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신단은 왜 갑자기 열하에 가게 되었을까

[신열하일기5] 북경에서 열하로 드디어 떠나다

등록 2019.05.30 14:59수정 2019.05.3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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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는 언제나 설레임이다,2층으로 된 열차, 아직 열하까지는 고속열차가 개통되지 않았다. ⓒ 민영인

 
원래 계획은 밤 차로 이동하여 아침에 도착하는 것으로 잡았으나 열하 가는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중국여행사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4월 6일 아침 7시 56분 북경역을 출발하여 열하에 12시 31분 도착이다. 열하는 북경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250km 떨어져 있으며 지금은 청더(承德)라 부른다. 겨울에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에도 특이하게 물이 얼지 않는 곳이라 열하(熱河)라 불렀으며, 당시에는 40~50도의 온천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온천수는 아니다.

8월 1일 연경에 도착한 조선사신단은 예부, 호부에 도착을 알리고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사신단에게는 신분에 따라 쌀과 고기, 야채 등이 지급된다. 이렇게 대기 하고 있는데 만수절(8월 13일)에 맞춰 조선사신단에게 열하로 오라는 전갈이 갑자기 내려왔다. 왜 조선사신단은 갑자기 열하에 가게 되었을까?

이것은 청나라 예부의 실수 때문이다. 예부에서는 황제에게 조선사신단의 도착을 알렸으나 조선사신단을 열하로 보낼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건륭제는 당연히 조선 사신이 열하로 오는 줄 알고 도착할 때가 되었을 것이라 여겨 어디 쯤 왔는지 물었는데, 아직 북경에 대기하고 있다니 노발대발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9일까지 열하에 도착시키라고 호통을 쳤다.

황제의 전갈을 받은 예부의 관리는 조선사신단을 찾아와 자기 목이 달아난다는 손짓을 하며 빨리 짐을 꾸리라고 재촉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보통 사신단의 규모는 마부와 하인까지 합치면 모두 수 백 명에 달한다. 이번 사신단은 250명 규모로 이 중 정사(박명원), 부사, 서장관, 역관 3명, 비장 네 명 그리고 하인들 해서 모두 74명이 열하행에 선발되었고, 이동 수단은 말 쉰다섯 필이다.

나머지는 베이징에 머물렀다. 8월 5일부터 9일까지 닷새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밤낮으로 달려 겨우 열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을 못 자는 고통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연암은 8월 8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 장차 우리 연암 산중에 들어가면 1천하고도 하루를 더 자서 옛 화이 선생보다 하루를 이길 것이고, 코고는 소리가 우레 같아 천하의 영웅으로 하여금 젓가락을 놓치고 미인으로 하여금 놀라게 할 것이다."
 
연암 일행이 밤낮 5일간 달린 청더에 나는 4시간 35분 만에 도착했다. 역을 빠져 나오니 미리 베이징에서 연락받은 여행사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이 고(高)씨라 간단히 자기를 소개하며 샤오고(小高, 중국에서는 보통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小를 성 앞에 붙인다)라 부르라고 한다. 우선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이동할 거니까 큰 배낭은 이곳에 두면 된다고 한다.
 

베이징역 대합실아침 7시 56분 북경역을 출발하는 열하행 ⓒ 민영인

  

열차 차창밖 풍경열하로 이동하는 열차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묘지에는 손질을 하고 꽃을 가져다두었다. 중국에서도 청명절에는 산소를 손보고, 옛날에는 버드나무가지와 도화(桃花)를 놓았다고 한다. 조상을 애도하고 회상하는 의미로 주로 흰꽃을 사용하며 현재는 소박하고 향이 담백한 국화, 카라, 당창포, 흰색 메리골드 등을 주로 사용한다. ⓒ 민영인

 
기차역에서 피서산장까지는 북쪽으로 약 3.2km 떨어져 있다. 입구에 도착하니 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만주족이라고 소개하며 이전에 공무원을 하다 퇴직하였고, 편하게 장라오서(张老师, 장 선생님)라 하면 된단다. 이 두 사람이 떠나는 순간까지 함께 해줘 열하를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여행을 몇 배로 즐겁게 만들어주는 행운이다.
 

피서산장 입구피서산장은 이화원, 졸정원, 류원과 함께 중국 4대 정원의 하나이다. ⓒ 민영인

 
만주족 누르하치(努尔哈赤)는 1616년 만주를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다. 그 후 1644년 순치제가 베이징을 점령하며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여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멸망할 때까지 청나라의 시대다. 장라오서는 자신을 만주족이라 소개하며 기마민족의 후예라 골격이 크다고 한다. 또한 중국 보통화를 가장 정확히 구사하는 지역이 바로 열하인 청더지방이라 소개하며 은근히 약 300년 가까이 대륙을 지배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피서산장은 청 강희 42년(1703년)에 짓기 시작하여 건륭 57년(1792년)에 완성했다. 강희, 옹정, 건륭 3대에 걸쳐 무려 89년이나 걸렸다. 면적은 564만 평방미터(약180여 만 평)에 성곽둘레만 10km에 이른다. 황제는 이곳을 음력5월부터 9월까지 행궁으로 사용했다. 단지 더위를 피하기 위한 행궁이 아니라 북쪽 국경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외국 사신들의 접견도 많았으며, 특히 건륭제의 70세 고희연인 만수절에 연암도 조선 사신으로는 처음으로 열하행궁까지 왔다.
 

피서잔장샤오까오가 여기서는 인증샷을 찍어야 된다고 한다. ⓒ 민영인

 피서산장은 이화원, 졸정원, 류원과 함께 중국 4대 정원에 속하며, 서북쪽은 산(山), 동남쪽은 물(水)인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궁전구, 호수구, 평원구, 산림구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관람 순서는 궁전구로 들어가서 호수구에서 배를 타고 갔다가, 전동차를 타고 평원구를 거쳐 열하를 마지막으로 보고 후문으로 나간다. 겨울철에는 산불예방을 위해 삼림구는 출입을 금지시킨다.

입구에는 피서산장 현판이 걸려 있는데 '피(避)' 자를 자세히 보면 우측의 신(辛)에 가로획이 하나 더 그어져 있다. 이 편액은 강희제가 썼다고 하는데, 당시에 몰랐는지 아니면 황제의 글씨라 알면서도 지적할 수 없어서 그런지 그대로 두고 있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 '길 위에서는 구도자가 된다'에도 올릴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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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 대한민국 힐링1번지 동의보감촌 특리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여전히 어슬픈 농부입니다. 자연과 건강 그 속에서 역사와 문화 인문정신을 배우고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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