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온 몸으로 살아낸 자리에 피어난 씀바귀 꽃" 같은 시

'발해로 가는 저녁' 펴낸 정윤천 시인

등록 2019.12.17 10:39수정 2019.12.17 10:39
1
원고료로 응원

정윤천 시인 한해가 저물어 가는 계절,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겨울 문턱에서 따스한 입김 같은 시의 숨결을 불러일으키는 정윤천 시인을 찾아 나서본다. ⓒ 정윤천 시인 제공


"좋은 시를 쓰려면 시에게로 고도의 집중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는 것, 보는 것, 느낀 것을 옮겨 쓰는 게 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것들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비롯되는, '신생'이어야만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태어나지요."

한해가 저물어 가는 계절,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겨울 문턱에서 따스한 입김 같은 시의 숨결을 불러일으키는 시인을 찾아 나서본다.


그는 전남 화순 출생으로 첫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을 시작으로, '흰 길이 떠올랐다' '십 만년의 사랑' '구석'등의 작품집을 통해 그 이름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중견 시인이다. 등단(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계간 실천문학 신인) 30년을 넘어선 올해 여섯 번 째 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을 펴냈다.

시집의 표제시인 '발해로 가는 저녁'은 어머니의 임종을 목도해야하는 뼈아픈 시간을, 까마득히 소멸해 버린 왕국인 "발해"에 얹어 표현해낸 문제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이 시를 통해 작년에 실시한 제 13회 지리산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지리산 문학상 수상 작품집'으로 펴낸 이번 시집은 발간 초기에 4쇄를 기록하였는가 하면, 2019년 3분기의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도서에 뽑히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에서 이경림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정윤천의 말들은 온 몸으로 살아낸 자리에 피어난 씀바귀 꽃 같다. 신산한 누대의 삶들이 즐비하게 누운 들판에서 누군가 나직이 흥얼거리는 노랫가락 같다. 그것은 그가 걸어온 길에서 만난 키 작은 풀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중략) 그의 언어는 먼 시간의 저편에서 들리는 고어처럼 신비하고 낯설다. 나직이 흥얼거리는 그의 노래는 쇠 치는 대장간, 어느 장터의 국밥집, 호미자루를 고르는 노파, 팔뚝 굵은 대장장이 등 눈물겹도록 정겨운 민초들이 있다. 그것이 발해라는 시간의 소서사이며 이 민족의 대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보여주고 있는 소소한 일상들은 사라진 시간의 저편과 닿아있고 그것은 내 존재의 뿌리 어머니에서 비롯된다. 깊이 있는 사유와 노회한 비유, 돌올한 말의 운용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시집에 당분간 붙들려 있을 것 같다." 

지난 10일 만난 정윤천 시인은 이 시집에 관한 소회를 짧게 밝혔다.  

"이런저런 이유로 꽤 오랜만에 발간된 시집입니다. 그간에 써온 시들과 크게 다를 바 없기도 하지만, 이번 작품집에서는 예의 '서정시의 소환과 갱신'이라는 시 작법에 고심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서정시를 통해서도 현대성을 도출하고 언어의 질감과 미적 사유를 부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였지요. 그렇게 나타난 시들이 '초년' '마루' '서정시 같았다' 등의 시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파괴와 혁신과 질서의 옹립이야말로 영원한 시의 문제의식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는 한편으로 대학의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 등에서 시를 강의하는 스승의 입장에 서있기도 한다. 독자이거나 배우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으로 '좋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꼽기도 했다. "시에는 '깨달음'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그의 대답이었다. 시인이 말하는 시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음이 올 때까지 시 앞에 앉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었다.

최근에 그가 읽었다는 한 편의 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는 '좋은 시'란 이런 것이라고도 전했다.
 
"챔파꽃이 피는 강변에/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큰 도시의 공장으로/ 다른 소년이 일하러 나가는 동안/ 소년은 늘 혼자였습니다/ 물소들이 두 개의 뿔과 코만을 수면 위에 띄워 놓고/ 강둑 이쪽에서 저쪽으로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강을 건너는 물소들의 뿔마다/ 챔파꽃 한 가지씩을 걸어주었습니다/ 챔파꽃 화관을 쓴 물소들이/ 끝없이 강을 건넜습니다/ 물소들은 이 세상의 어느 끝을 살다가도/ 이 강변을 향하여/ 어슬렁 어슬렁 걸어왔습니다/ 물소들은 챔파꽃 화관을,/ 소년을 사랑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챔파꽃 피는 강변에/ 한 늙은 뱃사공이 살았습니다/ 강을 건너는 물소들의 뿔에/ 챔파꽃 가지를 매달아주며/ 언젠가 물소가 되어 돌아올 그 자신을 기다렸습니다." -곽재구, '인도' 전문
 
정윤천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시인의 세계관이 녹아 있고, '사실'이 아닌 '진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소년이 물소에게 실제로는 화관을 걸어줄 수 없다는 사실) "사진보다 정확한 묘사 (물소들이 뿔과 코만을 수면 위에 띄워놓고) 등에서 나타난 진술. 소년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늙은 뱃사공이 되었으며, 자신(소년)이 바로 물소가 되는 지점에 대한 각성을 불러 일으켜 주어, 공감으로 이어지는 세계를 획득해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시가 창작의 태도에서부터 어떤 목적성을 갖거나 이데올로기적인 편협함에 갇히게 되는 경우 별로 좋은 시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시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도 마음의 문과 귀를 열면 누구나 시를 향유하고 즐길 수 있다"며 실생활에서의 시의 효용성에 대한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정윤천 시인은 "개인적으로 나의 생은 절반 이상이 방황과 절망의 시간이었다. 여러 방면의 일들과 사업 등에도 손을 대보았지만 잘 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며 "오랜 방황 끝에 나를 돌려 세워 주었던 것은, 역시 시와 함께 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가 자신의 시 앞으로 돌아와 깨달음의 문을 노크하기 시작하였던 건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이다. 그는 그동안 수백편의 시를 지어서 버리기도 했으며, 수많은 시와 이론서들을 탐독하는 것으로 현재의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게 됐다.

향후 정윤천 시인의 소망은 '발해' 이후의 시들을 모아 가까운 시간에 새 시집을 발간하는 것이다. 강의와 출판 등에 대한 작품 외적인 활동에도 하나씩의 그림(틀)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시인과의 대화는 얼마든지 길어질 수도 있었으나 사정상 이쯤에서 시종 훈훈했던 대담의 시간을 마치기로 하였다.

발해로 가는 저녁 - 제13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시집

정윤천 (지은이),
시산맥사, 2019


#정윤천 #발해로 가는 저녁 #화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누리의 뜻처럼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바른 소리꾼이 되고싶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