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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뿐이던 '인신매매관련법', 개정 논의 첫발 뗐다

"기소조차 어려웠던 현행법"... 여가부, '포괄적 인신매매 방지법' 논의 시작

등록 2020.05.13 15:27수정 2020.05.1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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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2015년 5월 예술흥행(E-6) 비자를 받고 한국에 온 필리핀 여성 4명을 속여 유흥업소로 넘긴 사건이 있었다. E-6 비자는 한국에서 연예·공연·운동 등의 활동을 희망하는 외국인에게 발급된다. 해당 비자를 받은 필리핀 여성들은 이와 무관한 유흥업소에서 유사 성행위·성매매를 강요받았다.

당시 피해 여성들을 변호했던 공익인권법센터 공감과 어필은 해당 사건을 인신매매라며 고소했다. 하지만 가해자는 최종적으로 성매매 알선·상습강제추행 등의 다른 혐의로 입건됐다. 처벌도 징역 1년·집행유예 2년에 그쳤다.

유명무실한 인신매매 처벌법

국제기준에 따르면 위 사건은 인신매매에 속한다. 2000년 유엔이 채택한 '팔레르모 의정서(인신매매 방지 의정서)는 "착취를 목적으로 상대방을 속이거나 취약한 지위를 이용하려고 강제적 수단을 사용하는 행위"를 인신매매라며 구체적으로 "착취를 목적으로 위협, 무력행사, 납치, 사기, 기만, 권력 남용 등으로 사람을 모집·운송·이송·은닉·인수하는 일련의 행위, 여기서 착취는 성적 착취, 노동 착취, 장기 탈취 등을 의미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람을 매매한 사람은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형법 289조 1항), "노동력 착취, 성매매와 성적착취, 장기적출을 목적으로 사람을 매매한 사람은 2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동법 3항)라고만 되어 있다.

공익법센터 어필 소속 김종철 변호사는 2014년 발표한 논문에서 "(현행법이) 인신매매에 대한 자세한 정의 규정 없이 '사람을 매매한 사람은 처벌한다'라고 규정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유엔 인신매매 의정서를 비준한 선진국의 입법례를 보면 (중략) 대부분이 위 의정서(팔레르모 의정서) 수준의 포괄적인 정의 규정을 가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현행법은 국내외로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상황실태조사 연구용역보고서'에서 "(현행법은) 인신매매에 대한 자세한 정의 규정 없이 '사람을 매매한 자'라고만 한다. '매매'라는 행위 유형만을 제시해 놓은 것은 오히려 인신매매의 범위를 좁힐 우려가 있다"라고 꼬집었다. 앞서 필리핀 여성들의 사례에서 가해자에게 인신매매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던 이유도 인권위의 지적과 맞닿아 있다.

미국도 한국의 인신매매관련법을 언급했다. 지난해 6월 20일 미 국무부는 '세계 인신매매보고서'에서 "한국의 현행 법률은 인신매매에 대한 국제 기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라며 "인신매매범들이 피해자들에게 강요한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이 충분하게 반영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미 국무부는 "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은 '인신매매 방지를 위해 이를 전담할 정부 기관이 없어 인신매매 피해자 보호를 위한 노력도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했다"며 "한국 법의 인신매매 정의를 국제법과 밀접하도록 개정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여성가족부 '포괄적 인신매매 방지법' 논의 첫발

이러한 문제가 최근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여성가족부에서 지난 4월 '포괄적 인신매매 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관련법 개정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7일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현재 실무단계에서 관련법을 검토하고 있다"며 "현재 관련법 추진에 앞서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여성가족부는 4월 말 포괄적 인신매매 방지법과 관련한 전문가 간담회를 주최했다. 당시 간담회에 초청받았던 전문가는 익명을 전제로 6일 기자에게 "현행 인신매매법으로는 대부분의 사건이 기소 자체가 어렵다. 인신매매죄를 적용할 수 있는 범죄 양태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라며 "이번에는 정부가 현재 법의 미비함과 관련해 먼저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가부 관계자도 "현재 한국의 인신매매법은 국제법 정의와 달리 '사람 간 매매'로 많이 한정돼 있다"면서 "현행법의 수준, 현행법이 규정하는 범주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이걸 어떻게 정리해나갈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한두 달이 지나면 조금 더 내용이 나올 것"이라며 "(전문가를 통해) 관련 의견을 듣고 관계 부처와 논의를 거쳐서 (개선) 방향을 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기지촌 피해 여성들을 돕는 단체 '두레방'의 김태정 소장은 12일 "저희는 늘 포괄적 인신매매 방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신매매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라며 "이전까지는 여가부에서 먼저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적극적으로 논의 자리를 만든 적이 없었다. 여가부가 관련 의사를 보인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아직 진행 초기 단계기 때문에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김 소장은 향후 인신매매법 논의를 추진하기 위해 다른 단체와 연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신매매에는 노동·예술·관광·취업 등 다양한 피해 분야가 있다. 각 분야를 나눠서 전문가들이 함께 논의한 뒤 여가부에 의견을 제시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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