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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마시다 도망가는 김지영... 그게 나였다

['김지영'과 나] 영화 속 말들이 하나도 낯설지 않았던 이유

등록 2019.11.08 19:48수정 2019.11.0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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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 속에서 발견한 저마다의 삶과 사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남편은 보통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게 무엇이든 큰돈 드는 일이 아니라면 언제나 응원해준다. 그날도 평소의 남편이었다면 영화 보러 간다는 내 말에 "좋네. 잘 보고 와. 보고 와서 어땠는지 나한테도 얘기해줘"라며 흥미로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러 간다고 하자 남편의 얼굴에 순간 씁쓸한 냉소가 스쳤다.

"그거 소설이 원작이지? 사실 난 좀 불편하더라. 모든 게 다 남자들 탓이라는 것 같아서. 영화도 그러지 않을까?"

결국 나는 께름칙한 마음으로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사실 영화관에 가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이 낳고는 한 번도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으니까. 두 아이가 모두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낮에 여유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혼자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영화관에 간 적은 없다.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한가하게 놀러나 다니는 여자'로 보일까 봐 밖에서 몇천 원 쓰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주인공인 지영(정유미)이 유모차를 끌고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저 멀리서 어떤 남자의 하소연이 들려온다.
 
"아! 부럽다, 부러워!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한가하게 커피나 마시고. 나도 누가 벌어다 준 돈으로 커피 좀 사 먹어 보면 좋겠다." -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중에서

직장 동료들을 코 앞에 두고 굳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는 남자의 비아냥에 지영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다. 그 뒷모습은 곧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내가 '김지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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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결혼을 하려면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하면 남편이 있는 지방으로 가서 살아야 하는데, 비정규직 사원인 내게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는 것밖에 선택권이 없었다.

결혼해서는 시가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주로 내가 집안일을 맡게 됐고, 신혼인 3년 동안은 아이가 생기지 않아 오전과 낮 시간에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터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일들 때문에 결국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됐는데, 당시 내가 들은 말은 "그래, 돈이 급한 것도 아닌데 뭐. 집에서 쉬면서 애 가질 준비나 해"였다. 그 말 자체도 순간 나의 사고를 일시정지시킬 만큼 충격적이었지만, 나에게 그 말을 한 사람이 같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더 서글펐다.

첫아이를 낳은 뒤 시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배를 만지며 "배가 얼마나 들어갔나? 애 낳고 살 빼야 된데이. 애 낳고 살찌면 남편 바람 난데이"라고 웃으면서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시어머니만 그러신 게 아니었다. 친정 엄마에게도, 동네 할머니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한참 동안 들어야 했다. "애 낳고 운동 안 하면 붓기가 그대로 살이 된다. 그렇게 찐 살은 평생 안 빠진다", "집에서 애 키우면서도 여자는 좀 꾸며야 한다" 등등.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남편의 배가 더 나왔는데도 남편한테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심지어 남편이 조금 부스스한 모습으로 밖에 나가면 핀잔을 듣는 건 오히려 나였다. 영화 속 지영이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들은 내게 하나도 낯설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 역시 사는 동안 그와 같은 말들을 계속 들어왔고, 지금도 듣고 있으니까.

"요즘 지영이 많이 힘들 거야. 저 때가 몸은 조금씩 편해지는데 마음이 많이 조급해지는 때거든. 잘한다, 고생한다, 고맙다, 자주 말해줘." -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중에서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며 베란다 창밖으로 바쁘게 오가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을 보며, '나도 저들처럼 다시 사회로 나갈 수 있을까?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속으로 수도 없이 묻곤 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는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나는 평생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다가 죽을 것만 같아 불안했다.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영화
 

영화 < 82년생 김지영 >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지영의 삶은 나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감독이 나의 삶을 몰래 들여다보고 영화를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영화 속 '김지영'은 곧 '나'였다. 그렇게 느낀 사람이 분명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상영관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까. 영화를 보고 난 후 들른 화장실에서 본 그녀들은 하나같이 눈과 코끝이 빨갰다.

남편의 우려와는 달리 영화는 모든 것이 남자들 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당신이 나를 만나서 이렇게 아픈 것 같아서 미안해"라고 흐느끼는 지영의 남편 대현(공유)의 등을 꼭 안아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영화를 보고 가장 크게 느낀 건 한 가정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부부 모두 각자의 이름을 지키며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점이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 상황을 개선할 수가 없다.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들 역시 영화 속 대현처럼 직장에 육아휴직 제도가 있다 해도 그 당연한 제도를 선뜻 이용할 수 없다. 육아휴직 후 회사에서 내 책상이 없어질지도 몰라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녀의 대립은 무의미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나 하나 살아남기도 벅차서 상대방의 힘듦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걸지도. 이런 상황에서 남녀의 자리싸움이 다 무슨 소용이며, 개인의 노력이 무엇을 얼마만큼 바꿀 수 있을까.
 
"저기 모퉁이를 돌면 출구가 있을 것 같은데 또 벽이고, 다른 모퉁이를 돌아도 다시 벽이고, 어쩌면 처음부터 출구가 없는 것은 아닐까. 아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출구를 찾았는데 나만 못 찾고 이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중에서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견고한 벽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되돌아가도 벽이 있고, 다른 길로 가도 또 다른 벽이 있어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면, 두드려야 한다. 어쩌면 삶이란 내 앞의 벽을 두드리고 허물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동안 우연히 중년 여성들의 감상평을 엿듣게 되었다.

"괜찮네, 잔잔하고. 그냥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네."

나에게는 한 인간의 치열한 투쟁으로 다가왔던 영화 속 그들의
삶이 누군가에겐 잔잔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보일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영화 속 인물들의 필사적인 일상이 그저 잔잔하게 느껴질 만큼 그보다 더한 투쟁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셀 수 없는 체념들이 굳은살처럼 배겨서 무뎌진 것일까.

나중에 내 딸들은 자라서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무슨 말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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