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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의 창출과 협치를 통한 시정 혁신의 발걸음

유창복의 <시민민주주의>를 읽고

등록 2020.04.19 20:01수정 2020.04.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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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복 저서 <시민 민주주의> 표지 . ⓒ 서울연구원

지방자치의 막이 다시(정부 수립 직후에 시작되었는데 박정희의 쿠데타로 중단되었기 때문에) 오른 지 어느덧 30년이 되었다. 그동안 서울의 민선 시장이 5명이 선출되었고, 그 가운데 박원순 시장의 재임 기간이 가장 길다. 보궐선거로 느닷없이 단체장이 된 이후 3기에 걸쳐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데, 지난 10년 동안 서울의 시정은 꾸준하게 진화해왔고 그 나름의 모델을 계속 실험해가고 있다. 키워드는 마을과 커뮤니티, 그리고 협치와 숙의로 압축될 수 있다. 첫 취임에서 내걸었던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는 구호처럼, 주민 또는 시민이 통치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위해 다양한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 도전을 처음부터 함께 구상하고 동행해온 인물 가운데 유창복씨가 있다. 20대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했다가 30대에 잠깐의 사업가로서의 경력을 거쳐 성미산마을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던 그를 박원순 시장이 찾아와 마을공동체 사업의 조력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동행은 서울시정의 전반적인 패러다임을 바꾸는 작업으로 이어져 거시적인 차원에서 여러 시도를 벌여왔다. 10년 동안 추구해온 목표는 한결같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다채로웠고, 그 과정도 우여곡절과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유창복씨는 그 긴 여정을 복기하고 성과와 한계를 짚으면서 의미를 밝히는 책 <시민민주주의>를 출간했다.

요즘의 출판 트렌드에 비춰보면, 너무 고루하고 딱딱하기 짝이 없는 제목이다. 하지만 그래서 돋보인다. 솔깃한 단어나 감성적인 수사(修辭)로 독자들을 현혹시키지 않고 핵심 주제를 곧바로 찌른다. 현실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더 나은 세상을 열망하는 이들에게 말을 건다. 이 책이 남다른 설득력을 갖는 까닭은 그 언어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온축해온 경험과 고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저자는 운동가로서 사회에 첫발을 들였다가, 행정의 책임자가 되어 여러 사업들을 꾸렸고, 대학원에서 학업을 닦으며 후학들을 양성하고 틈틈이 세 권의 저서도 출간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정치의 세계에도 입문한 바 있다. 그렇듯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면서 실행하고 연구한 발자취가 <시민민주주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마을, 시민의 등장과 연결'에서는 주민이 마을에 어떻게 데뷔하여 공론장을 형성하고 정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경제, 교육, 복지 분야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그리고 협치가 혁신의 디딤돌이 되기 위해 무엇에 유념해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2부 '협치, 참여에서 권한으로'에서는 서울시정에서 추구해온 협치의 전략과 시스템을 개괄하면서 지금 어떤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고 향후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이 무엇인지를 정리한다. 아울러 관련된 선언문과 조례도 자료로 첨부하고 있다. 3부 '자치, 시민 이니셔티브와 마을정부'에서는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시민사회가 마을 차원에서 어떻게 미시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하는지, 서울시의 경우 주민자치회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지, 커뮤니티가 주도적으로 지역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어떤 접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마을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행정 시스템이 접목되고 거기에 주민들이 결합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너무 많은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단일한 행위 주체가 풀어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칸막이로 분할된 관료제 시스템의 한계가 갈수록 분명해지고 전문가들은 분과 학문의 울타리에 갇히기 일쑤다. 사회운동도 민간의 역량만으로 이 세상의 난해한 문제들을 풀어내기에는 힘이 부친다. 이제는 기존의 영역과 범주들을 가로지르면서 해법을 찾고, 각 영역에서의 실행이 서로 맞물려 시너지가 날 수 있도록 판을 짜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변화의 동력이 생성될 수 있는 토대를 정확하게 포착해야 한다. 박원순 시정팀에서는 그 구심점과 원형질을 마을에서 발견했다.

마을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생활의 필요를 함께 하소연하고, 함께 궁리하면서, 협동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이웃들의 관계망'이라고 정의한다. 친한 사람들끼리의 폐쇄적인 관계망을 넘어선 차원에서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이 핵심인데, 거기에서 '주민들이 저마다의 필요와 욕구를 드러내고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공공권'이 창출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의 필요가 이웃의 필요가 될 때 내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 높아지고, 나아가 동네의 필요가 될 때, 해결의 수준이 높아진다'는 마을살이의 원리가 구현된다. 저자는 성미산에서의 마을 경험을 통해 확인한 이 진실을 정책의 틀 속에서 실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동네 아이들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광역도시의 행정 시스템에 대한 원대한 통찰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관료제의 고질적인 폐해를 극복해갈 실마리도 그런 맥락에서 모색된다. 경직된 원칙으로 주민들을 피곤하게 하는 공모제, 시민들을 들러리로 세우기 일쑤인 각종 위원회 등에서 벗어나려면 민간도 행정에 수동적으로 매달릴 것이 아니라 접점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면서 시민 이니셔티브와 커뮤니티 임팩트를 증진시켜야 한다. 그리고 행정의 틀에 상응해서 형성된 칸막이를 해체하고 협동과 자치의 세계를 점-선-면으로 확장해가야 한다. 중간지원조직은 그런 변환을 넛지 전술로 매개하는 장치로 자리매김된다. 이 책은 그러한 근린 거버넌스와 융합적 혁신의 세밀한 밑그림을 보여주면서 실행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경험의 정보화가 절실한 시대에 <시민민주주의>는 지식 생산의 소중한 모델로도 평가될 만하다. 정책과 운동, 개념과 실제, 일상과 구조, 미시와 거시, 원칙과 실용, 비전과 현장 등을 유연하게 잇는 글쓰기가 우리의 지성을 일깨운다. 시행착오를 정직하게 기록하고, 시민을 주인으로 세우려 할 때 부딪히는 딜레마가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증언하면서도 행간에 수많은 스토리들을 암시한다. 그 생략된 사연들을 상상하는 것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새삼 주목받는 지금, 그 기운을 견고한 기틀로 다져가는 여정에 이 책은 정밀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시민민주주의 - 마을 - 협치 - 자치 2012~2022

유창복 (지은이),
서울연구원, 2020


#유창복 #시민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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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전공.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저서로 <모멸감> <돈의 인문학> <유머니즘> <생애의 발견> <문화의 발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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