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에 이곳에서 프러포즈 하면

[발칸반도 기행 32]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프레셰렌 광장 기행

등록 2019.07.28 11:44수정 2019.07.28 11:44
1
원고료주기
우리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버스터미널에서 슬로베니아(Slovenia) 류블랴나(Ljubljana)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가 자그레브를 떠나자 시 외곽에 펼쳐지는 넓은 평원과 구릉지대가 눈앞에 이어지기 시작했다. 슬로베니아 국경 세관에 도착한 버스는 서서히 멈춰 섰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EU국가인 슬로베니아로 들어가는 외국인들에 대한 검문이 자못 까다롭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 입국.EU 회원국인 슬로베니아 입국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 노시경

 
요새 많은 한국 여행객들이 슬로베니아를 찾기 때문인지 세관원은 대한민국 여권을 보자마자 우리를 통과시켜 주었다. 그런데 우리 버스에 탔던 한 친구만이 세관에서 한참 동안 잡혀 있었다. 플리트비체에서 자그레브 가는 버스를 같이 탔던 말레이시아 여학생이었다.

아마도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이고 말레이시아 여행객이 많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여학생도 마침내 버스로 돌아왔고 서로 안면이 있는 우리는 그냥 어색한 웃음만 나누었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국경을 통과하면서 2시간이나 걸렸고 아내가 조금 힘들어했다.

슬로베니아 땅으로 들어서자 마치 서유럽에 온 것 같은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슬로베니아가 오스트리아의 오랜 지배를 받았고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 중 가장 먼저 독립해서 산업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4차로의 고속도로는 잘 닦여 있었고 가끔 흩날리는 빗줄기가 버스의 차창 밖을 때리고 있었다.

버스는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 안으로 들어섰다. 도시 변두리의 낡고 퇴색한 건물들을 지나 시내로 들어서자 도심에는 잘 정돈된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시가와 신시가를 가르는 류블랴나차(Ljubljanica) 강 앞에 이르자, 다리 입구에서 두 날개를 편 청동 드래곤 4마리가 우리를 반긴다.

이 드래곤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상상의 괴물로서, 류블랴나의 상징이다. 신화 속의 이아손(Iason)은 흑해 동쪽 끝에서 황금 양털을 구한 후, 아르고(Argo) 호 원정대 선원들과 도나우 강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도나우 강 지류인 사바(Sava) 강과 류블랴나차 강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이아손은 류블랴나 근처의 호수에서 큰 괴물, 드래곤을 물리치고 현재의 류블랴나에 도시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드래곤 상을 지나자 류블랴나차 강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구시가의 바로크 스타일 건축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지 않은 적절한 도시 규모가 은은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오랜 역사와 조화를 이루는 아르느보 스타일의 건축물도 현대예술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는 류블랴나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류블랴나에 오기 전부터 궁금했었다. 보통 도시 이름은 주변의 지형을 나타내거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짓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류블랴나'라는 이름은 슬라브어의 '사랑하다'라는 의미인 '류비티(Ljubiti)'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스러운' 도시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지어졌을까?

나는 분명히 이름에 과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럽의 다른 도시에 비해 사랑스러움이 크게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류블랴나 도시 전체에 대한 첫인상은 사랑스럽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느낌은 이제 웬만하면 유럽의 도시에 감동하지 않는 아내의 '도시가 너무 예쁘다'는 표현과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류블랴나 거리의 이발사.깔끔한 이발소 안에서 이발사가 정성스럽게 이발을 하고 있다. ⓒ 노시경

 
우리는 류블랴나 버스터미널에 가까운 숙소에 짐을 얼른 풀고 사랑스러운 류블랴나의 거리로 나섰다. 숙소 바로 옆에는 이발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계속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통형의 이발소 표시가 우리나라와 똑같은 게 너무나 정겨웠다.

이발소 안에서는 덩치 큰 이발사가 손님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발사의 표정과 그의 현란한 가위질에는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 머리카락이 짧지 않았으면 이발 체험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웠다.
 

프레셰렌 광장.류블랴나 거리의 중심광장으로 야경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 노시경

  
우리는 큰길 가 가게들의 쇼 윈도우를 구경하면서 오다가 프레셰렌 광장(Prešerenov Trg)에 들어서게 되었다. 류블랴나의 중심 광장인 이곳에는 류블랴나 시민들과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류블랴나 여행은 이 프례셰렌 광장에서 시작되는데, 이 광장의 이름은 슬로베니아 동전에도 새겨진 프란체 프레셰렌(France Prešeren, 1800년~1849년)의 동상에서 비롯되었다.

프레셰렌 광장에 자리한 프레셰렌은 슬로베니아 국가인 '축배'를 작사한 민족시인으로 그가 사망한 날은 국경일로 지정될 정도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사랑의 도시 류블랴나에서 가슴 절절한 사랑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프레셰렌 동상.슬로베니아의 민족시인인 프레셰렌은 주옥 같은 사랑의 시들을 남겼다. ⓒ 노시경

 
그의 동상을 유심히 바라보면 그의 시선은 한 집의 창가로 향하고 있다. 그 집에는 창 밖을 내다보는 한 여인, 율리아(Julia)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병을 얻은 후 변호사를 그만 두고 시를 썼던 프레셰렌은 33세 되던 해에 한 성당에서 부유한 상인의 딸 율리아를 우연히 보았다가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한번도 고백을 전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고, 죽기 전까지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는 나이와 신분 차이 때문에 그녀에게 사랑을 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실에서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녀에 대한 프레셰렌의 짝사랑은 수십 편의 사랑스러운 시가 되어 슬로베니아인들의 가슴 속에 남게 되었다.

광장을 돌아보면 광장 곳곳에서 '사랑'이 묻어난다. 광장의 중심에 자리잡은 성 프란체스코 성당(Franciškanska cerkev)도 분홍색, 즉 핑크 빛이다. 주변 건물들은 모두 아이보리색 등 은은한 색상들이기 때문에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분홍색만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성당의 분홍색만을 남겨두도록 사진 보정을 한 것 같이 보인다.

엄숙한 성당 전면을 분홍색으로 장식한 류블랴나 사람들의 낭만이 놀랍기만 하다. 이 성당에서는 오후 6시 정각에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하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마저 있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는 그 이름에 걸맞게 정말로 사랑스러운 도시이다.

우리는 광장을 지나 류블랴나차 강 위로 난 세개의 비대칭 다리인 트리플 브릿지(Triple Bridge), 트로모스토비에(Tromostovje) 다리에 올라섰다. 류블랴나의 신시가에서 구시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다리로서, 과거에는 빈과 베네치아 사이를 잇는 다리로 알려져 있었다.

원래는 강 위에 다리가 하나만 있었는데, 유동인구가 많아 교통체증이 일어나자 양쪽으로 다리 두 개를 더 놓아 지금의 세 겹 다리가 된 것이다. 도시의 야경을 강물에 머금은 이 다리는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괜히 세 개의 다리 위를 모두 왔다 갔다 하면서 도시의 활기를 느껴보았다.
 

강변 노천카페.젊은이들이 깊은 밤의 낭만을 즐기고 있다. ⓒ 노시경

  
다리 건너편의 강변으로는 아! 예상 밖의 불야성이 펼쳐지고 있었다. 강변의 수많은 바와 노천 레스토랑에는 대학 도시답게 수많은 젊은이들이 맥주잔을 기울이며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똑같은 바지 위에 치마를 입은 청년들이 식당 좌석을 돌며 즐겁게 무언가를 팔고 있는데, 아마도 이 도시의 '사랑' 전통인 것 같았다. 

이 분위기에 그냥 숙소로 들어가면 억울할 것 같아서 나와 아내는 팝스 플레이스(Pop's Place)라는 유명한 수제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다. 자리는 만석이었는데 다행히 강변의 마지막 자리가 나서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수제 햄버거.바로 구워주는 고기 패티와 하우스 맥주의 맛이 훌륭하다. ⓒ 노시경

 
손님이 많고 주문도 아주 많았지만 젊은 직원들의 대응은 속이 시원할 정도로 신속했다. 주문을 받은 후 바로 구워 나온 생고기 패티는 육즙이 살아있었다. 이 가게의 이름난 양파 튀김과 하우스 맥주는 지금도 이 도시를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류블랴나의 밤.깊은 밤 가로등 아래 젊은이들의 사랑이 이어진다. ⓒ 노시경

  
노천좌석의 비닐 차양 위로 빗줄기가 후두둑 내리고 있었다. 강변에는 얕은 안개가 끼어 있고 가게에서 켜 놓은 노란 조명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마치 사랑과 청춘의 도시 안에 스스로 즐겁게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 늦은 밤, 나와 아내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즐거운 시간 속에 있었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어두운 과거' 폭로하는 노소영 소송의 역설
  2. 2 "미쳤어, 미쳤어"... 손흥민, 그가 눈앞으로 달려왔다
  3. 3 정경심 재판부 "검사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 안 하나?"
  4. 4 휴전 들어간 국회... '검찰 간부 실명공개' 언급한 이해찬
  5. 5 윤석열 총장님, 이건 해명이 필요한데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