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나 죄송하던지... 문익환 목사 방북 직전 벌어진 일들

[문익환 방북 30주년 특별 기고 ①] 이인영 의원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문 목사님의 방북이란..."

등록 2019.04.29 16:15수정 2019.04.2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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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통일맞이는 방북 30주년을 맞아 당시 전대협, 노동계, 기독교, 학계, 통일운동, 일반 대학생 등 각 부분별로 7명의 기고문을 통해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시대에 '늦봄의 방북사건'을 재조명하고, 판문점선언시대 문익환 방북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찾고, 이를 재평가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그 첫번째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내왔습니다.[편집자말]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을 선물했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저와 이철우 전 의원, 우상호 의원은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을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일화가 있습니다.

1989년 2월의 어느 날, 우리는 문익환 목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문 목사님께 이철우 전 의원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주시도록 부탁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결혼식 날짜를 물어보신 후 목사님의 대답은 '불가'였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몰랐던 상황이라 섭섭한 마음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이철우 전 의원에게는 낙담이, 함께 간 일행들에게는 작은 원망까지 생겼습니다. '목사님께서 주례도 가려서 서시나?' 이런 생각들로 이어졌으니까요. 결국 주례는 김세진 열사의 아버님 김재훈 선생께 부탁드리게 되었습니다.

1989년 3월 25일, 이철우 전 의원의 결혼식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고, 신랑신부를 신혼여행 보내고 나서 우리는 몇몇이 남아 저희 집에 모여서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당시 아사히신문에 근무하던 이병선 선배의 다급한 전화가 잠을 깨웠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문익환 목사님 방북하셨냐?"고 물어옵니다. 선배는 불확실하지만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 했습니다. 저는 실제로 몰랐으니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또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평양에 도착하셨다고 외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확인해줍니다.

오후에 국내언론의 보도가 시작되면서 소문은 사실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잠시 멍해졌습니다. 일을 내셨다, 금단의 벽을 넘어가셨다! 우리의 낙담과 원망은 일순간 죄송함으로 급변했습니다.


문 목사님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1989년 3월 25일 북한 평양에 방문해서 4월 3일까지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에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조평통 위원장 허담과 '4.2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했습니다.

통일운동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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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투사로 알려져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사랑과 화해를 전하는 평화의 사제였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은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변혁운동의 지평을 확장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을 넘어 조국통일운동의 질적 고양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4.19혁명 이후에 조국통일운동이 활성화 되었던 역사에 이어, 6월민주항쟁 이후에도 다시 조국통일운동은 활성화되고 있던 때입니다. 1988년 전대협의 청년학생회담의 추진이 조국통일운동의 현상적 기폭제였다면, 목사님의 방북은 질적인 측면에서 조국통일의 방도와 목적성을 분명하게 격상시킨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조국통일운동에 확고한 신념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에도 나타나듯이 조국통일운동 역시 민주화운동과 마찬가지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뜨거운 심장으로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임수경의 방북과 더불어 군사독재 하에서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하셨습니다.

셋째, 평화통일운동의 장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셨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함께 발표한 9개 항의 공동선언은 소영웅주의나 급진적 편향을 넘어서는 민족사적 가치를 지닙니다. 훗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공동으로 발표한 6.15 선언의 모태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단계적 연방제로 통일방안의 접점을 찾은 것은 높은 수준의 국가연합과 고려연방제 간의 간극을 좁히는 중대한 좌표가 되었습니다.

넷째, 통일운동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 민과 관이 모두가 함께하는 운동임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자신을 투옥한 공안정권, 민주화운동의 극복대상인 노태우정권에게조차 자신의 방북성과를 끊임없이 설명했습니다. 절대로 우리 민족에게 찾아온 실낱같은 평화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수사 기간 내내 남과 북의 정권 사이에서 대화를 중재하고 설득한 일은' 레토릭'이 아닌 진정성 있는 실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통일"

마지막으로 반드시 통일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한반도 평화의 시대에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중대한 시사점을 안배해 놓으신 듯합니다.

30년 전에는 UN 동시 가입과 교차 승인의 대두로 '두 개의 한국', 즉 분단고착화에 대한 우려가 깊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1950년 전쟁으로 이어진 분단 이후 국제적으로 분단이 완성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절박함이, 그래서 분단고착화를 수수방관할 수 없다는 목사님의 절박함이 평양행을 결행케 했다고 종종 생각하곤 했습니다.

요즘 성급한 얘기겠지만 북미협상이 잘 타결되면 한반도 평화체제 그 이후의 대안으로 '두 국가 두 체제'의 시대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목사님이 살아계시면 한반도 평화가 다시 분단의 장기화로 귀결되지 않도록 다시 통일의 길을 역설하실 것 같습니다. 비록 두 개의 나라가 장기화 되어도 하나의 시장을 통해 하나의 민족, 하나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라고 웅변하실 것 같습니다. '평화'가 우리 민족에게 복이 되는 참된 길이라고 믿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 30주년을 되돌아보며 높이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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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 남소연

 
#문익환 #이인영 #통일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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