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에 휩싸인 칠레, 우리가 알아야 할 인물

[서평] '피노체트 넘어서기'

등록 2019.12.19 11:21수정 2019.12.1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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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자와 싸우는 일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독재자는 군대, 경찰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압박할 수 있고, 투표 방식과 시기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국민들이 독재자를 싫어하더라도 표현하기 어렵다. 독재에 참여하지 않는 세력들은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해외에 망명하거나 떠나서 힘을 결집하기 힘들다.

그런데, 독재자와 싸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바로 독재자와 싸우고 정권을 획득하여 독재자를 넘어서는 것이다. 독재자와 싸우거나 독재자에 협조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해도 새로운 정부를 이끌어서 성공시키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독재자가 만든 공포가 남아있는 사회와 권력만을 바라보는 관료, 비타협적인 제도를 두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노체트넘어서기 ⓒ 리카르도라고스

 


그 과정의 어려움을 정리하고 기록한 책이 있다. <피노체트 넘어서기>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의 외교관이자 경제학자를 지낸 저자가 피노체트 정부와 싸우고 대통령이 되어 정부 개혁을 이끄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독재자와 싸워 나가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냉전 시기, 남아메리카의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정치인이 진보적인 기치를 내걸고 집권했다. 그러나 엄혹한 냉전 시기에, 그것도 하필 미국의 앞마당인 남미에 진보 정부가 들어선다는 사실이 우익 세력을 자극했다. 미국은 칠레의 진보화를 불쾌하게 여겼으며 칠레 군부 역시 쿠데타를 시도했다. 아옌데 정부 내내 혼란이 거듭되었고 아우구스트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로 결국 아옌데 대통령은 자결을 선택했다. 이리하여 정부는 몰락하고 아옌데 정부의 지지자들은 사살되었다.

저자는 미국 유학을 통해 경제학을 배운 학자로 아옌데 정부에서 공직에 임명되었던 사람이었기에 일단 외국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정부를 이루었던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테러를 통해 살해당하는 가운데, 그는 상황을 보아 다시 칠레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피노체트 장군이 다스리는 칠레로 돌아갔다.

당시 칠레는 철통같은 군사독재 체제에 미국과 영국의 외교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피노체트 장군은 반대자들을 처형하거나 본보기를 보이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공부문의 개입을 최소한 줄이고 시장에 자유를 주는 개혁을 실시했다. 시카고 대학에 유학을 갔다 돌아온 '시카고 보이'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이끌고 국가의 개입을 최대한 차단함으로써 공공 부문의 시장주의화를 이끌었다.

이로 인해 공공 서비스의 질이 형편없어지고, 교육같은 필수적인 부분에서도 국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피노체트 정권은 외국에서도 망명 인사를 살해하기 위해 테러를 자행, 많은 국가들의 외면을 받았으나 시장주의 개혁을 통해서 일부 서방 국가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대처는 피노체트의 '긍정적 유산'을 치켜세웠으며, 아옌데 시절의 '혼란스런 집단주의'를 극복하여 칠레를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모델'로 전환했다고 하며 피노체트에게 신뢰를 표시했다. -82P


요컨대, 교육제도는 최악의 상태에 있는 칠레의 불평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으며, 시카고 보이들에 의해 반복해서 복제되었다. 농촌 학교들은 열악한 자원과 무관심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그때는 심지어 교과서조차도 고려 사항에서 뒷전으로 밀려날 정도였다. -208P
 
저자는 이런 피노체트 정권과 싸우기 위해서는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저자는 군사적인 움직임이나 테러를 통해 피노체트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지 않고, 중도적이고 온건한 대안을 모색하는 세력과 연대하여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반 피노체트 전선을 꾸릴 수 있도록 연대했다. 그리고 저자와 동료들이 진보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투쟁적인 이미지가 덜한 이를 대표로 내세워 대중적인 정치를 시도했다.

이후 칠레에 경제 위기가 찾아오면서 피노체트 정권은 흔들리게 되었다. 미국은 독재자를 지원하는 일이 장기적으로는 좋지 못한 일임을 깨닫고 거리를 둔다. 결국 피노체트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고 저자와 연합한 정당들은 투표를 통해서 피노체트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반 피노체트 연합의 장기간에 걸친 연정이 실시되고 저자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칠레의 학생들을 위해 교육 정책을 개선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진료를 받게 만들기 위한 의료정책, 군부 시대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의 행방을 조사하는 정책을 실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그냥 퇴임한 것이 아니었다. 피노체트는 떠나기 전 개정에 동의하는 의원의 수가 3분의 2를 넘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시장에 친화적인 체제와 개정된 선거구제도를 남겨놓고 떠났다. 이로 인해 반 피노체트 연합은 결국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시장주의적인 체제를 수정하지 못하고 제한된 개혁을 수행했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다른 국가에 비교해보면, 칠레는 모범적인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다. 그러나 책에 따르면 오랜 세월 인구의 상당수가 지붕이 없는 집에 살았고, 처참한 수준의 보건 서비스가 제공되었으며, 농촌 학교 상당수가 교실 관리도 힘들었다고 한다. 시장주의적인 개혁을 통해서 양극화가 극단적인 수준으로 진행되었고 정부는 사회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정치인이 되고 자국의 국민들을 위해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공공 서비스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의 칠레에서 교통요금 인상을 계기로 수많은 시위와 폭력이 발생한 것을 보면 아직도 칠레에는 피노체트의 상흔이 사라지지 못한 듯하다. 이 책과 지금의 현실은 한 번 시장주의적 개혁을 통해 상처를 입은 사회는 쉽게 회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피노체트 넘어서기 - 칠레 민주화 대장정

리카르도 라고스 (지은이), 정진상 (옮긴이),
삼천리, 2012


#칠레 #신자유주의 #시장 #정치 #피노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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