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돌출 행동'이 아니었다

[문익환 방북 30주년 특별 기고 ⑥] 각계각층 통일의지 결집시켜 '가교' 역할

등록 2019.05.16 17:04수정 2019.05.17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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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통일맞이는 방북 30주년을 맞아 당시 전대협, 노동계, 기독교, 학계, 통일운동, 일반 대학생 등 각 부분별로 7명의 기고문을 통해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시대에 '늦봄의 방북사건'을 재조명하고, 판문점선언시대 문익환 방북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찾고, 이를 재평가하고자 합니다. 여섯번째 글은 이유나 한신대 평화교양대학 초빙교수가 보내왔습니다.[편집자말]
남북정상이 2018년에 3차례 걸쳐 정상회담을 이루었고, 올해에는 제4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정부차원의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다. 남북이 갈라선지 70여년동안 남북간의 불신과 적대감으로 인해 얼어붙었던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이라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일들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수많은 남북교류를 비롯한 평화와 통일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들의 결과로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1989년 3월말에서 4월초에 있었던 문익환의 방북은 한국의 민간통일운동사에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 글에서는 1989년 봄 문익환이 왜 방북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방북의 결정적 계기는 '학생들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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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문익환의 방북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은 1950년대 이후 계속되어온 동서 양대 진영의 이념적 대결구도에서 화해와 협력 등 새로운 데탕트가 형성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소련의 평화전략과 미소간의 긴장완화로 동서화해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다시말해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를 반으로 줄이는 등 군비경쟁을 늦추고 중거리 미사일 폐기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당시 미소는 신데탕트체계를 이어갔다.

한편 이런 상황속에서 노태우는 1989년 1월 1일 아침 "새해에는 남북한을 차단하는 대결의 장벽을 허물고 평화통일의 전기를 이룩할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1월 17일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였고, 동시에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북한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중간평가 연기는 통일을 반대하는 보수층을 결집하게 되었고, 이에 맞서 민간통일운동을 추진했던 진보세력도 돌파구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때마침 김일성은 1989년 신년사를 통해 각당 총재와 문익환, 백기완, 김수환 등을 평양에 초청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그 전날 문익환은 방북을 고심하면서 '나는 올해 안에 평양으로 갈 거야'라는 시를 완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익환에게 있어서 1989년 방북의 결정적인 동기는 '학생들의 수난'이었다. 즉 이동수, 조성만 등의 학생들이 통일을 외치며 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학생들의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해서는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는 길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문익환은 남북학생회담과 평양축전을 요구하는 젊은 학생들의 투쟁과 좌절을 보면서 자신이 나서야겠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사실상 정부는 1988년 7.7선언을 통해 북한과 인도적 교류를 도모하고자 했지만, 남북교섭 창구를 정부로 일원화하는 창구단일화 원칙으로 민간통일운동을 단절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7.7선언에 대한 실질적인 이행이 없었다. 이에 문익환은 1989년 4월 베이징 국제클럽 기자회견에서도 설명했듯이, 그는 남북교류가 정부의 전유물이 아닌 민간차원에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와는 상호보완하면서 민간인만이 할 수 있는 민간차원의 기여를 한다는 심정으로 방북을 결행했던 것이다.

1989년에는 동구 및 미소 화해 분위기인 신 데탕트 조성과 남한은 북방정책 일환으로 대북포위 및 개방화를 위한 북한과 대화를 원했고, 이에 발맞추어 북한도 남북정당 및 민간단체 교류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적인 상황하에서 전민련 고문이었던 문익환은 남한의 재야통일운동의 대표자 격으로 정경모과 유원호의 도움을 받아 방북을 결행했다.

'민중의 통일의지 결집시킨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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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봉수교회 앞에서 문익환 목사의 모습. ⓒ 사단법인 통일의 집

 
방북 후 김일성과의 제1, 2차 회담을 통해 역사적인 4‧2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는데, 제3항에서는 북한의 정치군사회담 우선 주장을 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병행 추진하기로 합의했고, 4항에서는 한꺼번이든 점진적이든 연방제 방식으로의 통일에 합의했다. 이는 남북한 정부의 통일 방안을 절충하는 입장이었고, 이 내용은 6‧15공동성명을 통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이어졌다.

문익환의 평양 방문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통일운동의 역량을 한데 모아 민중의 통일의지를 결집시킨 행보였다. 또한 그의 방북은 신앙적 지표와 함께 이동수의 죽음 등 학생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안고 이루어진, 민간 사회단체 대표와 북한 고위층과의 만남이었다. 이는 사실상 통일 의지가 부족했던 남한 정부와 북한 당국의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통일운동에 큰 획을 그었다는 의미가 있다.

문익환의 방북 3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남북은 남북관계의 개선과 발전,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을 통한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위한 길을 모색하며 준비하고 있다. 문익환이 강조했듯이 통일은 외세 뿐만 아니라 남북이 주도권을 쥐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뤄가야 한다. 이념적 우월성을 논하기 보다는 서로의 체제를 인정해주고,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익환의 방북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점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결국 통일도 이를 달성하려는 '의지'와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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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나 한신대 평화교양대학 초빙교수 ⓒ 이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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