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반란군에 맞선 광주민중항쟁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76회] "아직도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등록 2019.04.18 16:34수정 2019.04.1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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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에 모인 시민들 ⓒ 5.18기념재단

 
​​​​​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신군부의 무차별 시민학살과 이에 맞서 시민들의 저항은 1948년 정부수립 후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권력찬탈을 위해 광주를 지정하여 사태를 일으키고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박정희 정권의 '사생아'로 성장한 전두환 일당은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진 정치군인들이었다.

12ㆍ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하고 쿠데타의 명분을 찾고자 '호남차별'의 야만적인 정서를 활용하여 광주에서 일을 꾸몄다.

가로수의 신록이 여느 해처럼 싱그러운 80년 5월 18일 오전, 전남대생들은 교내로 들어가려다가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자 투석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공수부대 중에서도 핵심인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를 광주에 파견하고, 그중 33대대의 주력부대로 하여금 전남대를 장악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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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 방송 ARD에 방영된 '광주민중항쟁' 보도 장면 당시 독일 방송 ARD에 방영된 '광주민중항쟁' 보도 장면 ⓒ KBS

당시 어느 외국 언론이 표현한 대로 '20세기의 마지막 비극'인 광주의 학살과 민중항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전두환은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와 더불어 김대중 등 정치인들을 구속하면서 지역정서에 휘발유를 뿌렸다. 모든 것이 미리 치밀하게 짜여진 시나리오였다. 전남대생들은 만일의 휴교조치에 대비하여 학교 앞에 모이기로 사전 합의한 대로 당일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오다가 계엄군과 대치하게 된 것이다.

학교 정문 앞에서 계엄군에 의해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연좌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경찰력으로 진압이 어렵다고 보고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착검한 M16과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은 남녀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마구 난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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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블럭을 떼서 집어던졌다.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공수부대원들은 붙잡혀온 학생들을 군홧발로 짓밟거나, 반항하는 경우 M16에 꽂은 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러그었다.

심지어 여대생들의 상의를 벗기고 대검으로 유방을 난자하기도 했다. 피 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여져 군 트럭에 실려갔으며,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되자 귀가하는 학생ㆍ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고 연행하고,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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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9일, 129구의 장례식이 거행된 이날 이후 '망월동'은 광주민중항쟁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이름이 되었다. ⓒ 5.18기념재단

다음날인 19일 시민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금남로 일대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난폭하게 시민들을 해산시키려 들었다. 닥치는 대로 시민들을 구타했으며, 술에 취한 군인들도 있었다. 공수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군중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총궐기에 나섰다.

완전무장한 계엄군은 시민ㆍ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폭행하고 저항하는 시민은 칼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등을 X자로 그어대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가톨릭센터ㆍ공용터미널 등 광주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을 살상했다. 공수대원들의 무차별 만행에 시민들은 자신들을 방어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택시 운전사들이 차를 몰아 도청광장으로 돌진하다가 무참히 살해되는 등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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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시위 진압군이 시위 가담자를 잡아 도로에 무릎 꿇려 앉혀놓고 경계하고 있다.(5.27) 광주민중항쟁 시위 진압군이 시위 가담자를 잡아 도로에 무릎 꿇려 앉혀놓고 경계하고 있다.(5.27) ⓒ (재)5·18기념재단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계엄군에 시민들은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 예비군용 총기ㆍ실탄ㆍ수류탄을 빼앗아 무장하여 계엄군과 맞섰다. 시민군에 밀려 계엄군이 시내 외각으로 퇴각하면서 마구 쏘아댄 총격으로 많은 시민이 살해되었다.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시내 치안을 담당하면서 도청을 임시본부로 삼아 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구속자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질서있게 대회를 마쳤다.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수습위원들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계엄군이 시내진입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스스로 무기수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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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시민들의 수습노력이 진행되고 있을 때 계엄군은 5월 27일 새벽 2시 섬광탄을 쏘면서 다시 시가지를 공격하여 무수한 희생자를 냈다. 피를 부르며 시내를 장악한 계엄군은 마치 적진을 탈환하는 것 같은 승리감에 가득 차 있었다고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많은 총기가 시민들의 손에 쥐어졌는데도 항쟁기간 동안 은행ㆍ백화점ㆍ금은방 등의 약탈사건이 전혀 없었다. 학생들은 치안대를 조직하여 은행과 농협 쌀창고를 지켰다. 총상으로 인한 환자가 급증하여 피가 부족하게 되자 헌혈하는 시민들의 수가 무수히 늘어섰다. 여성들은 시위대원은 물론 계엄군에게도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다.
  

시민들과 대치중인 진압군 ⓒ 5.18기념재단

공수부대의 만행과 정부당국의 시민항쟁을 모욕하는 언행에 다시 격분한 시민들은 20일 시내버스와 택시기사들의 차량시위, 시청접수, 광주문화방송국 방화, 21일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한 자체무장 등 적극적인 자구책을 강구함으로써 시위는 삽시간에 시가전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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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항쟁 기간중 유일하게 진실한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 ⓒ 5.18 기록관

21일 오후 6시경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치안과 방위를 담당할 조직을 편성하는 한편 〈투사회보〉를 발행, 선전활동을 하고 매일 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의 뜻을 모아 행동에 옮겼다. <조선일보>가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등 광주항쟁 기간 중 국내 언론은 사실보도는 커녕 왜곡보도를 일삼았다.

시민군 사이에 △ 사후보복 금지 △ 사망자 배상 등의 '수습대책위'와 △ 현정부 퇴진 △ 계엄령 해제 △ 학살원흉 처단 △ 구국과도정부 수립 등 결사항전 세력의 의견대립으로 항쟁지도부간의 균열이 생긴 가운데, 전두환 신군부 강경세력의 조기진압 방침으로 계엄군은 27일 새벽 2시 극비리에 작전을 개시하여 1시간 40여 분만에 도청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도청을 사수하던 결사대원 다수가 희생되었다.

신군부의 5ㆍ17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의 초강경 유혈진압에 맞서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민ㆍ전남도민들이 전개한 민주항쟁은 아직도 사망자와 부상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가운데 80년대 한국의 모든 정치적 사건들의 기폭제가 되었고, 드디어는 6월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한국민주통일운동에 하나의 준거가 되었다. 외신은 "80년대 한국민주화는 광주항쟁 정신때문이었다"고 보도했다.
  

위컴 1980년대 초 한국 주둔 미8군 사령관이었던 존 위컴 대장 ⓒ 위키백과

아울러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5월 22일 광주시위 진압작전에 투입할 예하 4개 대대의 한국군 병력차출과 미국의 항공모함과 공증조기정보통제기를 배치한 사실 등이 알려지면서 80년대 반미감정의 확산 및 반미투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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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시위에서 희생된 한 학생의 빈 책상 위에 급우들이 꽃을 꽂아 조의를 표한 가운데 학생들이 친구 잃은 슬픔을 안고 수업하고 있다.(6.1) 광주민중항쟁 시위에서 희생된 한 학생의 빈 책상 위에 급우들이 꽃을 꽂아 조의를 표한 가운데 학생들이 친구 잃은 슬픔을 안고 수업하고 있다.(6.1) ⓒ (재)5·18기념재단

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광주학살 진상규명 청문회'가 열렸으나 아직도 정확한 사망자 수, 암매장실태, 발포책임자, 헬기 사격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최근 정신병자의 북한군 투입설 등 광주항쟁을 모독하는 언동이 쏟아지고, 민주항쟁의 주도자들을 욕되게 하는 정당이 세를 키우는 등 역류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전두환반란군 #광주민중항쟁 #아직도_광주는_끝나지_않았다 #전두환신군부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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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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