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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엄마의 나이가 되어 갱년기를 앓아보니

엄마에게 위로가 되었던 화분 키우기... 그런 엄마를 닮아가는 나

등록 2019.12.18 09:32수정 2019.12.1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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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수국만 보면 엄마가 좋아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 이경희




 "에고 이뻐라~~ 우리 집 수국은 색깔이 참 이뻐. 파란색 수국이 잘 없거든."

엄마는 마당 한구석에 있는 커다란 수국 화분에 물을 주며 행복해하셨다. 어린 시절 작은 한옥에 안방은 주인 할머니가 사셨고, 우리는 건넛방 2개에 다섯 식구가 세 들어 살았다. 나중에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어도 아랫방 2개를 세를 주어야 했으므로 항상 가족 수보다 작은 방에서 지내야 했고 나는 부모님과 한 방에서 커야 했다.

그런 사정이니 나는 부족한 공간 곳곳에 화분을 두는 것이 못마땅했다. 크고 작고 둥글고 사각진 화분들이 걸리적거리게만 느껴졌다. 사람 몸 둘 곳도 없는데 화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가족들의 지청구에도 화분 키우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엄마를 위한 유일한 소비는 봄이면 하나씩 들여놓는 화분이었다. 엄마에게 화분은 어떤 의미였을까?

내 기억 속 엄마는 그리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내가 초등학교 때의 엄마는 몸져 누워 있는 경우가 잦았고, 어려운 살림과 철없는 자식들의 행동에 짜증이 부쩍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그때 갱년기를 넘기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자식들 중2병을 이기는 게 엄마들의 갱년기라고 사회에서나 가족들이나 어느 정도 공감하고 배려하는 분위기지만, 그 시절에는 아내이고 엄마이기만 했던 주부의 갱년기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늦은 나이에 막내인 나를 낳고, 딸이라 좋았다는 엄마. 하지만 그 하나뿐인 딸조차도 엄마를 이해하기에는 철이 없었고.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도 많았기에 다른 살가운 딸들처럼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가족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홀로 정체 모를 '앓이'를 하고 계셨던 거다.

이제 내가 엄마의 나이가 되어 갱년기를 앓으며 생각해보니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화분과 소통하는 그 시간이 엄마의 취미이자 힐링의 시간이었음을 알겠다. 생활에 지치고 가족으로부터 피해있고 싶을 때 엄마는 작은 화분에 엄마만의 은신처를 만들어 놓고 조용히 화분을 들여다보았던 거다.

파릇파릇 올라오는 작은 잎들로부터 마음의 위로를 받았나 보다. 지금도 엄마 곁에는 자식들보다 화분들이 더 오래 더 가까이 엄마를 지켜주고 있다. 그렇게 알록달록한 화분들은 엄마의 오랜 벗이 되었다.
 

구순이 다 된 엄마가 매일 들여다보는 작은 화분들. ⓒ 이경희

 
이제 내가 내 어린 시절의 엄마처럼 화분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화분을 귀찮아하고 성가셔 하던 내가, 화사하게 꽃핀 화분을 가져다가도 말려 죽이기를 밥 먹듯 했던 내가 화분 갈이를 하고 가지에서 뿌리를 내려 새끼도 친다.

화분을 들여다보며 미소 짓고 작은 화분들에서 일어나는 그 소소한 변화가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을 느낀다. 그 고요한 시간이 생활에 지친 내게 휴식을 준다. 터질 것 같이 복잡한 머리도 쉬게 해주고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던 감정도 시원하게 식혀준다.

그러면서 '아~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며 엄마를 떠올린다. 고단한 인고의 세월, 팍팍한 인생을 살면서 작은 화분들을 통해 위로를 얻었을 엄마의 마음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우리 집에 손님이 오면 화분이 많네요 한다. 그러면 "네~" 하고 웃으며 항상 엄마를 떠올린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오래도록 시들어 있던 화분에 맺힌 꽃봉오리를 보고 손뼉까지 치며 "어머~~~ 드디어 꽃이 맺혔네 아이고 이뻐라~" 오래전 엄마의 한마디가 내 입에서 나왔다.
 

나를 손뼉 치며 기쁘게 만들었던 꽃봉오리. ⓒ 이경희

#엄마 #어린시절 #꽃화분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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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질풍노도 시기를 넘기고 있다. 이 시간이 '삶'을 이해하는 거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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