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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봉기에 김개남부대 빠져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59회] 이같은 처사는 김개남의 실책이 아닌가 싶다

등록 2020.02.08 16:23수정 2020.02.0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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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어진.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모습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2점이 제작되었는데, 6점만 전해지고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무능한 위정자는 범죄자다.

고종은 무능하고 나약하고 부패한 군주였다. 일부 학자들이 근대화를 추진한 개명군주라고 떠받들지만, 전체를 보지 않고 특정한 부분만 과장한 단견이다.

일본의 압력으로 친부 흥선대원군에게 섭정을 맡겼으나 왕권은 이미 권위를 잃고 국정이 일본군 손에서 농단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이때부터 일본의 한국지배 마수가 작용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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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장군 ⓒ 박도

 
김개남은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어 국정을 바로 잡고, 곧장 서울로 진격하여 세도가와 귀족을 없앤다는 봉기 초기의 강령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동학농민군이 전국 각지에서 재봉기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동학농민군 대장의 하나인 김개남이 1894년 음력 8월 25일 (양력 9월 24일) 임실에서 남원으로 들어가 바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남원으로 달려가 아직 동학농민군 측의 준비가 부족함을 들어 좀 더 기다린 뒤 재봉기할 것을 권고했으나, 남원에는 동학농민들이 약 7만 명이나 운집하여 기세를 올리고 있었으므로 김개남은 "큰 무리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즉각 재봉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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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목 이곳이 동학농민 봉기때 김개남의 부대가 주둔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 하주성

 
김개남에게는 용맹한 천민 출신의 부대가 있었다. 동학군 접주들이 거느린 어느 부대에 못지 않은 특수한 부대였다.

"남원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전라좌도를 통치했던 대접주 김개남은 역시 천민출신신분 동학농민군 부대를 편성하였다. 김개남은 도내의 창우(倡優)와 재인(才人) 1천여 명을 뽑아 한 개의 특수한 농민군부대를 편성했는데, 그들은 사력을 다하여 충성을 바쳤다고 한다." (주석 2)

김개남 부대에 천민신분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전라좌도의 책임을 맡아 집강소를 경영하면서 제시된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따르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
 

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학농민군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새겨진 부조물이다. ⓒ 이돈삼

 
집강소의 원칙은 ① 탐관오리의 숙정 ② 신분제도 폐지와 천민해방 ③ 횡포한 부호의 응징과 재산몰수 ④ 삼정(三政)의 개혁과 무명잡세의 철폐 ⑤ 고리채의 무효화와 고리대부의 엄금 ⑥ 미곡의 일본유출 금지 ⑦ 지주제도의 개혁과 폐지 시도 ⑧ 백성들이 제출한 원소(寃訴)의 공정한 처리 ⑨ 관리들이 작성한 기록을 검열하여 잘못된 점을 시정 ⑩ 동학의 전도와 농민군 강화 등이었다. 

김개남은 이를 충실하게 실행하였다. 물론 이것은 호남 53개 군현에 설치된 집강소의 대원칙이지만, 김개남은 관할구역에서 철저히 시행하여 그만큼 주민들의 신뢰가 따랐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쪽이 조선을 지배하려 들 것이라 내다보면서, 그때 출병해야 한다는 신중론을 편데 대해, 김개남은 청일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일본군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개남은 전봉준 다음으로 동학농민군의 제2인자 위치에 있는 지도자였으며, 전봉준의 지시와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훨씬 더 급전적인 독자활동을 하면서 전봉준과 은근히 경합하는 상황에 있었으므로, 그가 즉각 재봉기하겠다는 것은 동학농민군 전체의 재봉기를 선도할 수 있는 심각하고 중대한 일이었다. (주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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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으로 분장한 학생들이 관작리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 이재형

 
꼭 김개남의 주장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은 9월 13일(양 10월 11일) 삼례에서 제2차 동학농민 봉기를 선포하였다. 전봉준을 비롯 다수의 동학지도자들과 4천여 명의 군사가 모인 가운데 재기포를 선언하고 각 도소에 격문을 보냈다.

그런데 왠일인지 막상 김개남과 그의 부대는 이날 봉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전봉준이 자신과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날짜와 장소를 정하여 반발한 것인지, 다른 이유였는지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후의 동학혁명의 전개과정에서 볼 때 이같은 처사는 김개남의 실책이 아닌가 싶다. 일부 기록에는 김개남이 남원에서 49일간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참서 때문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희박하다.

삼례의 재기포는 "조선에 불법침입해서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반(半) 식민지)으로 예속시키려고 청일전쟁까지 벌이고 있는 일본침략군을 조선땅에서 몰아내어 조국의 자주독립을 굳게 지키려는 동학농민군의 항일무장투쟁이 정식으로 선언된 것이었다." (주석 4)


주석
1> 황현, 『오하기문』, 신용하, 앞의 책, 181쪽.
2> 신용하, 앞의 책, 145쪽.
3> 앞의 책, 182쪽.
4> 앞의 책, 183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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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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