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국민 발의 개헌, 심재철과 박정희의 말이 비슷하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국민의 개헌 참여 막으려던 정권의 종말

등록 2020.05.06 13:27수정 2020.05.06 13:27
5
원고료로 응원
 
a

미래통합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4월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 남소연

 
국민 100만 이상의 발의로 헌법개정이 제안될 수 있도록 하는 국민발안제 개헌이 무산될 상황에 처했다.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는 현행 헌법 제128조 제1항에 '국민 발안에 의한 제안'을 추가하여 "헌법 개정은 국회의원 선거권자 100만 명이나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로 바꾸는 일이 흐지부지되게 생긴 것이다.

헌법 제128조 제1항 하나만의 개정을 추진하는 이번 원포인트 개헌은, 26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민발안개헌연대와 강창일·김무성 등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국회 국민발안개헌추진위원회의 합작으로 지난 3월 14일 국회의원 148명이 발의자로 나섬에 따라 추진됐다.

하지만, '개헌안 제안'의 다음 절차인 '개헌안 공고'로부터 60일이 되는 이번 9일까지 '개헌안 국회 의결'이 이뤄지지 않으면 다음 단계인 '개헌안 국민투표'에도 가지 못하고 중도 폐기된다.

4·15 총선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한 점, 여야 정치권이 적극적이지 않은 점과 더불어 이번 개헌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국민이 개헌 발의권을 갖는 것에 대한 보수세력의 경계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 경계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유신헌법 등장 직후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에서도 잘 드러난다.

"뒤집으려는" "불순한" 

국민발안제가 도입된 것은 1954년이다. 그해 11월 29일 등장한 1954년 헌법의 제98조 제1항은 "헌법 개정의 제안은 대통령, 민의원 또는 참의원의 재적의원 3분지 1 이상 또는 민의원의원 선거권자 50만인 이상의 찬성으로써 한다"고 규정했다.

그로부터 18년 뒤 이 규정은 박정희에 의해 폐지됐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등의 격동 속에서 국민들이 헌법개정을 발의해볼 기회도 없이 1972년 유신체제 등장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그해 12월 27일 등장한 유신 헌법의 제124조 제1항은 "헌법의 개정은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로 제안된다"고 함으로써 국민발안권을 삭제했다.

당시 박정희는 <관보> 제6288호에 실린 '헌법 개정안 공고에 즈음하여'라는 특별담화문에서 "나는 이 헌법 개정안의 공고에 즈음하여 이 땅 위에 한시바삐 우리의 실정에 가장 알맞은 한국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 올바른 헌법질서를 확립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우리 국민 모두의 줄기찬 헌신을 촉구하는 바입니다"라는 말로 개헌 동기를 설명했다.

그가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했던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체는 유신헌법 제124조 제2항에서 잘 드러난다. 제124조는 제1항에서 헌법개정 제안권을 대통령과 국회에만 부여한 뒤 제2항에서 이렇게 규정했다.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되며, 국회의원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결로 확정된다."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안은 국회 의결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민투표로 확정하도록 했다. 대통령이 제안한 국민투표가 부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므로, 이는 국회에 포진한 야당의 견제를 피하고 개헌권을 독점하겠다는 의도를 표출하는 것이었다.

한편, 국회가 제안한 개헌안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했다. 유신헌법 제36조 제1항 및 제2항에 따라 2000~5000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이끄는 것은 바로 대통령이었다. 제3항은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이 된다"고 규정했다.

이랬기 때문에, 대통령이 제안하는 개헌안뿐 아니라 국회가 제안하는 개헌안 역시 결국 대통령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다. 유신헌법을 지키는 것이든 바꾸는 것이든, 개헌 주도권을 독점하겠다는 박정희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말한 한국적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개헌 주도권을 독점하겠다는 박정희의 욕망이 헌법 제124조에서 표출된 점을 볼 때, 그가 국민발안권을 삭제한 이유 역시 자연스레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이 주도하는 개헌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가 제안하는 개헌과 달리 국민이 제안하는 개헌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개입이 상대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절차도 복잡하고 정치적 명분도 떨어진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국민발안권을 아예 삭제했다고 볼 수 있다. 
 

개헌운동의 중심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장준하, 사상가 함석헌 등이 있었다. ⓒ 함석헌기념사회업회

 
하지만 가만있을 국민들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박정희 입장에서 볼 때 '얄궂은 일'을 벌였다. 유신헌법은 개정된 당일인 1972년 12월 27일부터 시행됐다. 그런데 시행 1주년이 임박한 즈음에 국민들은 유신헌법 개헌운동을 개시했다. 국민발안권도 없는 국민들이 '주제 넘게', 그것도 하필이면 유신헌법 1주년 직전에 이렇게 했으니, 박정희의 속이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개헌운동의 중심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사상가 함석헌 등이 있었다. 이들은 1973년 12월 13일 시국간담회를 열고 12월 24일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한 뒤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개시했다. 유신헌법이 없앤 국민발안권을 이들이 실질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신헌법 제124조 제1항을 비웃는 일이었다.

박정희 정권도 가만있지 않았다. 12월 26일에는 김종필 총리가 경고 메시지를 날리고, 28일에는 문공부(교육부)도 동일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29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나섰다. 대통령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1973년 12월 29일자 <경향신문> 1면 톱기사 '개헌 서명운동 중지토록' 등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담화문의 첫 문장은 아래와 같다.
 
"나는 최근 일부 지각 없는 인사들 중에 현 유신체제를 뒤집어엎고 사회혼란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정부는 지난 26일 국무총리로 하여금 현 시국의 중대성과 백척간두에 서 있는 조국의 현실에 비추어 우리의 생존과 독립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누누이 설명하고 절대로 경거망동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을 온 국민들에게 간곡히 호소한 바가 있다."
 
국민들의 개헌 운동을 체제를 '뒤집어엎는' 일이자 '불순한' 움직임으로 평가했다. 그런 뒤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일부 불순분자들은 아직도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서 가지가지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선동과 유언비어를 유포하면서 동조세력을 규합하는 데 여념이 없는가 하면 3~4월 위기 운운하며 민심을 불안케 하고 혼란을 더욱 조장할뿐더러 각계 인사를 찾아다니면서 소위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언필칭 민주니 자유니 하고 국민을 선동하고 다니는 그들의 저의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개헌을 위한 여론 형성에 나선 국민들을 두고 '불순분자들의 과대망상증'이니 '가지가지 교묘한 수단과 방법'이니 하면서 폄하했다. 국민발안제에 시각을 여실히 드러내는 발언이다. 

국민의 개헌 참여 막으려던 정권의 종말

국민의 참여에 의한 개헌을 막고자 했던 박정희의 시도는 결국 우매한 일로 판명됐다. 1973년 12월 24일 개시된 개헌청원 서명운동은 불과 11일 만인 1974년 1월 4일 30만 명선을 돌파했다. 서슬퍼런 독재 치하에서 30만 명을 넘는 국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이름을 써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곧바로 정권 위기로 연결됐다. 1월 7일 공화당 지도자급인 정구영·예춘호 등이 탈당하더니, 1월 8일에는 박정희 정권이 개헌 논의를 금지하겠다며 긴급조치 제1호 및 제2호를 발포했다. 평상시의 시스템만으로는 권력을 지킬 자신이 없어 비상체제를 선택했던 것이다.

13일에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백기완이 구속됐다. 2월 25일에는 느닷없이 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국민의 개헌 참여를 막겠다며 긴급조치를 남발하고 간첩단 사건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체제를 '뒤집어엎는' '불순한' 움직임에 대해 '가지가지 교묘한 수단과 방법'이 동원됐던 것이다.

박 정권의 대응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을 가중시키다가 결국 1979년 10·26 사태로 귀결됐다. 국민의 개헌 참여를 막겠다고 벌인 일이 정권 붕괴로 종결된 것이다. 국민발안 개헌제에 대한 보수세력의 경계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원포인트 개헌에 대해 경계심을 드러낸 보수 정치인 중에 심재철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논리가 박정희의 논리를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담화 때 언급한 '뒤집어엎는'과 '불순한' 같은 표현이 심재철의 논리에도 등장한다.

5월 2일자 <연합뉴스> 기사 '심재철 8일 본회의 안돼... 새 원내 지도부가 결정'에 따르면, 그는 이날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민발안 개헌안은 헌정 자체를 뒤집으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민주노총을 동원해 노동자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라며 국민발안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

매우 위험한 말이다. 국민에 대한 인식 수준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 국민발안제를 막았던 박정희는 결국 그것 때문에 망했다. 그런 말 하면 망한다는 것을 심재철 원내대표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kimjongsung.com저서: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 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신라왕실의 비밀,왕의 여자 등.

AD

AD

인기기사

  1. 1 아베 정부의 이상징후... "한국의 양해가 왜 필요하죠?"
  2. 2 "배신감 느꼈다" 문재인 정부에 사표낸 교수의 호소
  3. 3 "그럴 자격있어?" 오취리-남희석에 쏟아진 비난... 씁쓸했다
  4. 4 은마 아파트 주민의 언론 인터뷰 유감
  5. 5 폭우 이재민 80%가 이주노동자, 이유가 기막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