를 매달아놓았다. 선팅이 짙어 누가 운전을 하고 몇 명이나 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성기에서는 우렁찬 군가가 흘러나왔다. 바람소리와 타이어 마찰음이 유난히 큰 고속도로 위인데도 군가의 노랫말이 또렷이 들릴 만큼 소리가 컸다. 터널 안이거나 바로 옆을 지날 땐 내 차에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묻혀버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량들은 마치 소방차라도 본 양 서둘러 길을 열어주려 애썼지만, 막무가내로 차선을 바꾸는 통에 앞을 가로막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그 차는 욕지거리 하듯 상향등과 경적소리가 쏟아냈다. 마치 조폭의 행패 앞에서 주눅 든 사람들의 행렬 같았다.

집에 도착한 직후 부러 해당 지역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차량 번호를 대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듣고만 있던 경찰은 답변 대신 외마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사고가 났나요?" 해당 차량의 사진은 근거가 될 수 없었다. 경찰은 사진만 봐서는 과속했는지도 알 수 없고, 스피커의 소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전혀 알 수 없다면서 처벌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덕분에 '위법성 조각사유'라는 어려운 법률용어까지 알게 됐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순간 데면데면해지고 말았다. 정작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이런 일로 신고하는 경우가 난생 처음이었다는 경찰에게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익숙한 조언을 또 다시 들어야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저 관심을 받고 싶어 저러는 것이니 무시하는 게 상책이에요."

고속도로 위에서 난폭 운전을 하지 않고 시끄럽게 굴지 않았다면, 나 역시 애써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성싶다. 하지만 무언가 대책이 없다면, '도로 위의 무법자'들은 점점 더 과격한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도로 위 CCTV나 경찰의 단속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차에 붙인 '섬뜩한' 글귀 때문에 투철한 신고 정신이 발현되었는지도 모른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어보이는 내용을 버젓이 내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은 이마저 몰상식은 조롱을 받을 일이지, 법적 처벌 대상은 아니라고 부언했다.

차량엔 '5.18 유공자의 명단을 공개하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다. 이미 대법원으로부터 명단 공개는 위법하다는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항소심도 아니고, 확정 판결에 불복하며 공공연히 소란을 피우는 행태조차 용인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주지하다시피, 5.18 민주화운동은 사법적 판단은 물론, 이미 역사적 평가까지 끝난 사안이다. 그럼에도 진상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건, 조롱받을 일이 아니라 법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명백한 범죄 행위다. 처벌할 근거가 없다면 법을 서둘러 제정해야 옳지, 무시한다고 사라질 일은 아니다.

'북폭만이 답'이라는 글귀에서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원수처럼 지낸 북한과 미국의 최고 지도자가 두 손을 맞잡고 종전과 평화를 논의하고 있는 지금, 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가. 괜히 저들의 망상을 종이에 인쇄해준 이가 누구인지조차 궁금해졌다.

영화 <실미도>의 배경이 된 1971년 당시의 현실을 오늘처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선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야한다'는 반세기 전의 냉전적 사고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저들의 머릿속엔 여전히 '북진통일'만 있을 뿐이다.

지그재그로 고속도로 위 모든 차들을 추월하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바삐 어디 가는 길이었을까. 지금도 요란한 군가 메들리를 튼 채 어느 도로 위를 내달리고 있을 것이다. 3.1절 집회 현장에 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그땐 깃봉 한쪽에 태극기 대신 성조기를 매달고 나올 것이다.

어쩌면 인터넷과 종편을 통해 범람하는 '가짜 뉴스'가 몰고 온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북미 간 신뢰가 쌓이고 남북 간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다 보면 시나브로 사라져갈 테지만, 그때까지 저들을 무시하는 게 과연 능사일까. 다시 '가짜 뉴스'를 확대재생산하는 숙주로 작용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부디 기우였으면 좋겠다.
#5.18 폄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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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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