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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한 달 만에 전주성 점령했으나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40회] 동학농민군은 비록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지만 여전히 사기는 높고 의기가 충천하였다

등록 2020.01.20 21:11수정 2020.01.2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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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 현재 남은 전주성의 흔적 중 하나인 풍남문. 한옥마을·경기전·전동성당 인근에 위치해 있다. ⓒ 이준혁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5월 3일에는 설욕전에 나섰다.

농민군 5천여 명이 전주성 북문을 열고 나와서 관군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화력도 크게 향상된 터이어서 전투는 농민군의 참담한 패배를 가져왔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 5백여 명이 다치거나 죽었다.

농민군 지도자 김순명 등이 죽고, 전봉준은 머리와 허벅지를 다쳤다. 이날 오후 6시경 농민군은 성안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의 투지를 두려워하여 공격을 피하고 완산에서 위협적인 발포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본인 연구가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한다.

1일 오전 10시 동학농민군은 돌연 남문을 나와 경군 진지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진교를 건너 남북 2대로 갈라진 동학농민군은 완산 주봉에 있는 경군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남쪽으로 향한 일대는 순창가도로 나아가 남고천을 건너 곤지산으로 올라가고, 또 다른 일대는 전주천의 좌안을 끼고 완산동으로 들어가 주봉을 공격한 다음 건너편 검두봉 언덕에 포진한 관군의 일대를 역습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일거에 완산을 점령하고 본영을 공격하기 위해 매곡을 사이에 두고 주봉과 검두봉 사이에서 일대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손에 손에 창, 대창, 화승총을 들었고, 그 가운데는 무기를 가지지 않은 자도 있어 이들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진격하였다. 이들 동학농민군은 탄환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으로 노란 종이에 주문을 써서 등에 붙이고, 또 십 수인씩 집단을 이루어 높게 백포장을 펴 세우고, 주문을 큰소리로 외며 비 오듯 쏟아지는 탄환 속을 뚫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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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1909년 전주성문안 풍경 ⓒ 전주역사박물관

 
경군은 신예무기로써 이들을 요격하였으므로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가 났지만, 조금도 이에 굴하지 않고 언덕배기를 기어 올라갔다. 이 때 후방 주봉 위에 결진하고 있던 강화병이 내려와 경군을 응원하는 바람에 양군은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불리하고 경군의 우수한 화력을 당할 수 없었던 동학농민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결국 성 안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때는 오후 4시경이었다.

5월 2일 경군은 다시 구르프포와 선회포로써 완산 위에서 성 안의 동학농민군 진지를 맹포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기전이 부서졌다.

5월 3일 동학농민군은 일대 설욕전을 시도하게 되었다. 오전 10시경 동학농민군은 서문과 북문을 나와 완산 칠봉의 최고봉인 유연대를 향해 물밀듯이 공격해 갔다. 그 군장과 위용은 1차 공격 때와 같았다.

경군은 크게 동요하여 남쪽으로 궤주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를 추격하여 일거에 다가산을 점거하고 경군의 본영으로 육박해갔다. 그러나 관군은 다시 포탄을 퍼부으며 이에 맞서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고 용장 김순명과 14세의 동장사 이복용이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500여 명의 많은 전사자를 냈다.

오후 6시 무렵 동학농민군은 다시 성안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2차에 걸친 공격전에서 비록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은 만만한 투지를 과시하였다. 초토사 홍계훈은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투지를 두려워하여 성안으로 공격은 피하고 완산 위에서 여전히 위협적인 발포만을 하였다. (주석 16)

 

'경사스러운 터에 지어진 궁궐'이라는 의미를 가진 경기전은 조선의 오랜 역사뿐만 아니라 나무들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 김이삭

 
농민군은 이번 완산전투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처음으로 패배의 '쓴 맛'을 보게 되었다. 장수 중에서도 죽거나 사로잡힌 이가 있었다. 그러나 전주성은 여전히 동학농민혁명군의 깃발이 휘날리는 혁명군의 진지가 되고 있었다. 관군은 전주성을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비록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지만 여전히 사기는 높고 의기가 충천하였다.

아, 원평집회로 따지면 1년 조금 넘게, 고부봉기로 따지면 4개월이 못 되게, 무장봉기로 따지면 한 달이 조금 넘게, 끝내 호남의 심장부요 나라 살림의 4할을 넘게 갖다 바치는 호남의 수부가 마침내 농민군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다. 이날 초여름의 햇살은 따사롭게 전주성을 내리쪼이고 있었다. (주석 17)


주석
16> 『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1)』, 176~177쪽.
17> 이이화, 앞의 글, 25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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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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