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는 학종, 우파는 수능? 조국이 불러온 황당 논란

[아이들은 나의 스승 171] "왜 어른들은 '스카이 캐슬'을 부술 생각을 못하는 거죠?"

등록 2019.08.27 08:30수정 2019.08.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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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영욱(가명)이는 공부에는 젬병이다. 어느 정도냐면,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국영수 세 과목 점수를 모두 합해도 100점이 안 될 때가 많다. 그나마 국어 과목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영어와 수학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그가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중학교 때 친한 친구들이 특성화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공부 한 번 제대로 해보겠다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인문계고등학교를 선택했다. 함께 '놀아본' 친구들은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는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에게 고1은 치열한 한 해였다. 언감생심 반에서 1등인 친구를 목표로 삼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밤낮 책과 씨름을 했다. 중학교 때의 학교생활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은 180도 달라진 그의 모습에 낯설어했고, 정작 가장 놀라워한 건 바로 영욱이 자신이었다.

'즐거웠던' 중학교 3년의 과정을 한 해 만에 벌충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중학교 시절 내내 학교와 학원, 독서실을 순례하던 또래 친구들은 이미 '황새'였고, 자신은 '뱁새'였음을 고백했다. 시험 점수로는 도저히 꽁무니조차 따라갈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의 경험을 더없이 값지게 여겼다. 이 세상에 누구에게든 '허송세월'은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반 1등인 친구를 꺾어보겠노라는 허황된 욕심을 내심 부끄러워했지만, 공부를 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재능이 있는지 알게 됐다며 뿌듯해했다.

책을 읽다가 돌연 다양한 직업과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기도 하고, 문제집을 풀다가 뜬금없이 백과사전을 펼쳐보기도 했단다. 공부가 자연스럽게 적성과 특기, 진로에 대해 고민으로 이어진 셈이다. 곧, 그의 공부는 어떤 일이 자신을 설레게 하는가에 귀결되었다.

여러 가지의 꿈을 노트에 적은 뒤, 스스로 심판이 되어 토너먼트 경기 치르듯 하나둘 지워나갔다. 16강전을 거쳐 8강전, 4강전까지, 그의 가슴을 뛰게 한 직업 네 가지가 추려졌다. 청소년 상담사, 청소년 지도사, 레크리에이션 강사, 그리고 중고등학교 교사.

굳이 결승전은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위의 네 가지 직업은 요구되는 적성과 재능이 크게 다르지 않은 영역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로서 지난 2년 가까이 지켜봐온 경험으로 미루어, 그는 누구보다 그런 일에 어울리고 잘해낼 수 있는 열정과 잠재력이 있다.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에다 친구들을 배려할 줄 알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도 지녔다. 그는 학생회의 임원으로, 아침 방송을 담당하고 있다. 학년 초 학생 아나운서 모집 공고를 냈을 때, 모든 선후배와 친구들이 이구동성 그가 제격이라고 추천할 만큼 재주를 인정받았다.

일주일의 모집 기간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지원 신청서를 내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이미 낙점된 상태였던 셈이다. 스스로도 남들 앞에 서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일에 소질이 있다고 자부하는 터다. 매주 금요일 그의 아침 방송을 기다리는 교사 팬조차 생겨날 정도다.

학교에서 문제집을 푸는 공부는 일단 멈췄지만, 꿈을 향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우선, 방과 후나 주말을 이용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행사 기획을 하는 공익 단체를 직접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실제의 업무가 동일한가를 알기 위해서다.

당시 단체의 대표는 학생 개인이 직접 연락해온 경우는 없었다며 대견해했다. 그곳에서 점심까지 대접받는 호사를 누리며, 마치 직원인 양 구체적인 업무에 대해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교육과정조차 버거워하는 학교에서는 사실상 제공할 수 없는 소중한 진로 탐색 활동이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몇몇 뜻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청소년 문화기획단'을 구성했다. 매월 한 차례 고등학교 생활과 관련된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하며, 소출력 동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웃과 공유하고 있다. 일과 중엔 고등학생이고, 방과 후엔 라디오 DJ인 셈이다.

누구보다 바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인문계고등학생으로서 그의 '앞날'은 그리 밝지 못하다. 무엇보다 국영수의 성적이 바닥이기 때문이다. 그의 내신과 수능 점수로는 그 비싼 등록금 내가며 다녀야하나 싶은 지방의 사립대를 제외하곤 갈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는 아직까지도 청소년 상담사를 꿈꾸는 사람에게 미적분이 왜 필요한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전국의 수십 만 학생들이 죄다 수학에 쩔쩔 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단다. 수학과 '수포자' 중 정작 어떤 게 더 문제인지 따져봐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답변다운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부모도, 교사도, 입이라도 맞춘 듯 '꿈은 대학에 진학한 뒤에 꿔도 늦지 않다'는 어처구니없는 조언만 들어왔다고 말했다. 꿈을 대학입시의 종속 변수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수많은 꿈조차 획일화되기 십상이다.

영욱이는 대학입시가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키워주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국영수 문제집을 풀 시간에, 친구들과 토론하고 상담 기술을 익히고 하다못해 발성 연습 하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할 거라고 여긴다. 적어도 그에게 꿈을 이루기 위해 국영수를 공부하라는 건 설득력이 없다.

결국 대학입시에 결박된 획일화한 학교가 영욱이를 위해 해줄 건 거의 없다. 멀쩡한 진로 탐색 활동 시간에도 수능 대비 문제 풀이를 하는 학교가 태반인 현실에서 더 말해서 무엇 할까. 학교는 단체 생활을 배우는 사회화 기관이라는 '공자님 말씀' 외에는 딱히 들려줄 말이 없다.

영욱이는 굳이 대학에 가야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대학에 가고는 싶지만, 입시 준비를 위해 지금 참여하고 있는 활동을 잠시 유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꿈을 꾼다는 건 시나브로 영글어가는 과정이지, 칼로 매듭 자르듯 잘랐다가 이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흔히들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사람 구실 할 수 있다'고 다그치지만, 기성세대가 아이들에게 할 말은 아니다. 정작 그렇듯 어처구니없는 세상을 자신들이 만들어놓고선 아이들을 욱여넣으려는 건 뻔뻔한 짓이다. 아이들을 다그칠 게 아니라 그들에겐 세상을 바꿔야할 책임이 있다.

우리 교육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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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고려대 학생들이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자녀 ‘특혜 논란’ 진상규명 집회를 열고 있다. 학생들의 정치색 배제 요구에도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도 참석했다. ⓒ 이희훈

 
갑자기 영욱이의 학교생활이 떠오른 건, '조국 사태'로 인해 촉발된 대학 입시 제도에 관한 갈등 때문이다. 이번 일은 그가 그토록 경멸해마지않던 '스카이 캐슬'에 정작 자신도 갇혀있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해 준 사건이다. 대한민국은 좌우를 떠나 기득권이 세습되는 신분제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여실히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불똥이 애먼 곳으로 튀었다. 느닷없이 '학종(학생부종합전형) 폐지, 수능 확대'라는 주장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비등하고 있어서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자녀의 스펙을 문제 삼아 '학종은 불공정하고 수능은 공정하다'는 여론이 다시 힘을 얻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잖아도 '학종이냐, 수능이냐'의 문제는 최근 자사고 폐지와 존치 문제와 맞물려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터다. 우리 교육은 '삼년지대계'도 못 된다고 조롱하지만, 언제부턴가 온통 이해관계만 충돌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돼버렸다. 싸움의 종착역은 물론 입시다.

우리 교육은 고작 '학종이냐, 수능이냐'를 두고 다툴 만큼 한가하지 않다. 학종이든, 수능이든, 아니 아무리 선진적인 입시 제도가 도입된다고 해도, '스카이 캐슬'에 사는 이들을 결코 당해낼 수 없다. 저들이 먹다 남긴 떡고물이 어디가 더 많은지 놓고 싸우는 이전투구일 뿐이다.

심지어 '좌파는 학종을, 우파는 수능을 선호한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다. 대학 입시제도조차 이념으로 재단하려는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다. 더욱 안타까운 건,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는 '아무 말 대잔치'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건 성 안의 귀족들이 수많은 성 밖 백성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사건인데, 성을 부술 생각은 하지 않고, 생뚱맞게 '학종이냐, 수능이냐'를 두고 다투는 이유는 뭘까요?"

영욱이는 짐짓 '남 이야기'라면서도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비유하자면,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아니라, 양반과 상민, 곧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거다. 저들이 신분 세습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학벌구조를 타파하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게 외려 이상하다는 이야기다.

'잘 커가는' 영욱이를 보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성찰해보게 된다. 공부에 젬병인 그를 어떻게든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애면글면하는 게 능사는 아닌 듯하다. 교사로서 아이들이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쏟는 게 맞다.

장담하건대, 영욱이는 '뭐가 되어도 될 놈'이다. 만약 그가 끝내 좌절하고 절망한다면, 그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우리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자꾸만 성적과 학벌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려하지만, 전국의 학교에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수많은 영욱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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