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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여, 청소년의 눈치를 더 보시라

[아직은 선거권 없는 청소년의 주장] 우리 청소년이 선동당해 투표할 거라고요?

등록 2020.01.08 13:26수정 2020.01.0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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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회원들이 지난 2018년 3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에서 열린 선거연령 하향 촉구 농성 돌입 기자회견에서 삭발 후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남소연

 
2018년 3월, 선거연령 하향을 위한 삭발식을 기점으로 농성이 이뤄졌다. 나는 경남에 살지만 농성 기간에는 매주말마다 서울을 오갔던 기억이다. 선거연령 하향조정을 바라는 이들 모두 함께 자유한국당사 앞에서 "선거연령 하향"이라고 큰소리 치기도 하고, 국회 앞 농성을 하면서 동요를 개사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그러다 농성의 막바지 밤, 선거연령이 하향돼야 하는 이유를 함께 이야기한 적이 있다. 촛불 하나 들고 말이다. 가정에서 폭력을 당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일, 결국 집을 나왔지만 알바를 하면서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했던 일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삭발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번엔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결국 선거법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우린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져야 했다.

그 뒤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마침내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하향됐다는 소식이 여의도에서 들려왔다. 나는 총선 때 만 17세라 여전히 투표를 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18세 선거권'의 의미

학교에서 학생들은 두발·복장 규제, 소지품 압수, 교문지도 등 많은 부당한 일을 당한다. 하지만 쉽게 대응하지 못한다. 학교에서 두발복장검사를 일컫어 부르는 '생활검열'이 이뤄지면 많은 교사들이 교실에 들어와 나와 내 친구들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살펴본다.

검사가 끝나고 교사들이 밖으로 나가면, 반 친구들은 수치스럽다면서 크게 화를 내곤 한다. 수업시간에 화장을 하고 있다고 뒷머리를 세게 맞고, 잠을 잔다고 등을 세게 맞는다. 때로는 단체 얼차려로 오리걸음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교사들이 어떤 체벌을 하든, 처벌은 이뤄지지 않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중학교 때는 길거리에서 체육복을 입고 다니면 주민들이 학교에 제보를 하고, 길거리에서 교사들이 화장하는 학생들, 체육복 입고 다니는 학생들을 잡을 정도였다. 

이런 일화도 있다. 하루는 교무실에 갔는데 한 교사의 책상 옆에 사람 크기만한 커다랗고 투명한 비닐봉투가 있었다. 뭔지 봤더니 전부 학생들에게서 빼앗은 화장품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러한 일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인권침해에 대해 대응이 이뤄지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대응할 힘을 잃은 것은 대응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몇 년간 반복적으로 쌓인 실패에 대한 경험 때문이다. 학생회 안건으로 교칙에 대한 의견을 올려도 교사의 말 한마디에 묵살 당하고, 인권침해를 지적해도 '교권'을 앞세워 학생인권 침해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등 직접 문제제기를 해봐도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의 의견은 사회에 제대로 반영될 기회조차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만 18세 선거권은 청소년들이 무엇인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소속 청소년들이 학생의 날(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하루 앞둔 2일 오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창살에 갇힌 퍼포먼스를 펼치며 ‘2018 학생의 날, 두발자유, 청소년 참정권, 스쿨미투에 응답하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1.02 ⓒ 최윤석

 
사실 선거권이 생긴다고 갑자기 청소년들의 현실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특히 만 18세 선거권은 청소년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주어진다. 선거연령 하향을 외치며 삭발을 했던 나 또한 내년 총선에 투표를 하지 못한다. 만 18세에 선거권이 생기면 나타날 변화를 말하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럼에도 청소년의 선거권이 보장돼야 하는 이유는 그들도 마땅히 참정권을 누려야 할 국민이기 때문이다.

선거연령 하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다. 대표적인 반대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교실의 정치화'다. 이 말은 현재의 교실이 정치화돼 있지 않다는 전제를 두고 있는데, 사실 잘못된 말이다.

교실은 예전부터 정치화됐고, 지금도 정치적인 곳이다. 교실은 앞으로 더욱 정치화돼야 한다. 사람들은 청소년이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되면 공부는 안하고 어딘가에 선동 당해 정치질이나 하며 살 것이라 예단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청소년이 미성숙하며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이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생긴 개념이다. 청소년도 어쩌면 선동 당할 수 있겠지만 성인 또한 선동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 청소년은 지금껏 정치에 참여해 왔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부터 시작해 4.19 혁명 등 청소년은 역사 속에서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왔다. 당장 교과서만 봐도 청소년들이 그간 얼마나 정치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사회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청소년은 미성숙해서 선동이나 당하고 정치에 이용 당한다'고 한다면, 이는 청소년에 대한 모욕이다. 

비슷한 논리로 청소년들이 특정 정당에만 표를 몰아줄 것이기 때문에 선거연령 하향을 하면 안 된다거나, 청소년이 선거권을 가지면 교사가 하라는 대로 찍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선거권은 어떤 사람이 어느 정당에 얼마나 정당한 근거로 표를 주는가를 심사해서 부여하는 권리가 아니다.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다. 

설령 청소년들이 쉽게 선동을 당한다고 해도 그것이 청소년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청소년들이 정치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도 않고, 청소년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것은 부당하다.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인해 정치에 관심 가질 시간도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제대로 된 얘기를 들려주지 않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할 수 있겠는가?

구조적 모순에 균열이 생겼다

정치 정책 중에는 입시 교육, 아동 복지 등 청소년에 관한 여러 정책이 있다. 하지만 정작 청소년은 선거권이 없어 이런 정책들에 개입할 수 없었다. 이것은 모순이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교육감 선거에서도 표를 행사하지 못한다.

내가 있는 경남에서는 지난해부터 경남학생인권조례 운동이 일었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의 당사자인 학생들은 선거권이 없어 우리의 의견은 너무나도 쉽게 무시돼왔다. 학생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이 선거권이 있는 성인들의 의견에 더 눈치를 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이 사례 자체가 청소년 선거권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행사에서 부스를 맡고 있었는데, 어느 정당의 후보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선거권이 있는 것 같은 활동가들에게만 명함을 쥐어주고 갔다. 그 순간은 꽤나 모욕적이었다. 말로는 선거연령이 하향돼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선거권이 없어 보이는 청소년에겐 명함조차 주지 않는 상황에 분노했던 기억이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축척된 분노가 지금의 '만 18세 선거권'을 만들어냈지 않나 싶다. 만 18세 선거권을 통해 앞으로는 정치인들이 더욱 청소년의 눈치를 보게 되고, 정치에서 더 다양한 아동·청소년 정책이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나아가 이번 선거법 개정이 더 낮은 선거연령 하향 조정을 위한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권리모(활동명)씨는 만 17세 청소년으로, 현재 경남에서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선거연령하향 #만18세선거권 #청소년인권법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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