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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성과 정맥(正脈)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 79회] 학살자들의 재심을 비롯 망언자의 처벌 등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등록 2019.12.11 17:30수정 2019.12.1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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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영정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권우성

5ㆍ18광주항쟁은 신군부에 의해 압살당한 우리 민주주의의 맥을 살리고 전승하는 민주화운동이었다.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체제로 민주주의가 질식되었다가 10ㆍ26 의거로 간신히 소생하던 것을 전두환의 5ㆍ17쿠데타와 광주학살로 명맥이 짓밟혔다.

광주항쟁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더 긴 세월 압제에 시달리고 민주주의는 지체되었을 것이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학생ㆍ노동자ㆍ민주인사들의 잇따른 분신ㆍ투신ㆍ자결 등, 자신을 던져 민주화의 불꽃을 잇고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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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집결한 광주시민들. 이날 시민들이 목이 터져라 부른 애국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국가는 그 국민을 죽였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5.18 기념재단

 
4ㆍ19혁명이 민주화의 디딤돌이었다면 5ㆍ18광주항쟁은 징검다리가 되고, 6월항쟁은 건널목이고, 촛불시위로 마침내 광장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5ㆍ18의 역사성과 가치, 성과 그리고 지금 어느 지점에 이르렀고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지, 나름의 정리를 시도한다.

첫째, 복합적인 시민혁명의 성격을 갖는다.
항쟁에는 근로빈민ㆍ농업ㆍ무직ㆍ운전기사ㆍ영세업자ㆍ행상ㆍ노점상 등 기층민중과, 학생ㆍ회사원ㆍ교수ㆍ교사ㆍ공무원ㆍ성직자ㆍ변호사ㆍ약사 등 중산층이 두루 참여하고, 사망자ㆍ부상자ㆍ구속자ㆍ실종자의 계층도 다양하였다.

구속자, 사망자, 부상자, 직업분류 (주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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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자, 사망자, 부상자, 직업분류 구속자, 사망자, 부상자, 직업분류 ⓒ 김삼웅

 
둘째, 5ㆍ18의 목표가 뚜렷했다.
민주주의회복ㆍ불법적인 비상계엄 철폐ㆍ유신잔당 퇴진ㆍ김대중 석방 등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계엄 당국과 족벌신문 등이 붉은 색을 칠하려고 시도 했지만, 시민들의 시위구호나 각종 성명서ㆍ유인물은 하나같이 민주주의를 목표로 삼았다.

셋째, 무장봉기를 들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제외하고는 민중운동사에서 무장봉기의 경우는 찾기 어렵다. 광주항쟁은 박정희 군부독재 18년을 겪은 시민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신군부의 계엄 특수부대와 대항하려면 일정한 무장이 요구되었고, 정당방위 차원에서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해서 계엄군으로부터의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넷째, 민족자주정신의 체현이다.
항쟁기간 평화통일론이 제기되고, 미군의 역할과 주한 미대사의 망언이 전해지면서 민족자주론이 나오고, 항쟁 후에는 대학생들이 광주미문화원과 부산미문화원 등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5ㆍ18 당시 미국의 책임을 묻게 되고, 일부에서는 주한미군철수론이 제기되었다.
  

광주 양동 시장 상인들이 시민군들을 위한 밥을 짓고 있다.양동시장은 5·18 민중항쟁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 5.18 기념재단

 
다섯째, 시민공동체 정신의 발현이다.
행정질서가 마비된 상태에서 그리고 외부와의 연결이 차단된 상황에서 시민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생필품을 나눠쓰고, 헌혈에 앞장서는 등 자치와 코뮨을 이루었다. 우리 역사에서 보기드문 사례에 속한다.

여섯째, 고도의 도덕성을 유지하였다.
항쟁기간 상당량의 총기가 시민들 손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은행ㆍ백화점ㆍ금은방ㆍ부호 등이 단 한 건도 털리거나 습격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계 각국의 시위사태에서 나타난 현상과 비교할 때 특수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광주항쟁은 그만큼 도덕성의 바탕에서 진행되고 윤리성이 지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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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 5.18 기념재단

 
일곱째, 광주항쟁으로 인해 신군부에 의해 수립된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이 국민적 정통성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5ㆍ16쿠데타와 유신정변이 반헌법적인 역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연속성을 갖는 데 비해 5공과 6공은 역사적인 정당성과 정통성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은 광주항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덟째, 군부의 정치개입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불법적인 계엄군에 광주의 시민군이 맞서고, 항쟁 이후 전두환ㆍ노태우 등 주모자들을 법정에 세우면서, 군부 내의 야심가들에게 레드카드가 제시되었다. 다만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국군기무사 조현천 사령관 등이 위수령과 계엄령선포 등 쿠데타를 모의한 것은, 아직도 군부내에 '정치군인'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음모를 발본색원하도록 국민적인 감시가 절실한 과제이다.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받쳐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 5.18 기념재단

 
아홉째,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진 영남 출신이 대통령을 차지하여 정권을 독점해온 것을 광주항쟁의 정신이 호남 출신의 김대중으로 잠시나마 교체됨으로써 지역평준화를 이루게 되었다. 김대중의 집권은 해방 후 최초의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임과 더불어 지역교체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 뜻에서 정치발전의 큰 요인으로 지목된다.

열번째, 광주항쟁은 민족사의 면면한 저항의 맥락을 승계하고 확산하였다. 동학혁명→만민공동회→의병→3ㆍ1혁명→임시정부→의열단→독립군→광복군→4월혁명→부마항쟁→광주 민주화운동→6월항쟁→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정맥(正脈)을 잇고, 향후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의 동맥(動脈)으로 작용할 것이다.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모습이 담긴 5·18 미공개 영상 중 일부.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으로 희생된 가족을 보내며 오열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광주드림

 
광주민주화운동이 역사의 정좌(正座)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학살자들의 재심을 비롯 망언자의 처벌 등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주석
3> 전청협, 『광주』 제3호.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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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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